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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고요가 지나치다. 아스라이 남은 목소리와 눈빛, 차분한 웃음 가끔씩 드러나는, 그리움과 달라졌을 흔적마저 모두가 저변 아래에 묻혀 숨을 죽인지 오래다. 한 때는 남겨진 내가 안타까워 울었고 어느 날은 슬피 여기던 이유를 잊어 불안했으며 오늘은 그조차 지나가 덤덤한 삶이 비참할 따름이다. 그래, 익숙함이 지나쳤다. 나는 여전히 처음처럼 목청 높여 울어야 한다. 폐부의 호흡 한줌 남기지 않고 쉼 없이 흐느껴 놓친 것이 언제나 저변 위로 떠오르게 했어야 했다. 그리 뉘우쳐야 지나치지 않을 터다. 홀로 멀리 떠나버린 때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때 그토록 어설프고 미숙하여 놓쳐버린 시절이 음성이 들리는 곳, 시선이 닿는 곳, 서로 마주볼 자리 누군가는 지나치다 말하도록 소중히 간직해 나를 더욱 더 살아가게 만들 .. 2024. 1. 5.
3. 끝내 모를 일들
“착각이 아니군?” “그렇다니까요.” 가장 먼 풍경이 선명한, 그만큼 작은 행성. 마른 땅과 죽은 잔디 위에 대자로 뻗은 중년 남자와 젊은 여성이 연달아 말했다. 그들의 차림새는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덩치 큰 남자는 펑퍼짐한 로브를 둘렀고, 온몸에 오밀조밀한 근육이 들어찬 여자는 몸의 굴곡을 완전히 드러낸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달라붙는 레깅스와 크롭티를 입은 그녀는 복부에 사선으로 길쭉한 흉터가 있었는데, 마치 거친 날로 찢어낸 창상처럼 보였다. 그들은 하늘을 지속적으로 살피고 있었는데, 허공에는 수백만 개의 바윗덩어리들이 점멸하고 있었다. 천천히 추락하는 바위들을 보며 몸을 풀던 그녀는 허리를 튕기며 단번에 일어섰고, 남자는 땅에 맞닿은 손에 힘을 주어 몸을 들었다. 남자는 그 큰몸을 가볍게 들었고.. 2023. 1. 13.
2. 갈림길 귀퉁이
두피를 따라 전류가 흐른다. 몸의 잔털들이 파도치듯 일어나고 남은 포말은 피를 끓게 만들었다. 심장의 고동이 풍경이 전하는 소리보다 더욱 크게 들리기 시작하니, 나는 다른 감각을 불러오기 위해 손에 쥐고 있던 쇳덩어리를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얇은 살가죽에 한기가 감돌았다. 무기물에게서 빌려온 일말의 냉정으로 숨을 길게 들이쉰다. 필요 이상으로 긴장된 근육을 달래야했다. 청각에 날을 세운 상태를 유지하며, 느린 걸음으로 경계 초소를 벗어난다. 전투화 밑창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다. 어설픈 돌계단은 없었다. 사람들이 오가며 다져진 산길이 있을 뿐이다. 한낱 꿈인가. 분리된 시간인가. 서늘한 바람이 지표면을 따라 불어온다. 드러난 목덜미가 추위를 받아들였다. 몸이 잘게 떨린다. 내 상태를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2023. 1. 13.
1. 달아나 닿은 낙원
오래도록 이어지던 일과가 오늘을 기하여 마무리되었다. 전역을 앞둔 며칠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으나, 머릿속에 남은 말과 장면은 꽤나 많은 편이었다. 어느 바람이 불었는지 내 마지막 석식을 함께한 행정보급관. 퇴근 중에 슬그머니 다가와 혹시 숨겨둔 탄피 없냐며 묻던 중대장. 그래도 네 마지막을 두 눈으로 보는 건 자신 뿐이라고 말하던 포술부사관. 동기 한 명 없는 군생활, 그래서 더욱 마음이 쓰였던 내 어리숙한 후임들. 모든 인연이 살포시 닿은 뒤 흘러내려가 각자의 이별을 완성하고 있었다. 그래, 끝내 길동무가 될 사람은 없다. 애써 무리를 지어도 결국 끈없는 연에 불과한 신세였으니, 마지막은 처음처럼 외로우리. 강원도의 거친 산세에 땅거미가 내려앉는 모습을 바라보며 담배를 입에 문다. 가지고 온 한 보.. 2023. 1. 13.
기도
열린 문 틈을 향해 수십 개의 물길이 뻗는다. 섞이지 못할 후회, 닮은 마음은 서로 배척한다. 불안을 감추려 끝없이 춤추는 나도 그러했다. 흔들리는 시선과 젖은 몸에 벌써 희미해진 날이다. 그리 흐려진 풍경이기에 몇 개의 선이 더욱 확연했다. 상석에서 우는 남자, 나는 그의 웃음을 혐오한다. 먼 길을 흘러 돌아온 바다보다 더없이 옅은 언제까지나 굳지 못할 피가 여전히 생생하다. 그래, 우리는 맞붙을 수 없다. 같은 뿌리를 공유하는 서로 다른 기둥, 그리고 그보다 많은 가지여. 위안을 찾아 떠도는 물병 안에서 얼키고 설킨 각자의 믿음들이여. 우리의 기도가 스스로의 신이 죽었음을 증명하니 더 구슬피 울라. 태어나 단지 끝을 약속한 삶을 한없이 헤아려, 끝내 기쁘다 여기면서. 2022. 8. 10.
엉겨붙은 허물
어느새 버릇이 되어버린 듯, 나는 이렇게 습관처럼 첫 날을 상상하고는 했다. 설명하기 힘든 허전함이 가시지 않아 그랬을지, 아니면 항상 가시를 세웠던 그녀가 못내 그리운 탓일지는 확실치 않았다. 아마, 그녀도 지금의 나처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었을지 모른다. 단절된 공감을 시사하듯, 물병에 꽃아둔 푸른 꽃잎을 손끝으로 쓰다듬는다. "한 번 쯤 만나고 싶네." 내가 준비도 없이 떠나보낸, 두 번째 인연이었으니까. 언제나와 같은 오늘을 셈하며, 주인을 떠나보낸 침상은 여전히 쓸쓸한 온기로 가득하다. 한 자리를 맴도는 체취는 한결같으니 이번 아침도 별 다른 일이 없겠지. 끝을 기다리는 자들 뿐인 낙오자들의 마을에서는 더더욱 그럴 터였다. 무언가 거북한 활기, 이미 지나간 옛을 탐하고픈 뒤틀린 .. 2022. 7. 13.
죽은 별
수많은 안도 끝에, 먼 하루들이 쏟아져 내렸다. 보다 빛나던 날은 겁먹어 딛지 못한 길에 박히고 곧이어, 영원한 밤의 어스름이 짙어지며 깨우친다. 꿈결로 지어낸 낙원은 내 하늘에서 날 기다렸음을 어두운 밤은 품은 것의 윤곽마저 모조리 먹어치웠다. 도망쳐 얻어낸 삶은 여전히 꿈에 기대어 살았으니 내게 질린 희망이 사는 땅은 더 갈 길을 지워냈다. 두려움에 사무쳐 눈물로 새로운 망막을 만든다. 놓친 삶을 선명하게 할, 내 모자람을 밝힐 눈이었다. 먼 하루들이 발치에서 맥동하고 있기에, 밝은 땅을 보며 되새겼다. 돌이킨 시절은 여명이었으니, 지금은 황혼을 지났음이 명백했다. 너른 땅 어딘가, 나를 떠난 희망을 찾는다. 다시 꿈을 찾는다면 하늘은 다시 밝아올까? 비극을 지불하여 희극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여정을.. 2022. 6. 13.
맴도는 것들
현실에 주인공은 없다. 늘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문장이라 여겼다. 빛나는 시절은 있겠으나, 결국 영원은 없을 테니까. 불안과 위안 사이를 걸으며 약간의 행복에 기대어 살아간다. 다만 이제야 되짚어 떠올리기에, 너무 급히 완결한 가치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영원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고리타분한 생각 끝에 옅은 한숨을 뱉는다. 그로부터 바람이 낮게 일어난다. 흐름은 지표면의 굴곡을 따라 굽이치고, 풀들은 일제히 휘청거렸다. 미약하게 남은 우울을 쓸어내던 풍랑이 허공으로 떠오르니, 시선은 기류를 따라서 멀어진다. 희미해진 기류 뒤편으로 푸른 달이 보인다. 달빛 사이에 숨은 온화함은 갈라진 마음을 또 한 번 긁어냈기에, 나는 발을 움직여 휘영청 떠오른 빛을 .. 2022. 4. 10.
어귀에서
어림을 알며 칭얼였다. 내 생은 홀로 자라지 못하기에 커진 마음으로 어리광을 부렸다. 다만 이제는 희미해진, 여전히 낮은 시선이었다. 부끄러움을 느낌에도 미숙했다. 삶을 알아 늘 비좁았음을 깨우쳤기에 같은 높이의 명운을 우러렀다. 넓은 땅과 울타리로, 지금도 여전한 낮음이었다. 하여, 나는 네발로 걷기를 소망했다. 언젠가에, 혹은 다음 날에 있을 낮음을 위해. 결국 함께 허덕일 시간들을 벗삼아 빛나도록. 한 때를 닮은 어림을 있는 그대로 세우기를 바라기에 미련끼리 엮은 약속으로 하여금, 내가 어느 순수에 영원하기를. 2021. 11. 18.

오래된, 차마 잊지 못한 바람이 불어온다. 나지막한 그리움과 색 바랜 옛 장소들이다. 그리, 감정이 된 표정과 향으로만 남은 장면에 또 한 번, 여전한 아둔함이 사무치게 미워졌다. 그에 목젖에 매달린 불안이 아득한 빛을 좇는다. 바닥에 끌리던 목줄을 붙잡아 짧게 고쳐 쥐었고 갈라진 바람의 항로를 틀어 빛 저변에 두었으며 닿지 못할 말들을 깊은 주름 사이에 끼워 넣었다. 지난 삶의 오물을 지워낸 도화지에 옛 꿈을 덧칠한다. 즐거워, 손 틈으로 흘러간 시간을 안타까워할 여유를 잃어 여러 겹의 낮밤이 교차하고서,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이제 가벼이 회상할 경험이여, 그렇게 스스로를 완성하는 시절이여. 바깥에 꺼내 놓은 불온은 여전히 부족함을 일깨워 나를 헐뜯겠으나 그에 기꺼이 언제라도, 목줄 끝에 덧없음을 .. 2021.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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