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89

어디에도
고요가 지나치다. 아스라이 남은 목소리와 눈빛, 차분한 웃음 가끔씩 드러나는, 그리움과 달라졌을 흔적마저 모두가 저변 아래에 묻혀 숨을 죽인지 오래다. 한 때는 남겨진 내가 안타까워 울었고 어느 날은 슬피 여기던 이유를 잊어 불안했으며 오늘은 그조차 지나가 덤덤한 삶이 비참할 따름이다. 그래, 익숙함이 지나쳤다. 나는 여전히 처음처럼 목청 높여 울어야 한다. 폐부의 호흡 한줌 남기지 않고 쉼 없이 흐느껴 놓친 것이 언제나 저변 위로 떠오르게 했어야 했다. 그리 뉘우쳐야 지나치지 않을 터다. 홀로 멀리 떠나버린 때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때 그토록 어설프고 미숙하여 놓쳐버린 시절이 음성이 들리는 곳, 시선이 닿는 곳, 서로 마주볼 자리 누군가는 지나치다 말하도록 소중히 간직해 나를 더욱 더 살아가게 만들 .. 2024. 1. 5.
기도
열린 문 틈을 향해 수십 개의 물길이 뻗는다. 섞이지 못할 후회, 닮은 마음은 서로 배척한다. 불안을 감추려 끝없이 춤추는 나도 그러했다. 흔들리는 시선과 젖은 몸에 벌써 희미해진 날이다. 그리 흐려진 풍경이기에 몇 개의 선이 더욱 확연했다. 상석에서 우는 남자, 나는 그의 웃음을 혐오한다. 먼 길을 흘러 돌아온 바다보다 더없이 옅은 언제까지나 굳지 못할 피가 여전히 생생하다. 그래, 우리는 맞붙을 수 없다. 같은 뿌리를 공유하는 서로 다른 기둥, 그리고 그보다 많은 가지여. 위안을 찾아 떠도는 물병 안에서 얼키고 설킨 각자의 믿음들이여. 우리의 기도가 스스로의 신이 죽었음을 증명하니 더 구슬피 울라. 태어나 단지 끝을 약속한 삶을 한없이 헤아려, 끝내 기쁘다 여기면서. 2022. 8. 10.
죽은 별
수많은 안도 끝에, 먼 하루들이 쏟아져 내렸다. 보다 빛나던 날은 겁먹어 딛지 못한 길에 박히고 곧이어, 영원한 밤의 어스름이 짙어지며 깨우친다. 꿈결로 지어낸 낙원은 내 하늘에서 날 기다렸음을 어두운 밤은 품은 것의 윤곽마저 모조리 먹어치웠다. 도망쳐 얻어낸 삶은 여전히 꿈에 기대어 살았으니 내게 질린 희망이 사는 땅은 더 갈 길을 지워냈다. 두려움에 사무쳐 눈물로 새로운 망막을 만든다. 놓친 삶을 선명하게 할, 내 모자람을 밝힐 눈이었다. 먼 하루들이 발치에서 맥동하고 있기에, 밝은 땅을 보며 되새겼다. 돌이킨 시절은 여명이었으니, 지금은 황혼을 지났음이 명백했다. 너른 땅 어딘가, 나를 떠난 희망을 찾는다. 다시 꿈을 찾는다면 하늘은 다시 밝아올까? 비극을 지불하여 희극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여정을.. 2022. 6. 13.
어귀에서
어림을 알며 칭얼였다. 내 생은 홀로 자라지 못하기에 커진 마음으로 어리광을 부렸다. 다만 이제는 희미해진, 여전히 낮은 시선이었다. 부끄러움을 느낌에도 미숙했다. 삶을 알아 늘 비좁았음을 깨우쳤기에 같은 높이의 명운을 우러렀다. 넓은 땅과 울타리로, 지금도 여전한 낮음이었다. 하여, 나는 네발로 걷기를 소망했다. 언젠가에, 혹은 다음 날에 있을 낮음을 위해. 결국 함께 허덕일 시간들을 벗삼아 빛나도록. 한 때를 닮은 어림을 있는 그대로 세우기를 바라기에 미련끼리 엮은 약속으로 하여금, 내가 어느 순수에 영원하기를. 2021. 11. 18.

오래된, 차마 잊지 못한 바람이 불어온다. 나지막한 그리움과 색 바랜 옛 장소들이다. 그리, 감정이 된 표정과 향으로만 남은 장면에 또 한 번, 여전한 아둔함이 사무치게 미워졌다. 그에 목젖에 매달린 불안이 아득한 빛을 좇는다. 바닥에 끌리던 목줄을 붙잡아 짧게 고쳐 쥐었고 갈라진 바람의 항로를 틀어 빛 저변에 두었으며 닿지 못할 말들을 깊은 주름 사이에 끼워 넣었다. 지난 삶의 오물을 지워낸 도화지에 옛 꿈을 덧칠한다. 즐거워, 손 틈으로 흘러간 시간을 안타까워할 여유를 잃어 여러 겹의 낮밤이 교차하고서,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이제 가벼이 회상할 경험이여, 그렇게 스스로를 완성하는 시절이여. 바깥에 꺼내 놓은 불온은 여전히 부족함을 일깨워 나를 헐뜯겠으나 그에 기꺼이 언제라도, 목줄 끝에 덧없음을 .. 2021. 10. 10.
옛에게
늘 그랬듯, 최대한 담담히 흐느꼈다. 먼 하루의 끝자락을 붙잡은 채 기울었으며 끝내 턱끝을 치켜들어 무너지지 않으려 했다. 어린 내게 보이기엔 너무나 추레하다. 그렇기에 바랜 옛으로 돌아가자. 되짚은 게 두렵지 않을, 멀지 않은 일로 그리하여 먼 어제의, 아스라이 들리는 약속이 있었다. 고작 이제 맞잡은 손을 시작으로 운명을 함께하자며 멀기만 한 끝을 그리는 네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오늘의 나에게는 너무나 눈부신 일이다. 그렇기에 닳은 옛으로 돌아가자. 어둔 밤에 사무쳐 익숙해진, 여전한 일로. 그곳에는 먼 추억의, 선이 뭉개진 장면이 있었다. 아련한 목소리와 드문드문 끊어진 손길이 닿았다. 떠오른 기색이 가라앉아, 가장 먼 내일을 바라본다. 잠들지 못한 꿈과 위로의 잔해 사이로 언젠가의 옛이 될 내가.. 2021. 10. 5.
영원한 악몽
한없이 익숙할 첫머리를 매만진다. 흐름을 잃은 마디가 손끝에 내려앉으니 어느덧 생경해진 감촉의 숨결이 들렸다. 그에, 우리는 초라한 내게 말했다. 네 삶으로 빚은 일을 두려워 말라며 우습기 짝이 없는 불안을 숨기라 했지. 당연히, 내 모두는 그 뜻을 알았고 이미 사무치도록 새긴 일이 오래였다. 때문에 더욱 아니길 간절히 소망했다. 그럴듯한 말로 치장해 오물을 반짝이고 빌려온 광휘 귀퉁이의 향을 온몸에 뿌렸으며 옛적에 잃은 편린을 들춰 잿더미에 불씨를 피웠다. 그래, 우리 모두는 제 주제를 안다. 그 어느 것 하나 알면서 행하지 않은 불합리한 자신들이니. 어찌 그리도 추한, 불안하리 너무나 가까운 이를 모르겠는가. 2021. 9. 27.
옹알이
여전히 붉은 살갗 아래, 공들여 닳아버린 마음이 헐떡인다. 한 때는 최선이라 믿었고, 지금도 믿어 의심치 않고 있건만 고심 끝에 내린 막 뒤편을 확인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어둔 밤에 떠오르는 장면이 미워, 이불을 뒤집어 써 데웠다. 온 하루가 숨결이 되어 좁은 곳에 머무르니 숨이 막혀왔다. 억지로 호흡을 뱉어 빈 공간을 만든다. 번진 글과 흘러간 말을 주워 담아 마음 속에 기워냈으나 떠내려간 시절을 다시 표현하기엔 너무 달라진 자신이여. 홍조를 띈 가죽 아래, 미처 녹지 못한 서늘함을 보았는가. 내가 바란 길은 끝내 굽어져, 추억할 옛 자리로 돌아왔으나 언제나 쓰다듬어 닳아버린 약속들은 형태를 잃은지 오래다. 그리, 앞으로 물러난 나는 대체 어느 날이 그리웠을까. 아무 것도 모르던 때인가. 아니면,.. 2021. 7. 15.
아득함이
밤마다 두려움을 셈하기가 질린 때다. 표정을 잃은 감정에게서 느낀 불안감을 재우고 나아가지 못하는 바람을 달래는 법을 배우며 신뢰를 품에 끌어안은 채 아쉬움과 작별했다. 아침마다 허전함을 달래기가 힘겨웠다. 말을 잃은 입술은 맞닿기엔 너무 멀어보였고 잘 알지 못하는 걸 상상하는 건 무리였기에 쌓아둔 마음을 언젠가로 보내는 게 익숙했다. 낮마다 어리석은 생각들을 책망했다. 힘든 하루의 끝에, 내가 힘이 될 수 없음을 칭얼임을 들어도, 제대로 다독일 수 없음을 너무 느린 걸음에, 곁을 지켜줄 수 없음을 매일마다 울음과 웃음이 한가득 남았다.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는 게 눈에 보여서 무슨 일이 있을까, 자주 불러주는 게 들려서 혹시나 울지 않을까, 말을 삼키는 걸 알아서 매순간마다 항상 떠올리게 해주었다. .. 2021. 6. 4.
오늘이었던, 오늘이었을
하나를 셈한다는, 그 아침의 여명에서 나는 바른 마음을 선망함을 알았으며 둘을 세어 보이며, 이 정오의 작열에서 나는 눈이 부셔 디딘 곳을 바라보았고 셋이 되었음에도, 이 저녁의 황혼에서 발자국이 남지 않았음을 그제야 알아 다시 하나를 셈하며, 마지막 밝음에서 옳다는 것의 정의를 눈물로 지워내며 물길이 지난 흔적에서 악취를 맡았다. 그리 한 손을 떨굼에, 이제는 어둑한 길에서 옛, 혹은 오늘이었던 태양의 빛을 떠올리고 지난날에 누운 어린 맹세를 상기해내었다. 그런, 오물을 치우던 손에서 하나를 들어 한 때는 오늘이었을, 내일 아침을 셈했다. 2021. 6. 4.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