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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희망23

어귀에서
어림을 알며 칭얼였다. 내 생은 홀로 자라지 못하기에 커진 마음으로 어리광을 부렸다. 다만 이제는 희미해진, 여전히 낮은 시선이었다. 부끄러움을 느낌에도 미숙했다. 삶을 알아 늘 비좁았음을 깨우쳤기에 같은 높이의 명운을 우러렀다. 넓은 땅과 울타리로, 지금도 여전한 낮음이었다. 하여, 나는 네발로 걷기를 소망했다. 언젠가에, 혹은 다음 날에 있을 낮음을 위해. 결국 함께 허덕일 시간들을 벗삼아 빛나도록. 한 때를 닮은 어림을 있는 그대로 세우기를 바라기에 미련끼리 엮은 약속으로 하여금, 내가 어느 순수에 영원하기를. 2021. 11. 18.
옛에게
늘 그랬듯, 최대한 담담히 흐느꼈다. 먼 하루의 끝자락을 붙잡은 채 기울었으며 끝내 턱끝을 치켜들어 무너지지 않으려 했다. 어린 내게 보이기엔 너무나 추레하다. 그렇기에 바랜 옛으로 돌아가자. 되짚은 게 두렵지 않을, 멀지 않은 일로 그리하여 먼 어제의, 아스라이 들리는 약속이 있었다. 고작 이제 맞잡은 손을 시작으로 운명을 함께하자며 멀기만 한 끝을 그리는 네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오늘의 나에게는 너무나 눈부신 일이다. 그렇기에 닳은 옛으로 돌아가자. 어둔 밤에 사무쳐 익숙해진, 여전한 일로. 그곳에는 먼 추억의, 선이 뭉개진 장면이 있었다. 아련한 목소리와 드문드문 끊어진 손길이 닿았다. 떠오른 기색이 가라앉아, 가장 먼 내일을 바라본다. 잠들지 못한 꿈과 위로의 잔해 사이로 언젠가의 옛이 될 내가.. 2021. 10. 5.
오늘이었던, 오늘이었을
하나를 셈한다는, 그 아침의 여명에서 나는 바른 마음을 선망함을 알았으며 둘을 세어 보이며, 이 정오의 작열에서 나는 눈이 부셔 디딘 곳을 바라보았고 셋이 되었음에도, 이 저녁의 황혼에서 발자국이 남지 않았음을 그제야 알아 다시 하나를 셈하며, 마지막 밝음에서 옳다는 것의 정의를 눈물로 지워내며 물길이 지난 흔적에서 악취를 맡았다. 그리 한 손을 떨굼에, 이제는 어둑한 길에서 옛, 혹은 오늘이었던 태양의 빛을 떠올리고 지난날에 누운 어린 맹세를 상기해내었다. 그런, 오물을 치우던 손에서 하나를 들어 한 때는 오늘이었을, 내일 아침을 셈했다. 2021. 6. 4.
굳게
명을 받을어, 내 바람을 오래도록 잠재우자. 불어와, 등을 받치는 격려는 발을 내딛어 처연히, 남겨놓은 위로는 기합을 내질러 감싸오는 손길이 미처 닿아올 수 없도록 그리하여, 굳게 눈을 감아본다. 체념함으로, 굴종의 의념을 심상 내에 새기자. 점을 찍어 지금까지의 시간을 가두고 선을 그어 지금부터의 형태를 다듬어 원을 그려 길고 긴 지금을 밀어내기를 그리하여, 굳게 때를 잊어본다. 언젠가, 한낱 미물조차 만상에 침묵을 흩뿌리면 난 낮과 밤이 교차하는 경이 속에서 회상하겠다. 굽이치는 여명이 폐부 심층까지 들어차도록 꺼져가는 황혼이 다음 날에 다시 돌아오도록 전혀 다른 파장도 함께 얽혀 나아갈 수 있도록 그러므로, 굳게 서 견뎌내겠다. 그렇게 비로소, 더 이상의 각오가 필요치 않을 때 나는 첫 모습 그대로.. 2021. 5. 10.
뿌리
틈새를 비집고 무언가가 들어왔다. 견고하기만 했었던, 나의 철옹성에 낯설기만한 이방인이 발을 붙였다. 이 구멍을 막지 않았던가. 이전에 나의 사람이 빠져 나갔던 곳을 보는 것만으로 구슬피 여겨 그런 걸까. 영원히 한결같을 줄 알았던 거리에 생전 처음보는 발자국이 남아있다. 전투를 두려워한 나머지 한 명의 병사도 없었다. 저 자를 내쫓을 이도, 앞에서 마주할 이도 없다. 남아있는 몇 사람들은 창문을 걸어 잠그고 나는 성 안의 이제 쓰지 않는 방을 열었다. 한 줄기의 빛만 남아있는 돌무덤을 부순다. 역시나 어떤 것도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이곳저곳으로 굴러간 돌을 짊어지고 걷는다. 저 이방인이 혹시나 이곳으로 다시 나갈까. 흔적으로 다른 흔적을 메우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제 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만나게 .. 2021. 3. 25.
기어가는 하루
낡은 목줄이 땅에 끌려 끊어질까. 매 번 기다려달라며 칭얼거리던 기어가는 하루를 품에 안아본다. 조금은 쉬어가도 좋지 않냐며 우리 함께 기어가자고 했었던 네가 그리 내 발치에 밟혔었지. 매일, 팔만육천사백 번의 걸음 언제나 동일하게 기어가던 너는 내 뜀박질에는 너무도 느렸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인데 재촉을 달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끈이 점차 느슨해져 거친 길바닥에 닳고 닳아 끊어지니 내가 매듭을 짓는 동안에도 기어가는 반복되는 하루를 이젠 모를 수 없기에 너를 보며, 낡은 줄을 목덜미에 감았다. 우리는 두 발로 여전히 기어간다. 2021. 3. 18.
못난이들에게
우리는 위화감을 숨긴 채로 익숙한 풍경채 속에서 만났다. 자석 따위에도 극이 있건만 우리는 따질 것이 없었는지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초침이 움직이자 분침이 움직이고 이내 시간이 흘러갔다. 운명인 즉 운명이겠으나 우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변화가 있었고 우리는 조금씩 달라져갔다. 허나, 우리 속의 나들은 아직 시작이라 외친다. 후에 우리는 빛바랠 사진처럼 모여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내가 기억하는 네가,나를 기억하는 네가 빛을 머금은 채 온전히 간직될 수 있을까. 난 텅 비어버린 칠판에 부탁한다는 글을 적어본다. 내가 기억하는 너로 남아 달라는 욕심을 담아. 2021. 3. 12.
일련
거리 위에 피어난 아지랑이가 세상을 녹여내었다. 풍파에 익숙해져 끝내 둔탁해진 외벽을 부숴내고 힘들여 세운 열의를 흩어내던 바람을 조각내었다. 잿더미를 빚어 세운 숲에 태양은 떠오르지 않으니 우리는 좀 더 높은 곳을 선망하여 하늘을 우러렀다. 욕망은 우리를 만들었고, 또한 우리를 지어냈으니. 바람에 실린 열기가 남몰래 숨쉬던 불씨를 틔웠다. 끓어오르는 땀은 두꺼운 피부를 녹여내어 흐르고 발걸음이 진득하게 늘어붙어 굳은 살을 떼어내니 공든 숲이 몰락하며 언젠가 놓아둔 새싹이 돋아났으나 우거지는 수목 아래, 우리는 좀 더 환한 빛을 떠올렸다. 2021. 2. 15.
변화
빈틈을 채우는 삶이 야속해질 무렵에 어느새 무뎌진 자신들을 발견했을까. 제 살을 베어내던 칼에 푸른 녹이 슬었으니 하잘 것 없는 쓰임새마저 사라질 게 두려워 덧난 상처를 갈고 닦아 언젠가를 돌려내었다. 추억이 될 시간 어귀, 과거는 미래를 쫓을 뿐. 남은 핏기를 증발시킨 나잇살의 점성 아래 익숙한 핏덩이를 가꾸는 단에 머리를 뉘여 지금을 삭히던 향기를 멀리로 떠나보낸다. 어느 날의 태양은 한 없이 시리기를 바라며. 마음 한 켠에 고이 매어둔, 성에가 낀 내 꿈결들을 언젠가 꺾인 지성이 나를 거대한 아이로 만들 때에 조금 남은 기억으로 하여금, 현재를 잊기를 바라며. 이 모든 변화들이 결국 닳아없어질 순간을 기다리겠다고. 2021. 2. 9.
사이에서
난잡하게 흩어진 도처의 안개를 정화하는 작은 이들을 사랑하는 그런 존재들이 곁에 있습니다. 여러 안구를 이리저리 돌리며 우리의 몸에 혹시나 해가 될까 막연히 우릴 피해 달아나는 그런 것들이 숨 쉬고 있습니다. 높게 세워진 건물의 창문은 빛을 인위적인 수목들의 잎은 물을 그들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조용하게 깨작이고 있습니다. 어둠이 도처에 길게 드리울 때면 그들은 그 날의 이야기를 하고 우리들에게 지저귐을 들려줍니다. 평온한 수면 아래, 빛을 머금을 수 있도록 2021.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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