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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랑22

아득함이
밤마다 두려움을 셈하기가 질린 때다. 표정을 잃은 감정에게서 느낀 불안감을 재우고 나아가지 못하는 바람을 달래는 법을 배우며 신뢰를 품에 끌어안은 채 아쉬움과 작별했다. 아침마다 허전함을 달래기가 힘겨웠다. 말을 잃은 입술은 맞닿기엔 너무 멀어보였고 잘 알지 못하는 걸 상상하는 건 무리였기에 쌓아둔 마음을 언젠가로 보내는 게 익숙했다. 낮마다 어리석은 생각들을 책망했다. 힘든 하루의 끝에, 내가 힘이 될 수 없음을 칭얼임을 들어도, 제대로 다독일 수 없음을 너무 느린 걸음에, 곁을 지켜줄 수 없음을 매일마다 울음과 웃음이 한가득 남았다.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는 게 눈에 보여서 무슨 일이 있을까, 자주 불러주는 게 들려서 혹시나 울지 않을까, 말을 삼키는 걸 알아서 매순간마다 항상 떠올리게 해주었다. .. 2021. 6. 4.
고백
그저 끄적임이 반복된다. 붉게 홍조를 띤 심장을 뒤로한 채 역류하는 혈액을 억지로 삼키고 달콤한 말을 속삭이기 시작한다. 언제나 수줍음으로 가늘게 떨렸던 맞닿아야 두꺼울 입술이 열리고 결국엔 부드러운 말재간을 한다. 그저 끄적임이 반복된다. 아직 초라한 설렘, 마음을 토해내니 입안을 맴돌던 말이 펜 끝에 달렸다. 끄적임 끝에 그저 막연한 기대. 서로가 서로의 의미를 키워주고, 뜻을 먹어치워 가게 되면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며, 마음을 더듬기에 여념이 없을 터다. 2021. 5. 24.
어떤가요
우습게도, 사실이라는 단어를 거짓을 고할 때 고르고는 했습니다. 그러니 애써 이해하지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당신은 자욱한 안개를 맞이하며 살짝, 입꼬리를 들었으면 합니다. 스스로를 알지 못한 채로, 잔잔한 수면을 마주해 벅차 흐느끼지 않도록 큰 보람도, 드높은 성취도, 자라난 기대 역시 조금은 덜어내도 좋습니다. 단지, 당신이 걷는 길이 누구와 같이 희미하지 않기를 소망하겠습니다. 모든 게 아득해질 언젠가, 뒤돌아보며 한 서린 탄식을 토해내지 않도록 아쉽게도, 거짓이라는 말조차 대부분 사실을 읊을 때 쓰고는 했습니다. 혹시 당신도 평온의 한적함과 차분한 고요, 헤아릴 수 없는 경이를 아실까요. 새벽에 흩날리는 밤조각을, 게으른 정오의 휘청임을, 밤중의 가라앉은 숨을 아마 당신도.. 2021. 5. 11.
그대에게
텅 빈 종이에 펜촉을 가져다대기 두려운 매일이다. 불온을 서랍 깊은 곳에 놓고 왔지만 마음이 다시 적어내고 눈물로 닦은 길을 애써 허물어도 발이 그곳을 따라 걸었다. 한 걸음에 그리워진 목소리, 그에 웃으니 잠자리가 편치 않다. 추억과 약속을 품에 가득 안고 왔지만 내겐 턱 없이 모자랐고 우리가 주인이 되었을 세상은 좀처럼 입밖까지 나오지 않는다. 그리 내 탓을 하며, 때가 한껏 탄 쪽지를 또다시 꺼내 읽는다. 한 때 내쉰 숨이 왜 형용할 수 없이 달콤해졌는지 기약없이 미뤄두었던 언젠가가 어디쯤에 있는지 아득했던 기쁨이 그 사이 얼마나 더 자랐는지를 늘 그랬듯 되새겨 그대를 꿈에서 또 찾아봅니다. 조만간 다시 만날 날이 오고 있음을 전하기 위해 2021. 5. 11.
듯한
상상하고 있을까, 피로에 젖어든 모습을 괜히 또, 안타까운 듯한 마음이 있다. 되새기고 있을까, 남기고 간 이야기들을 스치는, 애처로운 듯한 마음이 있다. 청명한 새벽을 폐부 가득히 채워 넣으면 무심코 당신이 곁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더 울적해져버린 듯한, 그런 마음이 있다. 잘하고 있는 걸까, 낡은 향이 배인 곳에서 금세 또, 기대고 싶은 듯한 마음이 든다. 잘되고 있는 걸까, 나아진다는 느낌이 없어 그리, 널 보고 싶은 마음이 밀려오는 듯했다. 계절이 교차하는 시절의 하루, 그 하나의 복판. 황혼이 몸을 뉘인 초록의 끝에서 숨을 내쉬면 수없이 고대하는 날이 조금은 다가올까 싶어 그리움이 되려 커진 듯한, 그런 마음이 든다. 굳어짐과 대비되어 요동치는 듯한, 혼란함과 엇갈려 가라앉은 듯한 굽은 등을 남.. 2021. 5. 10.
비행
언젠가부터 하늘을 우러렀다. 걸음이 느리게 느껴져 그랬다. 당신이 멀어보인 탓도 있었다. 나는 가끔씩 먼 하늘을 보았다. 모든 곳이 비슷한 거리 같았다. 당신이 멀어보인 탓을 해봤다. 오늘은 이미 저문 하늘을 봤다. 땅과 하늘이 전부 같은 색이다. 그래도 당신은 늘 멀 뿐이었다. 그래서 날고 싶었다. 당신이 멀어보이지 않게. 2021. 3. 27.
Anemone
심을 것이 자명하여도 결국에는 꺾어내겠습니다. 생에 끝으로 보낸 전언, 그때 즈음이면 바래기를 바라며 끊긴 언약은 굳셈이 없으리라고 세치 혀보다 멀리 두어 제게는 줄기 하나 짓이길 힘이 없으니 말을 잊겠습니다. 애초에 덧난 사랑이라도 끝내 아물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머물렀던 공간, 백골이 되어도 채워져 있기만을 한 맺힌 영혼은 떠나지 않을 거라고, 종결 뒤의 시작에서 제게는 아직 같은 종류의 씨앗이 남았다고 말하겠습니다. 시든 아네모네, 오직 그 뿐이던 정원을 보았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도 우리는 꺾기를 기약함과 뿌리내렸으며 지겹다고 농을 던질만한 인연은, 정말로 지겨워질 수 있기를 허나 제게는 오직 당신을 품을 여력 밖에 없기에 떠나겠습니다. 몇 년이 지나면 또 다시, 이 꽃을 한 번 더 심겠다 다.. 2021. 3. 20.
내 어림
좋은 말을 하려고 했다. 당신이 행복했으면 했었다.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남이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이 더욱 많았다고 느낄 땐 그랬었다. 당신을 위했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이 자리에 남아있는 것보다 남이 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들이 더욱 좋겠다고 느낄 땐 그랬었다. 당신의 울음소리를 몰랐었다. 못난 나에게 오는 당신의 이 길이 전부를 쏟아부어 만든 것이라고는 단 한 순간도 떠올리지 못했었다. 2021. 3. 20.
그대
내가 바라던 나에게 하듯, 그대를 내가 익숙한 나에게 하듯, 그대를 그 사이에는 내가 없다며, 그대를 저는 그대를 그리 생각하겠습니다. 적어도, 내가 나를 위하는 이기심보다는 적어도,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맘만큼은 적어도, 그대가 나를 떠올려주는 수보단 저는 그대를 그리 생각하겠습니다. 그대여, 당신이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나는 그대가 꿈꿔왔던 사람이 아니라는 그 사실은 여전히 뒤에 숨긴 그 상태로 저는 그대가 지금 바라는, 그 곁에 머무르겠습니다. 행복하지만 언제나 어색할, 이 따스한 자리 위에서 그대여, 저는 지금보다 더 당신을 염원해도 될까요? 2021. 3. 20.
이기
그래, 눈물도 어딘가로 흐르기는 할 터다. 내 숭고한 감정에 대한 헌정의 끝맺음일지 더 일어서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일지는 결국, 물줄기가 메말라 붙어버린 곳에서야 그래, 슬픔도 언젠가는 미화되고 말 터다. 받았던 모든 형상에 대한 마지막 답장일지 더 다가서지 못한 순간에 대한 후회일지는 결국, 낙엽을 새하얀 눈으로 덮고 난 뒤에야 내 사랑은 한 때의 이기심에 지나지 않았다며 남은 미련을 성에가 낀 봄이 오기 전에 묻는다. 2021.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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