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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저 너머로 여행을 떠나면 우리는 내일을 기약하기 위해 잠자리에 들 채비를 마쳤었다. 타고 남은 마음을 그러모으고 바닥을 구르는 말을 주워 담아 내 하루의 두 눈을 감겨주었다. 어둠 아래, 미련은 늘 체류하나 우리에게는 쉼이 필요할 뿐이다. 2021. 5. 24.
고백
그저 끄적임이 반복된다. 붉게 홍조를 띤 심장을 뒤로한 채 역류하는 혈액을 억지로 삼키고 달콤한 말을 속삭이기 시작한다. 언제나 수줍음으로 가늘게 떨렸던 맞닿아야 두꺼울 입술이 열리고 결국엔 부드러운 말재간을 한다. 그저 끄적임이 반복된다. 아직 초라한 설렘, 마음을 토해내니 입안을 맴돌던 말이 펜 끝에 달렸다. 끄적임 끝에 그저 막연한 기대. 서로가 서로의 의미를 키워주고, 뜻을 먹어치워 가게 되면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며, 마음을 더듬기에 여념이 없을 터다. 2021. 5. 24.
곧, 있을
닳아 유순해진 열의를 저만치 밀어둔 채, 잠시 침잠하기를 원했다. 언제쯤 해묵은 기대가 지칠지, 날을 헤아리기를 멀리하고 의식을 흐리며 어딘가에 맡겨둔 꿈결을 애타게 기다린다. 미약한 광휘가 아름답다며, 곧 저물 해를 떠올리니 호선 위가 익숙하여 잊힌, 방울져 떨어진 그 옛을 번진 풍경채를 한없이 헤매여 다시 찾을 게 선했다. 차올라, 종래에는 가라앉을 한 때의 탄식이 아직 들릴까. 달뜬 숨소리는 희열을 빙자해, 또다시 묵빛으로 채색될까. 그리하여, 나는 짧은 안식으로 하여금 회상한 길을 닦아놓겠다. 그 작은 편린에 남을, 일그러진 기억이 변질되지 않도록. 2021. 5. 11.
어떤가요
우습게도, 사실이라는 단어를 거짓을 고할 때 고르고는 했습니다. 그러니 애써 이해하지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당신은 자욱한 안개를 맞이하며 살짝, 입꼬리를 들었으면 합니다. 스스로를 알지 못한 채로, 잔잔한 수면을 마주해 벅차 흐느끼지 않도록 큰 보람도, 드높은 성취도, 자라난 기대 역시 조금은 덜어내도 좋습니다. 단지, 당신이 걷는 길이 누구와 같이 희미하지 않기를 소망하겠습니다. 모든 게 아득해질 언젠가, 뒤돌아보며 한 서린 탄식을 토해내지 않도록 아쉽게도, 거짓이라는 말조차 대부분 사실을 읊을 때 쓰고는 했습니다. 혹시 당신도 평온의 한적함과 차분한 고요, 헤아릴 수 없는 경이를 아실까요. 새벽에 흩날리는 밤조각을, 게으른 정오의 휘청임을, 밤중의 가라앉은 숨을 아마 당신도.. 2021. 5. 11.
그대에게
텅 빈 종이에 펜촉을 가져다대기 두려운 매일이다. 불온을 서랍 깊은 곳에 놓고 왔지만 마음이 다시 적어내고 눈물로 닦은 길을 애써 허물어도 발이 그곳을 따라 걸었다. 한 걸음에 그리워진 목소리, 그에 웃으니 잠자리가 편치 않다. 추억과 약속을 품에 가득 안고 왔지만 내겐 턱 없이 모자랐고 우리가 주인이 되었을 세상은 좀처럼 입밖까지 나오지 않는다. 그리 내 탓을 하며, 때가 한껏 탄 쪽지를 또다시 꺼내 읽는다. 한 때 내쉰 숨이 왜 형용할 수 없이 달콤해졌는지 기약없이 미뤄두었던 언젠가가 어디쯤에 있는지 아득했던 기쁨이 그 사이 얼마나 더 자랐는지를 늘 그랬듯 되새겨 그대를 꿈에서 또 찾아봅니다. 조만간 다시 만날 날이 오고 있음을 전하기 위해 2021. 5. 11.
굳게
명을 받을어, 내 바람을 오래도록 잠재우자. 불어와, 등을 받치는 격려는 발을 내딛어 처연히, 남겨놓은 위로는 기합을 내질러 감싸오는 손길이 미처 닿아올 수 없도록 그리하여, 굳게 눈을 감아본다. 체념함으로, 굴종의 의념을 심상 내에 새기자. 점을 찍어 지금까지의 시간을 가두고 선을 그어 지금부터의 형태를 다듬어 원을 그려 길고 긴 지금을 밀어내기를 그리하여, 굳게 때를 잊어본다. 언젠가, 한낱 미물조차 만상에 침묵을 흩뿌리면 난 낮과 밤이 교차하는 경이 속에서 회상하겠다. 굽이치는 여명이 폐부 심층까지 들어차도록 꺼져가는 황혼이 다음 날에 다시 돌아오도록 전혀 다른 파장도 함께 얽혀 나아갈 수 있도록 그러므로, 굳게 서 견뎌내겠다. 그렇게 비로소, 더 이상의 각오가 필요치 않을 때 나는 첫 모습 그대로.. 2021. 5. 10.
달래다
울음이 소리를 잃은 새벽, 한 길 앞의 심정처럼 안개가 자욱하다. 낮게 우는 풍랑과 기척 없이 날 두드리는 미약한 빗줄기에 잠겨 쉼을 권유하는 한적한 풍경에서 그저 무겁고 탁한 숨을 내쉰다. 번져가길 반복해 이내 흘러내리는 세상이 발치에 고여만 간다. 탁한 녹청빛, 앞으로 헤질 날만 남은 색채가 사위에 만연하다. 이질감은 판단을 헤집었고, 익숙함은 이질감을 해소해냈다. 날개를 잃은 구름이 비탈을 굴러도 여전히 연기가 가득하다. 많은 이들이 독 품은 반딧불이를 쥔 채로 한판을 내뱉는다. 결국 다 타들어 온기를 잃으면 표정은 다시 검게 먹먹해진다. 그래, 우리 모두는 짧은 생은 기억하지 못하는 약속을 전해 들었다. 가장 찬란해 어쩌면 품위 없을지도 모르는 한 시절을 바치리라고. 좀 더 빛이 보였으면 해, 다.. 2021. 5. 10.
듯한
상상하고 있을까, 피로에 젖어든 모습을 괜히 또, 안타까운 듯한 마음이 있다. 되새기고 있을까, 남기고 간 이야기들을 스치는, 애처로운 듯한 마음이 있다. 청명한 새벽을 폐부 가득히 채워 넣으면 무심코 당신이 곁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더 울적해져버린 듯한, 그런 마음이 있다. 잘하고 있는 걸까, 낡은 향이 배인 곳에서 금세 또, 기대고 싶은 듯한 마음이 든다. 잘되고 있는 걸까, 나아진다는 느낌이 없어 그리, 널 보고 싶은 마음이 밀려오는 듯했다. 계절이 교차하는 시절의 하루, 그 하나의 복판. 황혼이 몸을 뉘인 초록의 끝에서 숨을 내쉬면 수없이 고대하는 날이 조금은 다가올까 싶어 그리움이 되려 커진 듯한, 그런 마음이 든다. 굳어짐과 대비되어 요동치는 듯한, 혼란함과 엇갈려 가라앉은 듯한 굽은 등을 남.. 2021. 5. 10.
주변을 보다 (2)
흙내음이 난다. 한기가 피부를 오르고, 불에 달군 돌이 점차 식어간다. 생전 처음 보는 문자가 모든 시선을 가져갔다. 머무르고, 주저 앉고, 흐르는 동시에 가로 막힌 기묘한 형태의 글자가 사방에 가득하다. 작은 등불을 곁에 두고, 손으로 짚어가며 글을 읽는 이는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존재였다. 단단한 흙벽에서 서늘함이 스며나오고, 그가 들고 있는 석판을 더 차갑게 만든다. “이 위치는...” 석판의 뒤에 숫자를 새기고, 어질러진 방을 가로질러 침상 위의 배낭에서 지도를 꺼낸다. 베두로페에서 펼쳤던 상세한 지도가 아닌, 조잡하고 낡았으나 다른 부분이 있었다. 죽음의 땅 사라노아를 지나, 신드라의 강줄기를 따라 해양으로 향한다. 현재의 지도에는 없는, 둥란이라는 섬이 그려져있다. “항해, 표류, 귀환인가.. 2021.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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