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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1)
적색 한기, 불꽃이 아무리 탄식을 쏟아내도 우울하게 내려앉은 기색들은 변화의 조짐이 없으니. 스미는 바람은 낮게 불어와, 웅크린 몸을 더욱 작게 만든다. 숙여진 고개는 지나온 길에 새긴 경험이나, 이로움이 없으며. 숨을 내쉴 때마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김이 마치 본인의 혼 같았기에, 그는 장작을 더 집어넣었다. 기세를 키우는 화염, 시야는 좀 더 화사해졌으나 주변은 여전히 어두움에 옷깃을 여민다. 일렁이는 화마를 담은 두 눈동자에는 색이 깃들지 못했으니, 건물을 휘감는 풍랑조차 활기가 없다. 무너져내린 활로, 두터운 벽 하나를 남기고 내실을 부수어 생을 보전하는 날이 길게 늘어진다. 먼지가 일어날 생동감 조차 없는 지독한 날이 이어짐에, 작은 불씨가 숯더미 안으로 더욱 숨어드나 타오를 것이 없다. 온기를.. 2021. 3. 20.
Anemone
심을 것이 자명하여도 결국에는 꺾어내겠습니다. 생에 끝으로 보낸 전언, 그때 즈음이면 바래기를 바라며 끊긴 언약은 굳셈이 없으리라고 세치 혀보다 멀리 두어 제게는 줄기 하나 짓이길 힘이 없으니 말을 잊겠습니다. 애초에 덧난 사랑이라도 끝내 아물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머물렀던 공간, 백골이 되어도 채워져 있기만을 한 맺힌 영혼은 떠나지 않을 거라고, 종결 뒤의 시작에서 제게는 아직 같은 종류의 씨앗이 남았다고 말하겠습니다. 시든 아네모네, 오직 그 뿐이던 정원을 보았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도 우리는 꺾기를 기약함과 뿌리내렸으며 지겹다고 농을 던질만한 인연은, 정말로 지겨워질 수 있기를 허나 제게는 오직 당신을 품을 여력 밖에 없기에 떠나겠습니다. 몇 년이 지나면 또 다시, 이 꽃을 한 번 더 심겠다 다.. 2021. 3. 20.
내 어림
좋은 말을 하려고 했다. 당신이 행복했으면 했었다.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남이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이 더욱 많았다고 느낄 땐 그랬었다. 당신을 위했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이 자리에 남아있는 것보다 남이 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들이 더욱 좋겠다고 느낄 땐 그랬었다. 당신의 울음소리를 몰랐었다. 못난 나에게 오는 당신의 이 길이 전부를 쏟아부어 만든 것이라고는 단 한 순간도 떠올리지 못했었다. 2021. 3. 20.
그대
내가 바라던 나에게 하듯, 그대를 내가 익숙한 나에게 하듯, 그대를 그 사이에는 내가 없다며, 그대를 저는 그대를 그리 생각하겠습니다. 적어도, 내가 나를 위하는 이기심보다는 적어도,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맘만큼은 적어도, 그대가 나를 떠올려주는 수보단 저는 그대를 그리 생각하겠습니다. 그대여, 당신이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나는 그대가 꿈꿔왔던 사람이 아니라는 그 사실은 여전히 뒤에 숨긴 그 상태로 저는 그대가 지금 바라는, 그 곁에 머무르겠습니다. 행복하지만 언제나 어색할, 이 따스한 자리 위에서 그대여, 저는 지금보다 더 당신을 염원해도 될까요? 2021. 3. 20.
이기
그래, 눈물도 어딘가로 흐르기는 할 터다. 내 숭고한 감정에 대한 헌정의 끝맺음일지 더 일어서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일지는 결국, 물줄기가 메말라 붙어버린 곳에서야 그래, 슬픔도 언젠가는 미화되고 말 터다. 받았던 모든 형상에 대한 마지막 답장일지 더 다가서지 못한 순간에 대한 후회일지는 결국, 낙엽을 새하얀 눈으로 덮고 난 뒤에야 내 사랑은 한 때의 이기심에 지나지 않았다며 남은 미련을 성에가 낀 봄이 오기 전에 묻는다. 2021. 3. 18.
기어가는 하루
낡은 목줄이 땅에 끌려 끊어질까. 매 번 기다려달라며 칭얼거리던 기어가는 하루를 품에 안아본다. 조금은 쉬어가도 좋지 않냐며 우리 함께 기어가자고 했었던 네가 그리 내 발치에 밟혔었지. 매일, 팔만육천사백 번의 걸음 언제나 동일하게 기어가던 너는 내 뜀박질에는 너무도 느렸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인데 재촉을 달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끈이 점차 느슨해져 거친 길바닥에 닳고 닳아 끊어지니 내가 매듭을 짓는 동안에도 기어가는 반복되는 하루를 이젠 모를 수 없기에 너를 보며, 낡은 줄을 목덜미에 감았다. 우리는 두 발로 여전히 기어간다. 2021. 3. 18.
그 날에
언젠가 따오겠다는 약속이 떨어지는 날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들을 셈하기 시작했다. 달뜬 숨이 빗어 내린 풀잎의 은은한 향기 뺨을 타고 내려오는 달빛의 수줍은 표정 여전히 생생하니, 느낌에 거침이 없었다. 다만, 내가 다짐했던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외투를 걸치고, 잠옷차림으로 발을 들었다. 그 날에 결여된 것이 있어, 그곳으로 향했다. 약속이 도달하고 난 뒤, 나는 도착했다. 나와는 다르게 여전히 앳된 얼굴의 그녀가 있던 그때의 자리에 서서 고개를 서서히 내려보았다. 그 날은 그때의 날에 머무르기를 원했었고 그때는 그 날의 때에 남아있기를 꿈꿨지만 조금은 자랐어도, 여전히 나보다 작은 아가씨가 내 발을 물끄러미 바라본 채 굳어 있는 걸 보니 그 날에 다짐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2021. 3. 14.
못난이들에게
우리는 위화감을 숨긴 채로 익숙한 풍경채 속에서 만났다. 자석 따위에도 극이 있건만 우리는 따질 것이 없었는지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초침이 움직이자 분침이 움직이고 이내 시간이 흘러갔다. 운명인 즉 운명이겠으나 우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변화가 있었고 우리는 조금씩 달라져갔다. 허나, 우리 속의 나들은 아직 시작이라 외친다. 후에 우리는 빛바랠 사진처럼 모여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내가 기억하는 네가,나를 기억하는 네가 빛을 머금은 채 온전히 간직될 수 있을까. 난 텅 비어버린 칠판에 부탁한다는 글을 적어본다. 내가 기억하는 너로 남아 달라는 욕심을 담아. 2021. 3. 12.
더, 더, 더
날개없는 피식자의 벼락질이었다. 그 자신이 풍랑의 예기라도 된 것처럼 폐를 조각낸 탄식을 바람이라 불렀다. 부디, 이 검은 깃털이 창공을 쪼길 때 일순이 피사체가 되어 머물러 달라고 죽어버린 나의 신에게 모진 말을 했다. 그래, 철새가 지나갔던 항로는 그랬다. 그저 한 삶이었고, 이전의 가르침이었다. 다만, 그 날갯죽지를 찢어버리고 싶다는 차게 끓어오른 낮은 감흥이 염원을 했지. 더 낮은 곳으로, 비탈길을 구르기 원했던가. 이 모든 모남이 고통에 찌그러져 끝나기를 살려달라는 아우성이 더는 비집지 못하도록 무지를 세워 깨달았었던 곳, 거기 말이야. 네가 줄곧 소망해왔던 낙원으로 가고 있어. 더는 최악을 말하지 않게, 진정한 종결으로 더, 더, 더… 조금만 불안을 뜯어먹으며 기다려줘. 담을 수 없던 것에 거.. 2021.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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