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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녹슨 저울 추들8

주변을 보다 (2)
흙내음이 난다. 한기가 피부를 오르고, 불에 달군 돌이 점차 식어간다. 생전 처음 보는 문자가 모든 시선을 가져갔다. 머무르고, 주저 앉고, 흐르는 동시에 가로 막힌 기묘한 형태의 글자가 사방에 가득하다. 작은 등불을 곁에 두고, 손으로 짚어가며 글을 읽는 이는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존재였다. 단단한 흙벽에서 서늘함이 스며나오고, 그가 들고 있는 석판을 더 차갑게 만든다. “이 위치는...” 석판의 뒤에 숫자를 새기고, 어질러진 방을 가로질러 침상 위의 배낭에서 지도를 꺼낸다. 베두로페에서 펼쳤던 상세한 지도가 아닌, 조잡하고 낡았으나 다른 부분이 있었다. 죽음의 땅 사라노아를 지나, 신드라의 강줄기를 따라 해양으로 향한다. 현재의 지도에는 없는, 둥란이라는 섬이 그려져있다. “항해, 표류, 귀환인가.. 2021. 3. 28.
주변을 보다 (1)
바라지 않았었던,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그런 일이었다. 스스로가 지켜온 지난 시간들이 단 하루만에 무너진다는 것은, 긍정적인 변화라도 본인을 힘들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의식이 돌아왔음에도 눈을 뜨지 못했다. 조용한 방 안을 메운, 영상물의 음향이 가진 미세한 잡음조차 거슬렸다. “눈 좀 뜨지 그래?” 익숙한 목소리, 점점 무뎌질 수밖에 없었던 기이한 감각이 살아났다. 나의 여동생은 나와 닮았다.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자 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남이 될 수는 없었다. 편안해지고 싶었다. 내가 우연히 만났던 다른 사람들도 만남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감정을 쌓고, 덜어낼 이가 필요했었다. 그건 우리가 아닌, 자신을 신인류라고 칭한 모두의 의견이다. 하지만, 우리는 배려를 중시했기.. 2021. 3. 25.
한 걸음 (6)
라텐스는 천을 끌어올려 매듭을 묶었다.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닌지, 미간은 찌푸려진 채였다. “앞으로 며칠간 대기해야 합니까?” 퓌르레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점점 가까워오는 거대한 석재출입구를 올려다보고 난 후, 두둥실 떠오르듯이 말했다. “길어야 나흘...” 라텐스는 그 모습을 보고,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미적인 요소 보다는 사람의 기세를 찍어누르고자 조각된 거대한 석상이 입구의 양 옆에 서있다. 근엄한 표정와 자세로 경직된 것이 아닌, 통로에 창을 겨눈채 눈에 박힌 보석을 계속해서 번쩍인다. "이곳이 그렇게 가치가 있는 곳인가요?" "하하, 그건 나중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라텐스의 표정은 여전했다. 이 상황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별.. 2021. 3. 24.
한 걸음 (5)
눈길은 발끝에 채여 바닥을 굴렀고, 일행의 발길은 자신에게 허락된 시야를 따라 움직였다. 구불구불하게 파인 동굴이 라텐스의 앞을 채웠다. 초기에는 인공적인 형상이 선명했겠지만, 진보의 변화가 아니더라도 기억 이후의 광경은 괴리감의 거체에 따라 비틀어진다. 푸르스름한 등불이 일정한 간격으로 벽면에 매달려있다. 적토는 자신이 마주하지 못한 광채에 저항하는 법을 몰랐고, 이는 영원한 흔적에 질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억세게만 보였던 퓌르레로의 안색 또한 시퍼렇게 물들어 숨통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고, 주머니의 입구를 풀어헤쳤다. 히두는 통로를 가로지르며 허리춤에 매달아 놓았던 장도리를 손으로 옮겼다. 입자가 고운 흙에 묻힌 커다란 바위를 향해 공구를 휘두르자, 맑은 금속음이 얇으나 넓게.. 2021. 3. 23.
한 걸음 (4)
의외로 후덥지근한 기운이 감도는 내부에는 별달리 특별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실외보다 높은 온도가 의문점을 남겼지만, 보이는 풍경은 일상의 하나로 남을 피사체에 불과했다. 모래거미의 줄이 느슨하나 견고하게 벽면에 닿아있고, 손길을 허락한 지 오래된 듯한 농기구에는 먼지만 가득하다. 간혹 설치류에 의해 발생한 소음은 말 그대로 자연의 지저귐과 다름이 없었다. 그늘이 품은 아지랑이의 단말마가 가득하다. 그는 허리를 숙여 손으로 땅을 쓸었다. 부드러운 피부의 겉면을 타고 구르는 고운 입자는 손길에 따라 작은 생명들의 무덤가가 되었다. 그는 입술을 모아 바람을 불었고, 언젠가 다다를 운명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의 몸체가 휘청거렸다. 배낭 속의 잡동사니가 부딪히는 소리가 마중을 재촉하고, 그를 쳐다보던 남성의 .. 2021. 3. 23.
한 걸음 (3)
심연, 미약한 광택조차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나지막하게 울리는 심장의 고동이 유난히 크게 들리는, 빈틈없이 밀폐된 공간이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유난히 시리다. 손을 뻗어 앞을 더듬자, 무언가 뭉개져 피부를 덮어온다. 이 역시, 내 몸을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나는 눈 속에 파묻혀있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자의 묘비 위를 덮는 울음 덕에, 무뎌진 일부의 감각이라도 가야할 방향은 알고 있었다. 손과 발을 휘저으니, 체온은 높아지나 주위는 여전히 춥다. 결정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빛 줄기 역시, 서늘함을 이겨내진 못했다. 곧이어, 눈덩이가 쏟아져내렸다. 창백하게 질린 대지, 단 한 줌의 푸름을 쥐지 못한 땅이 내 눈앞을 메웠다. 내리쬐는 햇살은 반사되어 내 눈을 찔러왔으나, 이미 세상은 온통 백.. 2021. 3. 20.
한 걸음 (2)
수고가 낮은 종으로 경계를 나눈 휴식처에서 한 걸음 멀어진다. 자연스럽게 다가왔던 고양이는 그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본래의 자리로 향한다. 사회에서 길러진 그들은 뒤를 보지 않으며, 몽환적인 빛에 흐려진 정면을 향한다. 네온, 방전관 속의 저항이 투명한 물줄기에 산산이 부서져 흩날린다. 한 순간의 명멸을 늘어뜨리며, 횡단보도 앞에 선다. 도로를 주행하던 차량이 나를 인식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옅게 펼쳐진 막을 따라 흘러내리는 빗물이 기어코 지하수로 떨어져내린다. 순식간에 생겨난 물의 항로, 그 위로 옅은 청색의 테두리가 인상적인 자가용이 다가와 코앞에 멈춘다. 안타깝게도, 이 모든 장면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안락한 좌석에서 음악을 들으며 우수에 젖어있을 누군가에게 간단한 목례를 하고, 시선을 높은 .. 2021. 3. 20.
한 걸음 (1)
적색 한기, 불꽃이 아무리 탄식을 쏟아내도 우울하게 내려앉은 기색들은 변화의 조짐이 없으니. 스미는 바람은 낮게 불어와, 웅크린 몸을 더욱 작게 만든다. 숙여진 고개는 지나온 길에 새긴 경험이나, 이로움이 없으며. 숨을 내쉴 때마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김이 마치 본인의 혼 같았기에, 그는 장작을 더 집어넣었다. 기세를 키우는 화염, 시야는 좀 더 화사해졌으나 주변은 여전히 어두움에 옷깃을 여민다. 일렁이는 화마를 담은 두 눈동자에는 색이 깃들지 못했으니, 건물을 휘감는 풍랑조차 활기가 없다. 무너져내린 활로, 두터운 벽 하나를 남기고 내실을 부수어 생을 보전하는 날이 길게 늘어진다. 먼지가 일어날 생동감 조차 없는 지독한 날이 이어짐에, 작은 불씨가 숯더미 안으로 더욱 숨어드나 타오를 것이 없다. 온기를.. 2021.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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