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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낙오자들

맴도는 것들

by 연안 어귀 2022. 4. 10.

현실에 주인공은 없다. 늘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문장이라 여겼다. 빛나는 시절은 있겠으나, 결국 영원은 없을 테니까. 불안과 위안 사이를 걸으며 약간의 행복에 기대어 살아간다. 다만 이제야 되짚어 떠올리기에, 너무 급히 완결한 가치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영원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고리타분한 생각 끝에 옅은 한숨을 뱉는다. 그로부터 바람이 낮게 일어난다. 흐름은 지표면의 굴곡을 따라 굽이치고, 풀들은 일제히 휘청거렸다. 미약하게 남은 우울을 쓸어내던 풍랑이 허공으로 떠오르니, 시선은 기류를 따라서 멀어진다.

 

희미해진 기류 뒤편으로 푸른 달이 보인다. 달빛 사이에 숨은 온화함은 갈라진 마음을 또 한 번 긁어냈기에, 나는 발을 움직여 휘영청 떠오른 빛을 피했다. 허리가 굽은 소나무를 사이에 두니, 그로서 세심해진 위로가 엿보인다. 입에 물린 담뱃불이 좀 더 따스해졌다.

 

사무치게 고즈넉한 풍경, 도심의 야경이 차마 닿지 못한 구석진 자리다.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위치를 골랐어야 했을까. 숨을 깊게 들이쉬니 매캐함이 더욱 강렬해진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뽀얀 연기가 스친다. 오갈 데 없는 걸음은 비슷한 자리를 맴돈다. 누군가 버려둔 거울을 발견한 건 그 탓이었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칼, 그에 반하여 빳빳이 세운 옷깃이 선했다.

 

내 모습이 초라하다. 처량한 기색을 둘러쓴 채, 한동안 홀로 지키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억눌린 미소가 상주해야할 건물 안은 침묵만이 덧씌워져 있었고, 여백을 지키는 건 뜻모를 시선과 한숨 뿐이다. 소감은 몇 줄 남지 않았다. 마음을 나눌 상대가 사라졌기에, 남은 여백은 한사코 유약하기만 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해를 대신해 떠오른 달조차 산 너머로 모습을 감추려든다. 짧음에도 그리 길게만 느껴졌던 지난 날들을, 이토록 쉽게 부정해버린 하루가 이렇게 끝을 맺는다.

 

"하아..."

 

입술을 비집고 뿜어진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눈앞이 또 한 번 희끗해지니, 저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어느 열망이 있어 그렇게 사셨는지, 또 무엇 때문에 이리도 허망하게 가셔야 했는지. 미워해볼만한 사람은 가득했으나 그럴듯한 사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비극의 뒷장은 여전히 비극이었을 뿐이다.

 

감정은 너무 드높았기에, 상실만이 가득한 시절을 작은 불꽃으로 피워낸다. 한 점으로 찍어낼 정도의 불이라도 따스했다.

 

희미한 빛이 저물며 하루의 먹은 점차 옅어졌다. 비록 여명이 밝아오면 다시 침잠하겠으나, 나는 땅거미가 온 땅을 덮을 때에야 흉하게 일그러진 마음을 마주할 수 있었다. 발길이 끊김과 함께 온전한 시간이 다가오고, 오늘의 막은 그를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그토록 긴 하루였다. 수많은 경험의 끝에는 흐느낌 끝에 쉬어버린 목과 더이상 표현되지 않는 공허함만 남아있었다. 그랬다. 내 삶의 각본은 결국 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반전 없는 지루한 이야기다. 그런만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듯, 나는 스물의 온점을 지긋이 찍어냈다.

 

손끝이 화끈거렸다. 시선을 내리니 손가락 사이에서 타들어가는 불씨가 보였다. 무심히 휘둘러 담배 끝자락을 떨어뜨린다. 속내가 뒤집혀 드러났는지, 다급할 행동도 건조하게만 드러나고 있었다. 손짓 한 번에 마지막 불씨가 죽는다. 그러자 밤공기가 한결 서늘해졌다.

 

굽은 등을 억지로 펴내며, 나는 식장으로 올라오는 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늦게라도 누군가 오지 않을까. 헛된 기대를 내리막 저편으로 밀어낸다. 자리를 지키는 것도 잠시, 미처 온화해지지 못한 한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기대는 한참 전에 지쳤다. 주변을 떠도는 바람은 미련이었다. 나는 몸을 한껏 웅크리며 뒤돌아섰고, 황량하기 그지 없는 내부는 밝았다.

 

조명이 희미하게 여겨졌다. 신을 대충 벗으며 방명록을 흘겨본다. 적어도 흉사에는 발길을 붙여 애도하는 게 도의라 생각했건만, 몇 이름 외에는 적힌 일이 없다. 잠시 멈춘 발걸음을 재촉해, 슬픔의 심층에 자리한다. 그렇게 돌아온 상주의 위치는 바깥의 고요를 더욱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활짝 열린 문으로 밤공기가 불어온다. 덕분에 목선을 타고 오르던 열이 조금 가신다.

 

국화 몇 송이와 새것 같은 분향을 바라보다 눈길을 위로 돌렸다. 두 분이 밝게 웃고 있는 사진이 있다. 다른 감정 한 점 없이, 행복만이 가득한 장면에 가슴이 한없이 먹먹해진다. 짧은 숨을 들이킨다. 나를 낳은 이들의 장례는 참으로 조촐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언젠가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과연 누구를 닮았는지, 외로움과 친밀한 아들이었기에 예로부터 예정되었던 일이다.

 

짧은 호흡 사이에 간헐적인 멎음이 이어진다. 역류하는 호흡을 집어삼키며, 끝내 완연한 심야가 되었을까. 풀벌레 소리가 지척까지 다다랐다. 기대가 옅어진 만큼, 현실은 더욱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한 번 더 발악해볼까. 아니, 그럴 필요없다. 어차피 늘어진 몸이다.

 

차디찬 바닥에 몸을 뉘인다. 쉼없는 고동이 울린다. 가슴 어림에서 시작된 준동은 온 몸에 여파를 보낸다. 익숙한만큼 편안하다. 그리 잠시 귀를 기울이니 미뤄두었던 허기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윗배를 쓰다듬어본다.

 

지끈거리는 머릿속, 조문객이 남긴 말이 살며시 떠오른다. 그가 당연하게 여겼듯, 산 사람은 살아야 할까. 엇나간 듯 느껴지는 신체를 움직인다. 먼지가 쌓여가는 탁자 사이를 지나 배식대에 선다. 식지 않게끔 불을 켜는 일도 잠깐이었으니, 어느새 서늘함만 감돌고 있었다. 식은 육개장과 편육을 데우고, 일회용기에 밥과 반찬들을 담아냈다. 사람은 고용하지 않았다. 때문에, 대접할 음식 역시 마음의 한 귀퉁이에 지나지 않을 조촐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저, 가는 길이 초라하지 않을 격식을 마련한 게 전부였을 뿐이다.

 

많은 양이 아니었다지만, 결국 남은 음식이 많았다. 그렇기에 조금 과하게 식사를 준비한다. 온기 없는 식탁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음식을 올려두었다.

 

처음이었다. 찬거리는 평소와 같이 늘어놓았지만, 사람마다 돌아가야할 식기가 고작 한 쌍인 것도, 아스라이 흩어지는 옅은 김 너머에 누구도 자리하지 않은 것 역시 처음이었다. 이미 닳아버린 감정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또 한 번 모든 것이 생경하게 느껴졌으니,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식사는 간이 잘 배어있었다. 눈물이 솟아올라, 향이 느껴지지 않아도 충분한 맛이 느껴졌다.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이었기에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 이들의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딱, 가족이 좋아할 정도의 씁쓸함이다. 그리, 허기를 덜어낸 자리를 향기로 메꾼다.

 

빈 속을 알지 못할 것들로 채운 뒤, 나는 무작정 바깥을 걸었다. 시간의 흐름을 알리는 건 달과 그림자 뿐이었다. 나는 조금이나마 따스한 곳을 찾아다녔으나 봄의 새벽은 아직 시려웠고, 발길이 끊긴 자리는 더욱 그러했다. 어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어제와 같이 변함없이 찾아온 하루를 사용해, 나는 내게 다가온 새로운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했다. 부모님께 드리는 인사가 정중해졌고, 무언가를 원할 때 의사를 묻지 않았으며, 예전처럼 음식물이 남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찾아온 발인일, 얄궂게도 비가 쏟아졌다. 이 보잘것없는 행렬을 가리기 위한 처사라면 그에 고마움을 표해야 할까. 양손에 영정을 든 상태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간극, 일면식 하나 없는 사람들이 관을 들고 있다. 그들의 동정 어린 표정 아래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무관심이 깔려있으니, 쉼없이 내리던 빗방울이 기어이 눈에 스민다.

 

세상에 내린 비가 가슴 속 응어리를 더욱 단단히 굳게 만들었을지, 내 두 눈에는 각기 다른 화마가 일렁이고 있었다. 시작이 빨랐던 만큼 되려 길고 길었던 끝맺음이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나는 낡은 차량에 몸을 실었다. 바꿀 때가 되었다며 곳곳을 매만지던 손길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조수석에 자기 두 개를 올려놓은 나는 잠시 고개를 떨궜다. 이 장면이 좀 더 좋은 모습이었다면 어땠을까. 이미 한껏 닳아버린 상상이었다.

 

핸들에 몸을 기댄다. 기울어지는 감각은 심상과 닮아있었다. 고개를 몸 쪽으로 파묻은 채, 작은 숨을 내뱉는다. 길어지던 상념을 끊으며 시동을 건다. 목젖 밑까지 올라온 설움이 이와 같을까. 차체에서 느껴지는 진동은 그랬다. 슬픔도 며칠에 걸쳐 낡아졌을까. 미숙한 운전 실력으로 길을 나선다.

 

빗방울이 뭉개진다. 번진 세상이 와이퍼에 밀려난다. 그에 시야는 다시 선명해진다. 세상은 언제나와 같았다. 한적한 도로를 달리고, 불빛 하나 없는 교차로를 지난다. 늘 알고있던 도심의 풍경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그를 의문삼지 않았다. 질문은 이미 넘치도록 많았으니까.

 

바퀴가 구른다. 고인 빗물이 비산한다. 그렇듯, 한없이 단조로운 길이었다. 먹구름 끝자락에 걸친 아파트가 보인다. 집이었다. 지하주차장에 들어와 창문을 내렸다. 약간의 비릿함, 비가 길게 내릴 듯했다.

 

부모님은 꽤나 무거웠다. 본래, 지나치게 가볍다고 느끼는 게 정상이겠지. 감정이 몸을 좀먹는 걸까. 고장난 몸을 이끌어 걸음을 뗀다. 현관 앞에서, 나는 좀처럼 쓸 일이 없던 소지를 놀렸다. 문 너머는 건조했고, 엘리베이터의 기동음은 평소보다 멀게 느껴졌다. 그렇게 돌아온 집은 이렇다할 온기도, 향기도 잡히지 않았다. 익숙한 곳에서 생경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 신발장 옆에 우두커니 선 채로 집 안을 둘러본다.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다녀왔습니다."

 

버릇처럼 튀어나온 말이 집을 맴돌았다. 고요함이 대비되어 부푼다. 마음 한편에 불편한 감정이 스며와, 나는 급히 안방으로 향했다. 걸음마다 먼지가 일어났다. 아주 옅어 미약한 향만 감돈다. 좀처럼 들어올 일이 없던 안방에 발을 들인다. 그리고 미리 생각했던 대로, 화장대 위의 물건을 수납장 안으로 쓸어넣었다. 직후, 가치를 잃은 흔적을 그 위에 안치한다. 이리하면, 아주 조금의 의미는 지켜질 터였다. 하지만 정말 이걸로 끝난 걸까. 그건 알 수 없었다.

 

거실로 돌아와, 나는 한층 강렬한 위화감들과 마주했다. 아버지가 집 어디에서나 늘 앉아계시던 의자가 여전한 위치를 지켰고, 어머니가 아끼던 찻잔들에는 그새 먼지가 쌓였다. 물방울이 맺혀있던 잎맥은 말라붙어 있었으며, 내 위로 올라와 갖은 애교를 부리던 아이는 자취를 감췄다. 새롭게 채워진 무언가가 있다면, 약간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비바람 뿐이었다.

 

천천히 창가로 다가섰다. 열린 창으로 고개를 내미니, 온 머리가 금세 흠뻑 젖어든다. 빗물이 콧날을 따라 흐르고 이내 방울져 떨어진다. 아래층의 실외기 위로, 또 그 다음 층의 화분 위로. 파문은 쉼없이 이어져 눈동자 속까지 드리웠다. 머리가 점차 식어간다. 끓어오르던 감정도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비록 앙금은 사라지지 않겠으나, 당장 해야할 일을 떠올리기에는 충분했다.

 

헝겊으로 찻잔을 닦기 시작했다. 늘 그랬듯, 주변을 비춰야했다. 분무기를 찾아 화분에 물을 뿌렸다. 늘 그랬듯, 생기를 머금어야했다. 식탁 아래 내팽개쳐진 그릇을 잡아 사료를 채워넣었다. 늘 그랬듯, 있어야 할 것들이 없었다. 결국 혼자로써는 할 필요가 없는 일들이었다.

 

먹먹함이 몸 안에 차오른다. 모든 게 추억이 되고 있었다. 손아귀 사이로, 아득한 시선 너머로 빠져나간다. 빌어먹을 정도로 당연하다는 듯, 점차 사라져가는 것 투성이었다. 억누르지 못한 감정이 몸 바깥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집의 모든 불을 껐다. 또, 방 침대에 웅크려 이불을 덮어썼다. 갖은 생각이 났다. 앞으로 살아가야할 시간과, 뒤에 남겨두었던 약속들이 사방에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숨을 한껏 몰아쉰다. 두꺼운 솜 안에서 끝없이 데워진다.

 

둑이 녹아내린다.

 

아직, 문장보다는 단어로 뜻을 깨우치던 시절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해야한다고. 지향하는 것이 무엇이든, 고독은 쓴 물과 같아 도약을 위해 여력을 남기겠으나, 짧은 생은 달디 단 것만 찾아도 손해라며. 아버지는 어린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내가 부모 이전에 누군가의 자식이었듯, 너 역시 자식되기 이전에 이미 한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이유였다. 그래, 그렇게 자라길 바라셨다. 단언컨대, 아버지는 사람이셨다.

 

또 한 가지... 아니, 셀 수 없는 많은 일화 중 하나겠지. 꿈이 생겼다고 말하며 눈치를 보던 내게, 그저 아들이 '제 삶을 정했구나.' 그리 말하며 여타의 사족을 꺼내지 않으셨다. 물론 어머니는 반대하셨지. 삶의 구절은 첫과 끝이 같을 때가 없다며, 한껏 포장하여 고고함이 될지라도 언젠가 후회할지 모른다고 하셨다. 그렇게 두 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를 응원했다.

 

올곧게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아버지께 내지름을 배우고, 어머니께 물러남을 배우며 꿈결 속을 헤매었다. 지독한 시간을 거쳤다. 글자를 정돈하고, 단어를 골랐으며, 문장을 짜냈다. 사람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랑이 되고 싶었다. 그렇기에 스스로에게 가혹하고 싶었고, 나는 고독했다.

 

그 때문일 거다. 누구도 날 위로해주지 않은 것은. 헛되어버린 세월을 증명하듯, 가득히 쌓인 활자만 해묵은 향을 풍길 뿐이었다. 순백의 이기심을 벼려내 바라마지 않은 세상을 탐하니, 나를 품었던 세상은 그렇게 한 사람을 등졌다. 현실에 별다른 사족은 없었다. 사실이 곧 전부였을 뿐이다.

 

적막이 짙게 깔린 집, 억눌린 울음이 퍼져나가 하루를 오롯이 견딘 하늘을 적셔낸다. 그렇게, 못내 기다려온 짙푸른 막이 내린다. 비극의 첫 구절이 끝나고 있다. 나는 그리 믿었다.

 

아득한 침전 끝, 드넓게 퍼지는 울림이 느껴졌다. 둥글어진 생각에 주름이 잡힌다. 그렇게 꿈의 첫 머리를 만난다.

 

의식이 허공을 부유한다. 몸은 어디에 있나. 첫 단추를 의문으로 꿰어내니, 온 사방에 흩어진 꿈결이 침잠했다. 죽은 감각들이 머무르던 공간에 파문이 인다. 이슬비가 내리듯, 미약하기 짝이 없는 진동이 퍼져나간다. 홀연히 나타난 변화는 육체의 윤곽을 드러내고, 그로써 발견한 몸은 지난했다. 시선과 의식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러자 모든 선들이 한 점으로 빨려들었다.

 

늘 그렇듯, 시작은 끝을 기약했다.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진득한 눈곱이 조각난다. 어둑한 방은 푸르게 물들어있었다. 젖은 몸은 하룻밤만으로는 되살리지 못했다. 우렁찬 빗소리는 창을 따라 흐르건만, 내 오물이 가득한 곳에는 물줄기가 흐를 공간이 없던 모양이다. 옹졸하기 짝이 없는 마음이다.

 

어느 원망 도중에 잠이 들었던가. 뱉은 뒤에 도로 담아낸 말이 없어 가늠할 수 없었다. 쉼없이 번져가는 세상을 바라보며, 나는 또다시 밀려드는 허망함에 몸을 감싸안았다. 가족이 아닌 목적을 찾으려는 갖은 노력들은 맞닿은 치열 틈에서 끝나버렸다. 피부에 덧댈 마음이 없다. 한기는 속절없이 스며든다. 비좁은 침대 위를 뒤척여 그나마 따스한 곳을 찾아내려 애를 써보았으나, 부질없는 발버둥임을 알며 제 품이 한없이 비루함에 사무친다.

 

눈물이 목 안으로 흐른다. 그래서 텁텁한 향이 났다. 질끈 감았던 눈꺼풀을 다시 들어올린다. 바닷속에 먼지가 자욱했다. 얼마나 많은 재가 휘날렸을까. 검붉은 잔해 속의 온기도 결국 덧없게 느껴질 때가 되었다. 그러니, 미어진 마음도 한 때 스쳐갈 우스움으로 기억할 거라 믿을 수 있겠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잠들면 된다. 마지막 남은 믿음은 이렇듯 초라하다.

 

두꺼운 솜 사이로 침전하는 마음은 고요하고, 비관에 젖은 몸은 이리저리 비틀린다. 빗소리는 균일하여 고동을 안정시키나, 텅 빈 감정은 평온에서도 서로 맞부딪히며 소리를 내었다. 선명한 굴곡은 곧 틈을 만드니. 뒷전으로 밀어두었던 욕구가 솟구쳤다. 곪은 배가 계속해서 아렸다. 다만, 있는 그대로는 그저 투박한 바람에 불과하다. 겉을 깎아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래, 나도 이런 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침묵 위로 첫 문장이 떨어졌다. 여태껏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목소리, 그에 담긴 의미를 쥐어짜 침상을 벗어난다. 느릿하고 둔탁한 걸음으로 나온 거실, 푸른 적막은 한층 웅장해진다. 굳게 닿은 창을 두드리는 물방울 소리에 잔류하던 열기가 가라앉는다. 천천히 창가로 다가선다. 쉼없이 번지는 세상은 한없이 새파랗게 질려있어,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을 조금이나마 생기있게 만들어주었다. 저 먼 하늘엔 인상을 한껏 찌푸린 구름들이 가득했다.

 

슬픔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피부에 눌러붙은 음울이나, 나를 위로하려는 자연물이나. 자리를 옮겨도 상황은 같았다. 빗물은 빈틈없이 쏟아졌으며, 물줄기는 피부 위로 굴곡지며 흘러내렸다. 눈물과 뒤섞여 오물이 된 물은 하수구로 빨려든다. 번진 시야 속에서 얕게 차오른 물이 소용돌이쳤다. 절박히 도망칠수록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물기를 닦아낸다. 그렇게 밤 사이 쌓인 기류를 덜어내니, 그제야 몸이 가벼워진다. 하지만 시간이 사라질 일은 없었다. 거울 속 내 모습이 그를 증명했다. 눈가는 발갛게 달아올랐고, 안색은 푸르고 검다. 기대가 죽어가는 모양새다. 그에 기대와 구토감을 느낀다.

 

편하기 짝이 없는 상하의를 입고, 선반 위에 올려둔 모자를 깊게 눌러쓴다. 아직 젖어있는 머리칼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허기를 채울 생각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추레한 행색은 빗줄기에 가려 보이지 않겠지. 그런, 실없는 생각과 함께 어둑한 안식처를 나선다.

 

하나 뿐인 우산은 챙기고 싶지 않았다.

 

문이 닫힌다. 이곳의 벽은 두터웠기에, 적막은 더욱 먹먹해진다. 하여, 계단을 딛는 걸음들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다리가 무겁게 느껴지는 탓일까. 심상을 닮아 많은 것이 가라앉은 탓일까. 층계를 내려갈수록 함께 가라앉는 의식과 대비되어, 빗소리는 점점 커져만 간다. 그렇게 쓸모없이 넓은 로비에 발자국을 찍는다.  

 

빛이 꺾인다. 수 차례 반사된 조명은 그림자를 지웠기에, 이곳은 따스한 색감만 가득했다. 바깥은 반대로 온통 푸르렀다. 물안개가 자욱하고, 희미한 선만 남아 모든 길을 선망한다. 여태껏 살아온 거리였으나, 나아갈 방향조차 정하기 어려울 정도다. 기이한 일이다. 청명(淸明)이 막 지난 시기인데, 마치 장마가 온 것처럼 폭우가 내리고 있다.

 

저 멀리 떨어진, 여전히 저항을 반복하는 네온의 명멸도 점차 흐릿해지고 있었다. 빗발은 여전히 거세지는 중이다. 하지만 괜찮다. 현상은 의지가 없다. 그러니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이 며칠간 사무치도록 배웠던 사실인만큼, 믿지 않을 수 없는 관념이었다.

 

뜻모를 몽환에 다가간다. 없는 사실을 구태여 알지 못한다 치부한다. 그렇게 문이 열린다. 미약한 비린내가 짙어지고, 서늘한 공기는 몸을 훑으며, 사지의 근육은 제멋대로 수축한다. 몸이 너무 달아오른 탓이겠지. 그리, 저 광대한 빗속을 거닐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경계 앞에서 손을 내민다. 굵은 빗방울이 손바닥을 두드렸다. 전혀 다른 간격, 균일한 감각. 좋은 울림이었다.

 

그에 한 걸음을 걷는다. 잠든 사이 고였던 물이 족적에 맞춰 밀려난다. 찰박이는 소리와 함께, 신발에 물이 들어찬다. 그로부터 또 한 걸음을 걷는다. 전신이 순식간에 젖어들었고, 그제야 정신이 맑아졌다. 역설적으로, 살가죽 사이에 스며있던 습기가 걷힌 느낌이었다. 빗소리도 한층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사위는 성난 침묵으로 만연했다. 아스라이 울리는 경적도, 어딘가에 상주할 인기척도 편린도 없다. 예민을 완성하는 감각은 쉼없이 이어지는 파문 뿐이었다.

 

한없이 뭉개지는 빗속을 거닌다. 옷은 피부에 달라붙어 윤곽을 드러내었기에, 며칠 사이 비루해진 몸이 가감없이 비춰진다.

 

본디 차들이 점거해야할 도로 위는 빗물과 잔해로 가득했다. 무거워진 흙 알갱이와 찢어진 나뭇잎이 다리 사이로 빠져나간다. 층고가 높은 건물은 안개에 휘감겨 희미했으며, 발길은 더욱 거친 물길이 되었다. 아직 붕 떠있는 마음과는 달리, 지극히 단절된 세상이었다. 잠겨가는 세상엔 눈꺼풀에 매달릴 자리가 없다. 눈 앞이 끝없이 번져간다.

 

네온사인이 수면 위로 흩어지니, 발치에 맺힌 빛마저 희미하다. 그렇게 길을 잃은 와중에, 몸은 흔적으로 기억한 항로를 걷는다. 달라진 몸은 경험을 비뚤게 했으나, 그 사이 달라진 나를 알기에 헤아릴 수 있었다. 발끝이 지나친 시간 위를 더듬는다. 열기가 식어간다는 건 그랬다.

 

이 빗속을 맨몸으로 뚫고 온 건 괜한 짓이다. 그런 생각이 스치며, 빛은 좀 더 명확한 실체를 드러냈다. 간판의 색상은 익숙했다. 쉼없이 찾아들었던 편의점이다. 출입문을 열기 위해 목재 계단 두 칸을 오른다. 신발 안에 들어찬 물이 쏟아져내렸다.

 

방수포를 두드리는 모양새가 세차다. 작은 떨림이 반복되어, 머리맡에 또 다른 수면이 있는 듯했다. 그 너머의 하늘을 바라본다. 온 창공을 채운 빗방울이 만든 굴절 덕에, 깊은 물 속처럼 흐릿한 정경이다. 탁 트인 곳은 없다. 여전히 물안개 사이를 헤매는 의식이다. 이제 다른 자극이 필요하다. 손끝으로 주머니를 더듬었다. 얇은 지갑이 만져졌다. 보잘것없다. 한 몫의 허기만 채울 정도다.

 

문 손잡이를 잡는다.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추레했다.

 

조명이 무척이나 밝다. 바닥은 광이 났으며, 상품은 완벽히 정렬되어있다. 완전하지 못한 건 자신 뿐이다. 계산대에는 아무도 서있지 않았다. 바깥이 저 꼴이니 창고에서 정리라도 하고 있을까. 나는 문에 달려있는 종을 흔들었다. 맑은 소리가 울려퍼지나 기척은 없다.

 

유리창을 통해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장대비 속을 거니는 이는 없었다. 여러 잔해와 빗물 뿐, 어딘가의 쓰레기들이 가득하다.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한 시가 길다며 오던 안전 안내 문자가 없었다. 탁자에 놓인 티슈로 액정에 묻은 물을 닦아낸다. 포털 사이트의 대문도 평소와 다름없다. 검색창에 폭우를 쳐보아도 작년 여름의 기사가 전부다. 아직 꿈결에 파묻혀 있는 게 아닐까. 손가락을 천천히 반대로 꺾는다. 그만큼 지긋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로서 모든 건 더욱 기이해진다.

 

잠시 상황을 되짚는다. 기록적인 폭우에 반응 없는 사회란 내 경험으로 해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여태껏 그러했듯, 나는 무지의 소치를 앎에도 따라가겠다. 식욕이 가리키는 음식들을 집어들었다. 포장을 우악스럽게 잡아뜯고, 식은 속내를 데울만큼 시간을 더한다. 전자레인지의 기동음이 편의점을 가득채웠으나, 누구도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어떤 행동을 하던 위화감은 여전하다. 애써 빈자리를 채운만큼 어딘가 공허해진다. 그러니, 하늘은 어둡고 땅은 푸르렀다.

 

모자를 거칠게 벗겨내며,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쥐어짰다. 바닥은 어느새 물로 흥건해진다. 항상 내려다보기만하던 빗물이 나를 우러렀다. 머리칼을 가볍게 털어낸다. 물 먹은 무심함이 눈 앞을 가린다.

 

괜찮다. 환경이 한 번 더 바뀌었을 뿐이다. 무엇을 해야할지 알고 있다. 상황이 인도하는 길을 찾으면 된다.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현상이 사방에 즐비하다. 이질적인 기상현상, 어디에도 없는 군상들, 꿈이라 착각하지 못할 완전한 무의식인가, 환상이라 착각할 현실인가. 다만 음식은 충분히 뜨거웠고, 사고는 손길을 따라갔다. 단순한 향과 맛 사이에 끼어있는 부족함에 저울을 기울인다. 한낱 청년의 상상이 이리 정교할 수 있을까. 평생, 스스로의 역량이 드높다 평한 적이 없었다.

 

희미한 이성을 쥐어짜낸 결론이 그렇듯, 꿈이 아니라면 이 장면들을 사실로 받아들여야할까. 애초에 꼬리가 없는 생각이다. 머리가 뒤집혀 머리를 먹을 뿐이었기에, 어느덧 비루한 생각도 끊어졌다. 빗소리 위로 음식을 질겅이는 소음만 남게 된다.

 

허기가 물러난만큼 잡다한 생각들이 솟아난다. 우산이 의미가 없는 기형적인 날씨다. 사회의 반응 또한 이질적이나, 스스로 느끼는 감각만큼은 선명하다. 우울에 사무쳐 조현 증세라도 나타났는가. 한컷 뒤엉켜가는 생각과 함께, 창밖은 자욱해질 뿐이다. 혼란함에 빗대는 심상이라, 자연히 실소가 나온다.

 

"쓰잘머리 없네."

 

되었다. 그러니 길게 늘어진 가설을 구겨 주머니에 넣자. 다만, 언젠가 되돌아볼 요량으로 질감만 기억하면 될 터다. 그렇게 애를 써도 알 수 없음을 인정한다. 마침, 건물 옥상의 자리가 미어터진 시점이었다.

 

여태껏 쌓인 빗물이 흘러넘쳐 쏟아지니, 비좁은 세계의 비경에 작은 폭포들이 자리했다. 희뿌옇다 못해 칙칙한 하늘을 제외하면 어딜보아도 닫힌 공간이다. 오갈데없는 시선이 드넓은 창공으로 향한다. 구멍 뚫린 천장으로부터 삼라만상이 녹아 흘러내리는 듯했다.

 

그래, 죽음이 두렵던 적은 없었다. 세세한 과정을 떠올리며 스스로 숨어들었을 뿐이다. 불안이 공포를 깨웠는가. 공포를 덮기 위해 불안을 키웠는가. 답은 정해져 있겠으나, 나는 언제나와 같이 질문을 반복하며 마무리했다. 한적한 세상도 할 일은 많다. 축낼 시간이 없다. 다시 모자를 쓰고, 싸구려 우비의 단추를 채우며, 나는 그렇게 한없이 익숙한 핑계를 대었다.

 

유리문을 힘차게 밀어내니, 차오르던 우울은 넓고 얕은 파문을 남겼다. 흐름은 서로 맞닿아 한층 거대하게 변모했다. 온 사방이 준동한다. 그럼에도, 무언가 결여되었다는 이질감이 죽지 않았다. 현상들이 적절히 맞물리지 않으니, 결국 그럴 듯하게 보이지 않는 탓이다.

 

손끝을 경계 너머로 보낸다. 서늘함이 피부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고, 나는 일그러진 물방울을 코끝에 가져다대었다. 회상하여 떠올릴 때보다 더욱 선명한 향이었다. 그러니 환각 따위는 아니다. 다만, 거짓이 아니라면 현실이어야 할까. 바람 한 점 없는 호우는 있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많은 당연함이 달라졌음을 이해해야했다.

 

"죽기라도 했나?"

 

빗물에 파묻힌 세계는 대답하지 않았다. 뒤집힌 세상도 구태여 친절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나는 조금이라도 특별한 것을 찾으려 시선을 옮겼다. 한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없었다. 균일한 간격으로 울리는 빗소리만 가득할 뿐, 건물들은 여전히 저마다의 고요에 영원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래, 사람을 비워낸 공간에 자연이 들어찼다.

 

아무도 없구나. 완전한 자각 후에야 평안함이 밀려왔다. 가벼워진 몸, 한껏 풀어진 자세로 첫 걸음을 뗀다. 어떤 말로 지금을 표현할 수 있을까. 삶을 엮어 만든 기억에 없는 단어였기에, 나는 걸음 사이에 질문 한 문장을 끼워넣었다. 족적이 늘어가고, 생각이 그만큼 가득해질수록 보폭이 좁아진다.

 

수많은 경험을 더듬어 윤곽을 빚어낸다. 사후라기에는 적막하고, 무의식이라기에는 정교했으며, 환상이라기에는 너무나 익숙했다. 애초에, 이곳은 무언가의 시작이 될 수는 있을까. 내 삶이 지나온 한 지점, 어느 영원을 갈구한 사념에 불과할지 모른다. 한없이 아둔한 기적이다.

 

익숙한 감정이 밀려든다. 역경을 넘은 자리에서도 또다시 불안했다. 특별한 풍경에 잠긴 채, 여전히 변함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때문에 간절하게 변화를 바랐다. 사색이 끝난 시점의 보폭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고, 나는 우두커니 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나를 반기는 것은 참으로 칙칙한, 안쓰럽도록 마른 먹먹함이었다.

 

비가 그쳤나? 아니다. 귀향은 끝나지 않았다. 하릴없이 걷다보니, 댐이 무너지지 않은 곳에 와있을 뿐이다. 두드림은 여전했기에,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어느 때보다 세찬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지역을 벗어나기를 바란 것처럼, 억눌린 물줄기는 한없이 굵었다. 다만, 배려는 완전하지 않았다. 적어도 두 발은 아직 잠겨있으니, 그는 결국 나와 닮은 것이 되었다.

 

깊은 감상이 해가 될 상황이다. 그러니 앞으로 갈 길만을 살피자. 언젠가 후회하더라도, 이 선택을 옳다고 믿어야겠지. 나는 우비를 벗어 길바닥에 버렸다. 바람이 불지 않아, 비닐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형상이 하나같이 선명하다. 짙은 외곽선하며, 색의 경계면 또한 뚜렷했다. 본래 흐릿할 곳마저 너무나 짙었다. 본래라면 보이지 않을 세밀함이다. 그렇기에, 이질감이 더욱 확실하게 와닿았다.

 

이제 막 쌓아가던 건물이 온데간데 없어졌다. 새롭게 개통한 도로는 다시 좁아졌으나, 상가의 간판은 최근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로서 모든 게 익숙한 느낌을 준다. 그에 더 먼 곳을 바라보고, 고개를 돌려 빗물에 잠긴 세상을 훑는다. 애써 가려두었던 균열이 눈에 들어온다. 의심은 물속을 밝혔다. 어긋난 풍경으로 하여금, 이제껏 떠오른 생각들이 서로 맞물렸다.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 좀 더 내게 있어 편안할, 다른 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들."

 

근방의 건물에 다가선다. 벽면은 옛 정취가 감돌고 있었다. 표면을 매만지자 빛바랜 염료는 부스러져 떨어지고, 시선은 파편을 따라 내려간다. 신발코가 닿을만한 높이의 상흔, 세월이 비집고 들어간 틈엔 이름모를 풀이 자리해 있었다. 이윽고 눈길은 반전되어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으로 향한다. 지붕은 멀끔했다. 새단장을 마친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듯, 극히 적은 햇빛마저 반사하고 있었다. 옛 시선의 성장을 반영하듯, 아래는 낡았으며 허공은 창연하다. 상념의 끝이 보인다. 내가 가진 무의식에 어떠한 외력이 개입했다.

 

먼 하늘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 너머에 있을 무언가를 향한 아집이었다. 내게 그만큼의 특별함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떤 초월이 자신을 굽어본다 여겼다. 그리고 대답하듯 아스라이 퍼지는 천둥, 마른 먹구름의 음성은 수십 갈래로 쪼개져 있었다. 누군가의 반응이라 생각한 것은 아마, 내가 그를 바랐기 때문일 터다.

 

한동안 이곳저곳을 살피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되었다. 현상에 특정한 목적이 있다면 그 뿐으로 충분했다. 아무렴 온전히 집중할 것이 필요했으니까. 그렇다면, 세계는 내게 무엇을 바랄까. 첫 걸음을 딛을, 옳다 믿을 방향을 정하자. 걸음을 돌려 다시 호우의 경계선 앞에 선다. 더욱 굵어진 빗줄기, 차오르던 물은 어느덧 발목을 넘겼다.

 

생각 이전에, 고개가 먼저 저어진다. 그렇기에 남은 미련을 경계 앞에 두었다. 달라진 세상을 유랑한 뒤 돌아와도 괜찮다며, 이제껏 배운 세상이 사라졌으니 급할 것 없다고, 스스로 그리 믿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멀어지자. 큰 길을 따라가, 내 기억으로 만들지 못할 장소까지 다다르자. 그때가 된다면 자그마한 갈피라도 잡히겠지. 기대와 함께 체류하던 불안이 온 몸짓에 스민다. 잔뜩 힘이 들어간 발걸음은 그러했다.

 

얕은 물이 범람했다. 발자국은 잠시 머무른 뒤 사라진다. 몽환적인 광경이었으나, 화폭 안에 자신이 있기에 진심으로 꿈이라 부를 수 없었다. 막막함이 사무쳐 오늘 중의 가장 긴 호흡을 내쉰다. 지긋한 숨결은 따스했기에 고여있던 불온들이 흩날렸으며, 그렇게 발끝은 다시 하늘을 우러른다. 몸이 기우는 방향으로 옛적에 익숙해진 길을 따라 걸었다. 발등에 그려놓은 항로이기에, 잡념을 흩기에 더없이 이상적이라 여긴 탓이다.

 

정처없는 걸음 수십이 겹쳐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 의사를 그려낸다. 옅게 깔린 수면은 온 하늘을 담고 있었기에 걸음은 양 시발을 가로질렀고, 붕 뜨는 의식 아래에서 역설적으로 점차 가라앉는 마음을 느낀다. 감각이 길게 늘어진다. 만물은 빗속처럼 휘어졌다. 뜬눈으로 맞이한 꿈결이었다. 잠에서 깨어나기 위하여, 지긋이 눈을 감는다. 눈꺼풀 아래에 잠든 현실을 일깨운다.

 

그리고 눈을 뜬다. 한 번의 외면에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세계가 나를 반겼다. 안정을 위해 시간을 얼마나 허비했을까. 빗소리는 여전했다. 어렴풋한 그리움이 그렇듯, 무아는 지극히 짧게 돌아왔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음에도 아쉬움이 짙었다. 또 다른 변화가 생긴 건 그런 때였다.

 

좁은 골목 안쪽에서 자그마한 찰박임이 들려온다. 사람의 걸음보다 수십 배는 가벼운 소리다. 홀린 듯,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한다. 각기 다른 걸음이 서로를 향해 다가왔으니, 둘은 길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마주친다. 옅은 수면을 가운데 둔 채, 우리는 서로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더없이 익숙한, 그럼에도 한없이 귀여운 생물이 있었다.

 

"오랜만이네."

 

젖은 아스팔트 너머의 고양이는 검게 물들어있었다. 본래의 무늬는 희미했으나, 아이의 시선은 여전했다. 이제야 가장 익숙한 것을 찾아냈구나. 나는 천천히 자세를 낮춰 쪼그려앉았다. 무작정 옮기던 걸음은 늘 그랬듯, 우연의 간지러움을 빌려 쉬어간다. 녀석은 내 몸 주변을 쉼없이 돌았다. 꼬리가 가볍게 살랑이는 것을 보아하니, 본래의 세계는 여전히 건조한 모양이다.

 

"바깥은 살만 하니?"

 

내 질문에 녀석은 바닥에서 뒹굴었다. 적당한 답이다. 그리하면 내가 이곳저곳을 긁어주었었지. 사는 건 이제까지와 같구나. 조금 안심이 되는 일이다. 허물이 벗겨지니, 웅크려 기다리고 있던 감정이 일어선다. 나는 자연스레 손을 들어 녀석을 만지려들었다. 그렇게 이곳에 대한 결론들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감흥이 향한 곳엔 수많은 물결만 남는다. 잔잔한 수면에 담겨있던 녀석이 흐릿해진다. 내 시선은 파장을 따라 출렁였다. 그런 내가 어찌 보였을지, 녀석은 나를 위해 자리를 옮겨주었다. 길쭉한 동공이 나를 바라본다. 언제까지나 본 일이 없던, 깊게 가라앉은 표정이다.

 

"...그래, 나는 어쩌면 좋을까?"

 

녀석의 눈빛에 불안을 털어놓는다. 바랄게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 꿈이 찾아오기를 바랄지, 막연히 상상하는 안식을 선망하여 떠날지. 홀로 남겨진 것은 언젠가 함께있을 때를 그리워할 테니, 나는 녀석에게 물어볼 책임이 있었다. 며칠간 목젖 아래에 숨겨두었던 말을 온전히 알아듣기라도 했을까.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미련한 나는 그저, 남겨질 인연의 뒤를 따라 걸을 뿐이었다.

 

녀석은 무언가 아는 듯 움직였다. 내가 만드는 물결이 형체를 흐릿하게 만들었기에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간다. 그런 걸음이 너무 느렸을까. 녀석은 이따금씩 돌아보며 재촉하기도 했다. 골목을 벗어나 차량 하나 없는 도로를 가로질렀다. 풀벌레 소리나, 어딘가의 웅성임이 없는 세계다. 고요 속에서 귓가를 맴도는 건 우리 둘 뿐이다.

 

그제야 이 세상이 익숙했다. 오랜 친구는 단지 있음으로 날을 무디게 했으니 시선은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졌고, 녀석이 정한 방향도 한 눈에 드러났다. 경로의 차이가 있을 뿐, 나와 같은 결론을 내렸구나. 마음에 드는 일이다. 나는 그와 점차 가까이 걸었다. 내 세상이 이리 되기 전에는 바깥에 나서기를 참으로 힘들어하던 아이였다.

 

특히, 검게 칠해진 아스팔트 위에 서있는 걸 싫어했지. 그럼에도, 녀석은 도로의 흰 부분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항상 어리광을 부렸던 아이가 며칠 밤 사이에 예의를 배워왔다. 어느 영원을 앞둔 인연은 그랬다.

 

진원으로부터 멀어져, 건물과 자연이 점점 뭉개지는 지점까지 다다른다. 미처 살피지 못했던, 오래도록 살아온 지역의 빈 자리다. 온 것이 선명하리 뿌옇다. 까마득히 어린 날, 의욕만 앞서 두껍게 채색했던 풍경을 닮아있었다. 지나치는 와중에 담벼락을 구태여 쓸어보았다. 감촉은 일반적인 시멘트와 다름이 없었으나, 표면이 지나치게 매끄럽다. 이 세상은 익숙한 사이에도 여전히 기이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본래의 질감을 잃어가던 사물들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지붕은 흘러내려 기둥과 벽면을 타고 흘렀고, 담벼락은 마당을 가리지 못했으며, 출입문은 스스로를 땅에 뉘였다. 이윽고 최소한의 형태를 유지하려던 건물이 기운다. 일부는 내 앞까지 쓸려내려왔다. 한껏 녹아내리면서도, 표면은 조금씩 굳어지고 있었다. 세상이 한계에 발끝을 걸쳤나.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꿈의 중심부는 여전히 굳건했다. 나를 깨웠던 상징도 쉼없이 쏟아지고 있다. 그래, 기틀이 된 우울은 아직 건재했다.

 

이곳이 중심부와 다른 점은 꽤나 명료했다. 단지, 내가 주변을 자세히 알지 못한 탓이다. 어설프게 엮어내었던 구역이 무너지고 있다. 작은 세계가 제 주인을 닮았으니 영원할 수 없었을 뿐이다. 고개를 돌려 친우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남아있는 여유는 없다는 듯,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 파문들이 보였다. 녀석의 걸음은 매우 가벼웠기에 파장은 짧았고, 내 보폭은 그만큼 넓어질 수 밖에 없었다.

 

힘차게 발을 구른다. 걸음에 담긴 기세만큼, 고여있던 물들이 사방으로 튀어오른다. 온통 젖은 옷들은 매 뜀박질마다 물방울을 떨어트렸으며, 물 먹은 신발은 불어난 발만큼을 다시 토해낸다. 먼 발치에서 본다면 분명 경박한 몸짓으로 보이리라. 저 멀리 앞서가는 친구의 웃음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건물들이 낮아진다. 그럼으로서 하늘은 더욱 광활해지고, 발붙일 검은 땅은 좁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점차 속도를 높였다. 잔해를 뛰어넘으며, 무너지는 세계를 앞지르며, 삶이 약속한 끝으로 다가간다. 다만 이때까지의 생이 준 가르침과는 다르게 시작이 될 끝이리라. 나는 그리 믿었고, 때문에 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조금은 마지막이 가까워졌을까. 우리는 도로의 끝에서 멈춰섰다. 그제야 거칠어진 호흡을 고른다.

 

그곳부터는 전혀 다른 풍경의 시작이었다. 문명이 끝나 초록이 만연했다. 물에 젖은 잎사귀는 차분하며 젖은 토양은 온화하다. 자연스럽게도, 풀과 흙이 만들어내는 향 역시 첫 감상과 닮아있었다. 또한, 통상적인 감각을 넘어서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순간, 확신이 든다. 넘어가게 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러면... 이제 헤어져야하는 거지?"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흙길이 시작되는 경계 앞에 엉덩이를 내릴 뿐이었다. 흰 바탕에 누런 얼룩의 친구는 더이상 검게 물들 수 없다. 털을 정돈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주제를 모르고 추측하건대, 그는 이미 준비가 되어있었다.

 

흙을 밟는다. 부드럽고 기름진 표면은 어쩐지 생경하게만 다가온다. 밑창이 지표를 긁으면, 흙내음은 더욱 진하게 풍겨온다. 달리 수사할 방법이 없다. 그저 어색했다. 첫 걸음은 내가 믿어왔던 방향성을 잃어버리게 했기에, 나는 방금 전까지 서있던 위치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바닥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가 하면,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훑어보기도 했다.

 

"아직 있어."

 

그런 모습이 안쓰럽고 처연하게 느껴져 말을 건넨다. 그러자 친구의 귀가 쫑긋선다. 내가 있을 위치를 가늠하던 녀석은 작게 울었다. 낮은 떨림, 굳게 닫아둔 방문을 긁으며 내던 소리다. 준비가 되었다 해서 처음이 무뎌질 리가 없다. 내가 며칠전 깨우친 일을 뒤따라 배우고 있구나.

 

"갈게."

 

이 정도면 되었다. 삶이 약속한 결말이 어떠한 죽음이듯, 만남 끝에 닿는 곳 또한 어느 이별일 테니. 구태여 쌓아올려 더욱 미어질 필요는 없었다. 우리들의 어미가 모든 자식에게 말했듯, 모두가 언제나 미숙할 생일까. 태어나 끝내 스러질 때까지, 서로 끊어져있던 울음은 그제야 손을 맞잡는다. 삶의 저변에 자리한, 아득하리 옅은 우울들과 얽힌 채로.

 

 

 

흙길은 다소 무겁게 느껴졌다. 밑창에 엉겨드는 진흙 때문일까. 잠시 걸음을 멈춰 드러난 나무 뿌리에 발을 긁는다. 흙덩어리와 죽은 풀 따위가 묻어났지만 개운하지 않다. 마치, 후회가 남을 짓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털어내지 못한 미련은 몇 마디 말이 되어 머릿속을 떠돈다. 빗속에 남겨둔 옛들은 내가 상상하는 모습으로 자라나겠지. 진실이 어떻든, 결국 그렇게 자위하게 될 것이 뻔했다. 그래, 좀 더 그럴 듯한 핑계를 댔어야 했다.

 

똬리를 튼 감정의 혓바닥이 날름거린다. 생각이 너무 길다. 수없이 배워도, 이미 지나쳐도 미숙한 생이다. 이미 끝난 선택을 후회하는 짓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지나온 길을 바라보았으나, 도심은 울창함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미약한 빗소리만이 간격을 유지하며 따라오고 있다.

 

다시금 발밑을 주의하며 나아간다. 비교적 길이 닦여있던 초입과는 다르게, 이제는 편히 오갈만한 경로가 없었다. 비교적 완만한 경사의 비탈을 선택하고, 튼튼해보이는 나무를 붙잡는다. 똑바로 나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에, 나는 경로를 끊임없이 재확인해야했다. 어떻게든 앞을 찾아 걷는다. 그 뿐이다. 더 깊이 들어설수록 주변이 어두워졌고, 모든 사물이 점점 비슷해보였다.

 

느려지던 걸음은 이윽고 한 자리에 멈춰선다. 더 이상 나를 믿을 수 없다. 그러니 높은 곳을 찾아갈 필요가 있었다. 경사가 진 구간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평탄한 숲 지형이다. 바위산 같은 걸 본 기억도 없으니 선택지는 하나겠지. 나는 당장 옆에 서있는 나무를 매만졌다. 꺼끌한 나무껍질을 뜯어보니 지독히도 편안한 향이 난다.

 

"할 수 있을까?"

 

밟고 올라갈 부분도 마땅치 않고, 올라가는 도중에 지칠 거다. 어찌 오른다 하여도 특별한 무언가가 보일, 믿음 비슷한 편린조차 없다. 괜한 행동이 될 가능성이 높겠지. 선택할만한 요소를 찾던 나는 이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처음처럼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세계가 나를 인도하고 있다고, 그저 막연하게 기대야한다.

 

한 줄기 선이 보인 건 그때였다. 빈틈없이 먹먹한 하늘 위로, 더욱 짙은 매캐함이 피어오르고 있다. 젖은 나무를 태울 때에나 날법한 자욱한 연기다.

 

모든 정황이 물 흐르듯 이어지고 있다. 나를 깨운 빗소리와, 첫 걸음을 떼게한 허기, 다른 곳을 찾게 만든 기이함, 수면 아래에서 만난 작은 인연까지, 전부를 우연이라 치부하기에는 석연찮다. 단지, 내가 모르는 사실이 여전히 많다는 이유로 지나쳐야할까. 빗속에서 판단했듯, 아직 근거가 부족했다. 그렇기에 세계를 따라야한다. 끝으로 하여금 시작을 알 수 있도록.

 

가볍게 발을 구른다. 땅 위로 드러난 바위를 딛으며, 서로 뒤엉킨 뿌리를 뛰어넘는다. 깊은 숲은 개척되지 않은 산지와 같았다. 몸의 움직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들이는 신경만큼, 멀어보였던 연기구름이 가까워지고 있다. 또한, 숲의 끝도 함께 보였다. 곧은 줄기들 사이로 스미는 빛줄기를 보며 발끝에 더욱 힘을 준다.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고, 모든 윤곽들이 한층 흐릿해진다. 그와 동시에, 반대로 선명해지는 의문이 있었다. 나는 이렇게 날렵하지 않다.

 

무언가 달라졌다. 밀려드는 생각만큼 천천히 힘을 뺀다. 속력은 줄어들고, 점차 튕겨오르는 듯한 뜀걸음이 된다. 발목에 느껴지는 부담이 너무 적다. 거칠어야할 호흡은 고요하다. 제 상태를 하나씩 확인하며 시선을 내린다. 젖은 옷가지에 땀이 스미지 않았고, 마르지 않은 바짓단은 깨끗했다. 직후, 어떠한 생각이 스치며 멈춰선다.

 

그조차 우연한 순간이라 하기 공교롭게도, 나는 숲이 끝나는 경계를 목전에 두고 서있었다. 다른 환경이 시작되는 구간이다. 다만, 그곳에 선택은 없었다. 도시를 벗어나던 감각은 조금도 전해지지 않았다. 자연히 미간에 주름이 진다. 입술 끝은 이빨 사이로 들어가고, 눈썹 끝은 살짝 올라간다.

 

"변했다."

 

체감되는 부분은 없었다. 조금 떨어져, 남을 보듯해야 이질감을 느낀다. 심박은 희미하고 호흡은 그보다 옅다. 노폐물 따위는 배출하지 않으며, 다른 오물이 묻지 않는다. 손을 들어 목덜미를 쓸어내린다. 평소와 같은 적당한 온기, 그렇게 더욱 혼란해진다.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 변해야했다면 기준은 무엇인가. 물론 본래의 세계에서 벗어났으니, 내가 믿는 진실들이 부정된다 해서 이상할 건 없다.

 

그저, 짐작할 수 없어 불안할 뿐이다.

 

제자리에서 해소될 불온은 없다. 때문에 가야한다. 숲을 벗어나, 더욱 짙게 피어오르기 시작한 연기의 시발점을 찾자.  길게 자라난 수풀을 헤치며 나아간다. 억센 풀이 피부를 스치고, 잎사귀의 질감을 느낀다. 꺼끌하고 단단하다. 드러난 피부가 얕게 베이며 피가 방울졌다. 이번엔 뭐가 달랐을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생각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재촉한다. 열망과 탄식이 한 데 뭉쳐 두근거렸다. 그렇게 갈라진 진의 중 더 밝은 것을 찾아, 숲을 빠져나가는 순간이었다.

 

무지의 소치마저 경외롭게도, 시야를 채운 장면은 아득한 광명이 전부였다. 헤맨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을텐데, 왜 이리 눈이 부실까. 휘몰아치는 빛줄기가 망막을 지나 머릿속까지 들어찬다. 어느 것도 분간할 수 없다. 하얗게 물들어 맥동하는 시계와 귓가에 소용돌이치는 이명만이 가득하다. 그도 잠시, 곧 지긋한 통증이 밀려오며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눈을 가린 막이 벗겨지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결을 따라 통증이 사그라들었다. 그에 더해, 온 몸에 엉겨있던 우울이 부서져 휘날리는 것만 같았다. 나를 기다린 풍경은 어떠한가. 끝을 상상하기가 죄스러울 광활한 평야, 먹구름을 비집고 내리쬐는 햇살과 그 아래의 작은 물웅덩이들까지. 평생 남기고픈 모습이었다. 익숙해진 그대로, 바지춤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꺼낸다. 아직도 물이 흥건한 기기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런."

 

사진으로 남기는 건 포기해야했다. 그러니 눈에 들어오는 그대로의 풍경을 기억하자. 느긋한 미풍은 온화했으며, 구름을 흩어낸 빛줄기는 아련하다. 물을 담아둔 땅은 하늘의 모든 장면을 되풀이한다. 빛을 담는 주체는 한껏 추레해진 나다. 괜히, 옷에 남은 물기를 한번 더 쥐어짜낸다. 몇 방울 더 떨어졌으나 눈에 띄는 변화는 없다. 내 행동이 우스워 작게 웃는다. 폐부에 끈적히 달라붙어있던 숨이 허탈하게 새어나왔다.

 

애초에 풍경을 강조하는 피사체가 나였을지 모를 일이다. 오래전에 버릇이 된 풀이법은 무거웠기에, 감상을 정리하는 일도 이쯤으로 마무리 된다.

 

연기는 한 층 먼 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작은 동산 어귀, 무성하게 자라난 갈대숲 너머다. 들판의 황금밭은 조금씩은 다른 색감을 가지고 있다. 서로 달라 더욱 환히 빛나는, 덕분에 더 그립게 느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한결 가벼워진 걸음을 딛는다.

 

어색한 정경이 왜 미약한 옛을 불렀을까. 경험상, 해답은 항상 가깝고 불안한 곳에 있었다. 결론 이전에 이미 보폭이 커지고 있었다. 점진적으로 몸을 길게 뻗는다. 큰 물웅덩이를 한달음에 가로지르며, 무겁게 나부끼는 옷자락을 느껴가며, 광활한만큼 멀었던 세상을 가까이 둔다.

 

갈대숲이 내게 다가왔고, 가라앉은 정취는 그만큼 멀어진다. 피어오르는 색감이 짙었고, 그만큼 강렬한 매캐함이 맡아졌다. 눅눅한 첫마디에 알싸한 끝음절, 젖은 풀이 타오르는 향은 그러했다. 억센 갈대를 비집고 들어선다. 갈대가 바람결에 휘날리는 소리마저 잔잔하고 올곧다. 이토록 파묻힌 와중에는 매연 향기도 나지 않았다. 지긋하게 족적을 남긴다. 빽빽하게 자리한 갈대들을 피해간다. 발자국이 어지러이 이어졌다.

 

그리 오래 걷지 않았다. 그럼에도 끝이 보였다. 단지 무성했을 뿐, 이들의 치세는 넓지 않았다. 때문에 자그마한 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보였다. 곧게 뻗은 갈대 사이로 또다른 생태가 보이고, 환경의 경계가 그어진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불꽃은 그곳에 있었다. 살아남아, 절박히 죽어가는 생명을 멀리한다. 바람에 꺾여 날아간 갈대와 죽어 떨어진 나뭇가지로 타오른다.

 

내가 찾던 이도 그 자리에 있었다.

 

"걸음이 꽤 느려졌구나."

 

참으로 여상한 말투였다. 앞서 떠올렸듯, 나는 그 수많은 우연들을 믿지 않았다. 내 위에 자리한 무언가의 의도를 알지 못한다해서 모든 과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제 주제가 닿지 못할 이해가 있으리라고, 나는 많은 변화들에 그렇게 적응해왔다. 다소 불쾌한 다름이라도 인정하며 나아지자. 부족한 경험을 부풀려, 가시 돋친 삶으로 세운 다짐은 꽤나 굳건해보였으나, 과장된 탑은 언젠가 무너진다는 것 또한 이미 알고 있었다.

 

곧 끝나는 갈대밭 너머, 언젠가 보았던 뒷모습이 선명하다. 잔잔하게 밀려와 일순 강렬해지는 기시감, 기억 저변에 자리한 어느 장면이 자연스레 되풀이 되기 시작했다. 지금보다 작은 몸, 때문에 더욱 커보였던 거울들이 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뒤늦게 그때를 떠올려 지금을 알아채니, 그제야 갈대의 키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쓰다듬고 뺨을 훑으며 내려간다. 이윽고 어깨 선에 맞추어 멈춘다. 잊어버린 시절이 돌아왔으니, 그의 모습이 비로소 완전해졌다.

 

누가 계획했던, 배려를 찾아볼 수 없는 지독한 호의였다.

 

힘줄이 돋아난 손이 꺼져가는 불을 살려낸다. 오래되어 빛바랜 코트, 완연한 봄에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다. 다만, 그에게는 가장 익숙한 모습이기도 했다. 풍경이 그와 어울렸다. 나는 갈대를 밀어내며 그에게 다가갔다. 빈틈없이 깔린 자갈 위를 걸어, 그의 등 뒤에 선다.

 

첫 말은 어떤 게 좋을까. 오랜만에 만나는 인연은 아니다. 긴 말이 필요한 관계도 아니었고, 구태여 안부를 묻는 게 되려 껄끄러울 상황이었다. 될 수 있는 한 가장 가벼운 안부를 전해야겠지. 우리에게 침묵이 어색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작은 기색에도 휘날리는 불꽃만을 따를 뿐이다.

 

"기분은 어때요?"

 

지나치게 적당해, 일견 모자라보이는 질문이 튀어나온다. 고심하여 골라낸 순간은 바람이 잔잔해져 적막이 깔리던 때였으니, 결국 필요한 요소는 나에게 있었다.

 

"묘해."

 

들인 시간만큼 짧아진 대답과 함께 남자는 장작을 더 집어넣었다. 불똥이 튀어오른다. 곧이어 화염이 더욱 넘실거리고, 우리의 문장은 그만큼 길어진다. 거리는 역으로 짧아졌기에,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제가 오고 있는 걸 아셨어요?"

"알다마다, 처음부터 알았지."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그의 동공 속에도 작은 불빛이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상상과는 다르다. 순간을 기록한 사진과도 달랐다. 익숙해져 잊힌 당연함들, 알고있다 착각한 그리움이었다. 모든 건 찰나에 일어났다. 급히 새겨놓은 추억이 녹아내리고, 오롯이 내 앞에 자리한 사람만 보였다.

 

먼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듯했다. 나는 그들을 위해 울지 않았을까. 홀로 남은 기억이 안타까웠을 뿐인가. 슬픔은 갈 곳을 잃어 주인에게로 돌아왔으니, 상처가 끝없이 덧나던 이유를 이제야 찾아낸다. 먼 풍경의 빗물이 역류하는 게 느껴졌기에, 나는 세상과 이어진 의식을 억눌렀다. 이 시간은 필히 늘어져야했다.

 

아직 마주할 것이 많았기에,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또다시 불을 가까이한다. 차오르는 우울이 조금이나마 걷히도록, 마음에 엉겨붙은 감정들을 불사른다. 동행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등을 두드려 주거나 어깨 위로 손을 얹지 않았다.

 

다만, 그는 물었다.

 

"내가 네 아비라는 것을 믿느냐?"

 

비슷한 말들을 자연히 떠오르게 하는 익숙한 문장이다. 가끔 그리했듯, 일부러 덮어둔 사실을 가감없이 벗겨내어 그 순간을 부담스럽게 만들고는 했지. 어릴 때는 그런 아버지가 못내 미워져 서럽게 운 일이 많았다. 물론 지금은 그런 그가 좋았다. 적어도 의심할 일은 없었으니까. 그는 살며, 내게 일말의 불안도 주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한 마디이기에 울적함이 가셨다. 먼 하늘의 우레도 차츰 멀어지고, 다시금 타닥이는 소리가 커진다.

 

"믿고 싶은 거겠죠."

"그래, 너도 확신은 없구나."

 

아버지는 소리내어 웃었다. 한결 가벼워진 표정을 보아하니, 이어지는 대화가 기꺼운 모양이었다. 잦아들지 않은 웃음과 함께, 그는 기다란 나뭇가지를 들어 모닥불을 헤집었다. 잿가루와 불씨들이 휘날리고, 그의 말문도 한 걸음 더 트인다.

 

"보기에 어떻지? 나는 모르겠거든."

 

문장이 오갈수록 딛을 수 있는 땅이 넓어진다. 그의 불안을 끝낼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의 규칙은 단순한 편이다. 한결같이 그러했듯, 아버지도 의식의 부산물로 빚어낸 객체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정말 그렇게 결론지어야할까. 현상이 일정한 조건에 따라 형성된다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자세를 바꾸는 건 나의 자유였다. 선택을 했기에, 책임이 나를 마주보고 있지 않은가.

 

기로 앞에 섰을 때, 돌아오지 못할 언젠가가 두려워 도망쳤다면... 나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을 터였다. 세상이 아니라, 내가 이 순간을 기약했다. 결론을 내린 직후, 경험이 한 지점을 향해 모여들고 기억은 찰나가 되어 한 공간에 펼쳐진다. 모든 시절의 장면이 한 곳에 있다. 수많은 아들과 그보다 많은 아버지를 찾는다. 되새기는 시절만큼, 쓸모없는 겉치레로 지어낸 문장들이 지워진다.

 

"알고있던 그대로죠."

 

막연한 위화감이 미처 가시지 못해 빈자리가 생경하게 느껴질 뿐이니, 지금의 그에게 없었던 기억도 잃었다며 위로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말뜻이 온전하게 전달되어 끝내 냉막하게 느껴지도록, 나는 목소리의 고저를 일부러 흐릿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못내 허무한 듯 표정을 잃었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며 가볍게 미소짓는다. 마치 '아들놈이 그렇지, 뭐.' 그렇게 말하는 듯 보였다. 그는 여전히 죽음을 모른다. 그러니 괜찮다. 이 대화에 따르는 책임은 내 감정 뿐이다. 그저 수없이 흘러내려 마르면 될 일이다.

 

"그래서, 해주고 싶은 말은 있나요?"

"네가 듣고 싶은 말은 아니고?"

 

장작은 재가 되었고, 나뭇가지는 불씨로 흩날린다. 검게 그을려 떨어진 나무껍질은 자갈에 부딪혀 조각났으며, 갈대를 헤치고 다가온 바람은 죽어가는 불을 한사코 살려내었다. 우리는 곁에 쌓인 갈대를 모닥불 위에 쌓았다. 짙은 연기구름이 피어오르고, 우리는 점차 흩어지는 온기 안에 기거했다.

 

"나는 부족한 점이 많다."

 

그의 끝음절을 따라서 불꽃이 흔들리고 있다. 약간의 매캐함, 살며시 닿아오는 화기 역시 그랬다. 멈춘 건 우리 둘 뿐이다. 시작이 그랬듯, 어느 끝조차 자연히 흘러가지 않는다. 하여, 우리는 노를 저어야했다. 몸 전체를 움직여 물밑바닥을 긁는다.

 

"그래도 이야기를 듣겠느냐?"

 

그가 나를 바라본다. 내가 그에게 그랬듯, 전체를 훑는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그런 시선이 싫지 않았으나, 마주 볼 용기가 생겨나지는 않았다. 또다시 말을 고른다. 기억을 더듬어 최대한 얕은 곳을 찾는다. 한 길을 알 수 없는 속내이기에, 걸음을 조심스레 딛어야 했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옮겨 말라붙은 개울 너머를 바라볼 뿐이었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목 주변을 살피던 그는,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복잡한 모양이었다. 나는 한적한 오솔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흙길 위에 찍힌 발자국들은 한 순간도 올곧지 못했다. 같은 자리를 수없이 맴돈 흔적이 여실하다.

 

"이곳은 네 기억으로 빚어졌지. 그리고 너는 단편적인 정보를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되묻고 싶구나. 나를 왜 아버지로 여기겠다는 거냐?"

 

직설적인 말투와 담담한 태도, 아버지는 생전의 모습과 진배없었다. 그러니 내가 알지 못하는 자신이 일부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버지가 되지 못하는 사유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방향이 전혀 다른, 내 생각이 닫지 못하는 방면이 있을까. 아직도 요동치는 감정을 잠재우고, 잠시 그의 입장에서 사고한다.

 

자신이 죽은 시점을 완전히 인지했다면, 차후에 의식이 돌아올 때에도 스스로를 믿지 못할까? 아니, 아버지는 그런 걸 신경쓸 위인이 아니다. 인격이나 의지에 대한 불안이 만든 자세가 아니다. 철학에서 벗어난, 보다 실질적인 답이 필요했다.

 

"어디까지 알고 계신 거죠?"

"네가 아는 만큼을 알고, 내가 해야하는 것을 알지."

"그러면, 내가 끝에 도착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기억은 언제까지나 불완전하다. 내가 품어왔던 시간으로 엮었으나, 공간이 그보다 넓게 창조된 탓은 그러했다. 젊은 경험은 일천했기에 어설프게 채워놓은 풍경들이 많았고, 어설프고 흐릿한 건축물들은 주인을 앞에 두고도 흘러내렸으니 나는 이 세계의 말로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모두 없던 일이 되겠지. 아니, 너는 기억할지 모르겠구나."

"아직 이 세계를 믿지 못하시는 거군요?"

"그래. 네 엄마가 누누이 말했듯, 우리 둘은 꽤 닮았으니까."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꺼져가는 모닥불을 즈려밟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아들아, 이 상황을 의심하지는 않는 거냐?"

 

분명, 나에 대한 배려를 찾아볼 수 없는 호의였다. 차라리 평소처럼 거실에 모여 담소를 나눴으면 어땠을까. 아버지가 스스로 죽었다는 걸 모르는 상태로, 나를 위해 하루의 일상을 돌려주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끝내 더욱 슬퍼지더라도, 나는 못내 그런 광경을 바라고 있었다.

 

"나도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른다. 단지 눈을 떴을 때, 너를 데려와야한다는 사실만 떠올랐지. 아쉽게도 네 어미는 보이지 않았고, 너와 관계없는 생각을 하면 계속해서 머리가 비워졌다. 마치, 해야할 일만을 하라는 것처럼 굴더군. 그렇게 깨달았다. 이 삶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는 걸 말이야."

 

마침내 무언가 선언할 듯, 그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여전히 딱 맞는 기장의 옷, 하지만 늘어난 나잇살만큼 여유가 없어진 치수가 보인다. 그 맵시가 어쩐지 우스꽝스러워, 작은 웃음기가 저도 모르게 입가에 새어나온다. 그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툭 튀어나온 배가 정겹다.

 

"...힘을 좀 빼고 말할까?"

"그러는 편이 좋겠어요."

 

그는 제 뱃살을 연거푸 쓰다듬었다. 한탄 섞인 혼잣말은 마치 내가 들으라는 듯 컸다.

 

"예전 기억이 배경인데 왜 몸뚱이는 지금 것인지..."

 

아버지는 다소 가벼운 언행을 보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무게 잡기를 포기한 것인지, 우리가 먼저 지칠 일을 염려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죄송하다고 해야하나요?"

"뭘, 감각 없는 세상을 탓해야지."

 

대화가 너무 길었을까. 걸음을 재촉하듯, 도심 방향에서 우레 소리가 울려퍼졌다. 땅이 미약하게 진동했고, 바람엔 비릿한 향이 섞여들었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일어섰다. 갈대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간헐적으로 번쩍였다.

 

"여기는 얼마 못갈 것 같구나."

"이제 갈 곳은 아예 다른 공간인가보죠?"

"아마 그럴 거다. 반대편이 아예 보이지 않았거든."

 

아버지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뒤를 바짝 붙어 따랐고, 옛 우울은 우리들의 보폭만큼 따라왔다. 동산 어귀, 나는 그곳에서 지나왔던 길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신호를 보았던 숲은 이미 빗물이 들어차고 있었고, 물이 지나간 흔적만 있던 개울에 아주 작은 선이 새겨지고 있었다. 한없이 투명하고 맑은 물이었다.

 

아버지의 걸음소리도 자연히 멈춰있었기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발자국 위에 서있는 중년의 남성, 가장 곧게 남은 족적이 제일 선명하다. 어쩐지 미어지는 광경을 뒤로하고, 나는 그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물어봐야했다. 수많은 말들을 건너왔지만 몇 가지 의구심은 아직도 남아있던 탓이다.

 

"그래서, 이번 삶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해요?"

 

내 말에 그의 표정이 조금 바뀐다. 무던하나 처연했던 자세와 애증은 남았으나 갈피를 잃은 눈길하며, 옛 향을 부르는 옷가지와 그를 받히지 못하는 현실이 어우러진다. 그런, 모든 망설임과 어중간한 결의 속에서 아버지는 말한다.

 

"...이 길이 옳다고 믿게 만드는 거란다."

 

잔뜩 뭉개진 첫 음절엔 확신이 없었고, 끝에서야 강해지는 발음에는 나를 향한 마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답변했다.

 

"나는 아빠를 믿어요."

 

가슴이 앞서간 믿음에 대한 책임을 먼저 고려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그리 말하였다. 나는 그를 지나쳐 걸었다. 길이라 할만한 경로는 하나 뿐이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 잠시 우두커니 서있던 아버지는 뒤늦게 나를 따라왔으나, 기쁨에 휘말려 경박해진 걸음걸이는 숨겨지지 않았다.

 

 

두 남자의 걸음은 멈추는 법이 없었다. 단순히 갈 길이 멀기 때문이 아니라, 오래도록 삭힌 감정을 때맞춰 등장한 상황에 토해낸 뒤였던 탓이다. 뭇 남정네들처럼 침묵과 나직함을 금처럼 여긴 터라,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어색했다. 다만, 해묵음을 벗겨낸만큼의 거리는 줄어들어있었다. 비슷하게 흔들리는 어깨와, 하늘을 보는 신발코의 높이가 그를 알렸다.

 

'아빠라니.'

 

나도 참, 감정에 휩쓸려 꽤 오래된 명칭을 썼구나. 명치 어림에서 두근대던 부끄럼을 가라앉힐 즈음에도 산길은 완만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수백의 걸음이 이미 겹친 통행로처럼 편안하기 그지없다. 이곳 역시 지금껏 만나온 풍경과 다를 바 없는 감상을 주고 있었기에, 나는 익숙하고도 간지러운 적막을 깨야만 했다.

 

"우리, 여기에 온 적이 있던가요?"

"음... 네가 여기 온 적이 있었나?"

 

아버지는 이곳을 아는 눈치였다. 시선이 한 지점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다. 적지 않은 추억이 쌓인 곳인지, 걷는 속도도 살짝 늦춰진다. 그런데 여기에 네가 온 적이 있었느냐니. 얼마나 옛날 일일까. 다만, 이 길을 나 역시 지난 적이 있을 게 뻔했다.

 

"아, 갓난아이일 때 왔던 거 같다. 사실 너 임신했을 때 제일 많이 왔었지. 배가 부르고 나서는 못 왔지만 말이야."

 

최근까지 살던 곳에서 개발되어 희미해진 옛 동네로, 이제 완전히 사라진 지형과 놓친 인연까지, 나는 점점 과거로 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시작은 이 끝이라 했지. 그래, 내가 세상을 만난 곳에서 아버지는 시작되었다. 나아갈수록 현상의 기준이 나라는 게 더욱 확실해진다. 그럴수록 이곳이 가족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고, 끝없이 확인해 되새긴다.

 

끝에 다다랐을 때, 다시 올 이별을 통감했어도 행여나 실망하지 않도록.

 

"슬슬 보인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서 상념에서 깨어난다. 짙푸른 향기 가운데, 수많은 나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그에 더해 일정하게 이어지던, 신발 밑창과 굳은 땅이 맞부딪히는 감각이 끝났다. 사실, 아직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거리였다. 하지만 나는 그 멀고 먼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그곳에는 그저 덩그러니 자리한 공터가 있었다.

 

우두커니 서있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앞서 뛰기 시작했다. 위아래로 굽이치는 산길을 그가 내달린다. 낡은 구두굽이 산의 고요를 깨부수고, 나무들의 합창은 기세를 키워냈다. 뒤편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나뭇잎이 휘날리고, 옷자락이 나부꼈다.

 

잠깐 사이 한참을 앞서있는 아버지의 뒤를 따른다. 어쩐지 마음이 다급해져 다리는 괜히 삐꺼덕거렸고, 박자를 잃은 뜀박질은 균형을 무너뜨렸기에 시선이 평소보다 낮아졌다. 그 순간, 찰나의 편린으로 남은 기억 속 풍경이 말했다. 한없이 넓게만 보이는 등을 따르라고. 펄럭이는 코트는 그의 풍채를 더욱 커보이게 했기에, 휘몰아치는 숲속 정경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레 그의 걸음을 따르게 되니, 그는 여전히 내 거울이었음을 깨우친다.

 

공터의 초입에 다다른 아버지의 외침이 아득하게 울려온다.

 

"엄마 보러 가자!"

 

어머니를 보러 간다. 그 말이 나를 참 들뜨게 하면서도, 어쩐지 마주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와 달랐으니까. 지금쯤이면 우리를 찾으며 혼자 울고 있지는 않을까. 세상이 준 목적이 그녀에게 충분한 안정이 되길 바랄 뿐이다. 다른 곳에 있는 마음이 완전히 같은 곳을 바라보아도, 결국 발걸음이 닿는 위치는 다를 테니. 아버지의 쾌활한 한 마디 속에 묻어나는 다급함은 아마, 어머니의 그런 성향에서 비롯되었을 터였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고, 나에게는 어미였으나 그에게는 아내였으니, 그 차이가 지금의 거리를 만들어내었다. 관계의 간극 덕에, 나는 아버지보다 뒤늦게 공터로 들어선다.

 

산길 끝의 굳은 땅은 참으로 각별한 감상을 주었다. 조약돌 하나 없이 고운 흙만이 가득하며, 한적한 허공을 향해 뻗어나온 나뭇가지도 선을 넘지 않았고, 미약하게 느껴지는 기척들은 산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사실, 그 뿐으로 특별한 정경이 되기는 힘들었다. 모든 건 하늘이 오직 이곳만을 굽어보는 듯, 먹구름이 걷힌 유일한 장소인 탓이 컸다.

 

"햇살이 좋지?"

 

아버지는 공터의 정 가운데에 서있었다. 얼굴에 드리운 음영들이 한층 선명해져있다. 그의 표정이 일부 가려진만큼, 제 짝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욱 드러난다. 하지만 그는 더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뒤편의 무언가를 가려둔 채로, 내게 장난스럽게 웃어보인다. 나는 그의 다리 사이로 드러난 형체를 살폈다. 땅에 맞닿는 바퀴, 굵직한 하얀색 프레임. 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맞추라는 거야?"

 

그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내가 절대 알지 못한다는 확신이 있어보인다. 내가 쉽게 떠올릴 수 없는 물건이라. 그의 장단에 맞춰 생각하면서도, 뜬금없는 장난에 어쩐지 그가 귀엽게 느껴진다. 불혹의 나이를 훌쩍 넘은 양반의 행동거지가 나이에 안 맞게 영 파릇파릇하다. 우리는 서로 닮았으니, 훗날에는 내가 저렇게 된다는 건가? 달갑지 않은 일이다.

 

"전혀 모르겠으니까 비켜줄래요?"

"아들은 아빠랑 단 둘이 있는 시간이 불편한가보구나..."

 

날을 세워 답하니 나를 되먹지 못한 자식으로 만드는 화법이 예술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순백색 외관에 유리로 싸여진 작은 침상, 흔히 볼 수 있는 인큐베이터였다. 확실히 산 속 공터에 덩그러니 있을 법한 물건은 아니다.

 

나는 인큐베이터에 가까이 다가갔다. 부속 장치는 하나도 없이 본체 하나만 놓여져있다. 흰색 담요를 덮고 있는 건 누군가의 손 때 묻은 수첩, 우리에게는 친숙한 외관의 공책이다. 나를 임신하여 품어낸 뒤, 갓난아기 때의 이야기를 담은 일기장이다. 성인이 막 되었을 즈음에 읽어보았던 기억이 있다.

 

“펼치면 어딘가로 이동하게 되겠죠?”

 

아버지는 두 손을 가볍게 들어보였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며, 나에게 다시 따지는 모양새였다. 하기야, 아버지는 이 일기장을 일부러 읽지 않았었다. 내 욕이 적혀있을 게 분명한 내용을 왜 보느냐며 자리를 피했었지. 물론 그런 내용은 단 한 줄도 적혀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되려, 행동이 조심스러워진 자신을 챙기는 모습이 처음에는 귀엽기도 했고, 중간에는 미안하기도 했으며, 끝내는 고마운 마음만 남아 둘째를 가지고 싶다는 내용이 있었지.

 

나는 어머니의 일기를 손에 들었다. 내가 보았던 모습 그대로다. 옷장 깊은 곳에 숨겨둔 어머니의 추억 상자, 지금도 그 안에 있어야 할 물건이었다. 과연 이건 모조품일까? 아버지의 견해를 물어보려 했으나, 그는 이미 몇 발자국 물러난 뒤였다.

 

주인이 없는 순간에도 읽고 싶지 않은가. 중년의 고집에 고개를 가볍게 저어보이며, 나는 표지와 함께 첫 장을 넘겼다. 정갈하게 눌러쓴 곡선형 글씨체가 가득하다. 해상도가 한껏 열화된 사진들도 보였다. 다만, 조금씩 비워진 자리가 있다. 그것만큼은 분명하게 기억난다. 아버지에게 전하려 썼던 말들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저 양반이 몰래 훔쳐봤을 거라고,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도망쳤다는 예상을 했었다. 나는 그때 어쩐지, 그녀가 그저 바라는 바를 말한 것이라는 직감을 받았었지. 그렇다면, 이 순간은 그날의 연장인가?

 

“아빠는 이걸 읽은 적이 있었을까요?”

“글쎄다.”

 

홀로 이 글을 읽었는지, 이제서는 완전히 모를 일이 되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있는 이도 모를 선택이라면, 그날의 어머니를 믿는 편이 좋을까.

 

“같이 읽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아버지는 성큼 다가왔다. 그는 마치 내 요구가 별 일 아니라는 듯, 상세한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이번 삶에서도 홀로 읽었을까? 함께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면, 그는 분명 내 아비와 다름 없는 사람이겠지. 다만, 그의 무던함은 가끔 지나치기에 확신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시선을 따라 빈 공간이 채워진다. 애초에 적혀있던 것처럼 희미한 글씨가 점차 선명해졌다.

 

“비가 다가온다.”

 

곧바로 다음 장을 넘기던 차에, 아버지가 시간이 없음을 말했다. 먼 하늘이 또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기쁜 날을 위해 밀어둔 우울을 쥐어짜내며, 도망치라는 듯 서서히 다가온다. 그로부터, 아주 작고 희미하여 스스로의 청력을 의심할 소리들이 들린다. 이름없는 풀잎 위에서 조각나는 물방울, 수많은 파문이 겹치는 물웅덩이, 갈대에 잠시 튕겨오르는 비, 마른 개울을 따라서 흐르는 굽이치는 물길까지.

 

우리는 눈길을 한 차례 교환한 뒤 말을 아꼈다. 함께 일기를 읽는 소감을 추려 보관하며, 어머니를 만나 풀어낼 회포를 동여맨다. 다행히, 글을 쓰는 아들을 둔 탓에 우리의 속독은 꽤나 빠른 편이었다. 바랜 꿈이 처음으로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장을 씹어삼켜 하나의 시절을 완성하자, 웅크려 있던 사진들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지나온 시절, 죽은 이야기가 살아나고 있다. 그 순간 우리는 깨달았다. 이 다음 세상이 어느 곳인지.

 

빗줄기는 이미 지척까지 다가와있었고, 햇살 속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결에 휘어지는 빗줄기가 빛을 받아 빛났다. 기껏 마른 옷이 다시 젖어들고 있다. 그렇게 잉크가 번지고, 곧이어 여린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서늘한 서슬에 놀란 내가 울고 있었다. 눈을 뜬 이야기가 목놓아 슬퍼하는만큼, 발 밑의 빗물은 검게 물들어갔다.

 

“가자.”

 

아버지의 한 마디에 물기가 가득하다. 빗물이 숨에 섞인 탓에 그렇게 들리는 거라며, 평소의 속 보이는 변명이 따라붙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다. 그건 발인이 끝난 날, 집으로 돌아가던 때의 광경과 사뭇 닮아있었다. 쉼없이 번져 모든 장면을 흐릿하게 한다. 완전히 검게 물든 공터, 먹이 얼마나 차올랐는지 알 수 없는 장대비, 경계가 지워지고 있다.

 

“가죠.”

 

내 목소리는 너무나 작았다. 미친듯이 쏟아지는 폭우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다짐이다. 하지만 괜찮다. 늘 그랬듯, 우리는 단지 엄마를 만나러가는 거니까. 큰 결심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이별이 두려워 만남을 피하고 싶지는 않다. 점차 감각이 무뎌진다. 무거워진 옷도, 잠긴 몸도 느껴지지 않는다. 세계가 우리를 떠밀고 있다.

 

돌아오지 않을 것이 두려워, 허망히 떠나보낸 시절로 돌아간다.

 

 

 

깊은 물 아래로부터 의식이 떠오른다. 이어, 짓쳐드는 한기에 눈을 부릅뜬다. 단색 타일과 마개가 달려있는 배수구가 보였으며, 코와 입으로는 물이 빨려들었다. 두꺼운 손이 나를 황급히 붙잡는다. 어색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몸이 수면 밖으로 힘차게 꺼내지며, 낯익은 얼굴을 마주한다. 새치는 한 가닥도 없고, 그 흔한 주름도 없지만…

 

“얼씨구, 제법 예쁘던 때가 되었구나?”

 

장난기가 더욱 심해진 목소리, 젊어진 아버지였다. 나는 곧바로 일렁이는 수면을 바라보았다. 짧뚱한 몸과 커다란 머리, 아버지의 두 손에 번쩍들린 내가 보였다.

 

“…저 몇 살처럼 보여요?”

“한참 미운 네다섯살.”

 

작은 소동이 끝난 뒤에, 나는 주린 배를 채웠다. 어린 몸은 잦은 식사를 요구했기에, 성숙한 정신도 견딜 재간이 없던 탓이다. 계란의 퍽퍽함은 더욱 심하게 느껴졌으나, 바나나 우유는 훨씬 달콤해졌다. 그렇지만, 고작 계란 한 알 우유 한 팩 먹고 배가 부르는 몸뚱이라니. 거울 속에 비치는 짧은 팔다리와 커다란 머리가 다시금 한스럽다. 그런 불평을 담아, 거울 앞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아버지를 노려본다. 제 아내를 만나러가겠다던 양반은 젊음에 한껏 취해있었다.

 

“언제쯤 갈 거에요?”

“너는 늙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는 거야.”

 

자신의 근육을 보며 감탄하는 그를 뒤로하고, 나는 이번 환경에 대한 정보를 정리한다. 우선,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반응하지 않는다. 당장 지금도 애늙은이 같은 말투를 쓰는 내게 꽃히는 시선이 전혀 없었다. 팬티만 입은 변태가 별 희안한 자세를 취해도 지적받지 않는다. 이쪽에서 먼저 접촉하려하는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또 쓸데없는 고민해?”

 

내 옆에 놓아둔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고, 남은 계란을 몇 입에 우적우적 씹어버린 그가 물었다. 저런 게 젊음인가?

 

“제가 이런 상황을 바란 적은 없었던 거 같아서요.”

“내가 알려주마. 너는 부모님의 행복을 바란 거야! 효자인 게지!”

 

장난인지, 진심인지. 나는 젊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정신까지 어려진 건가? 아무리 인상을 써도 그저 새침한 눈초리일 뿐인 얼굴을 잔뜩 구겨본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는 이내, 작은 미소와 함께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네 엄마가 많이 좋아할 거다. 가끔가다, 자기는 이때가 가장 예뻤었다고 말했었거든.”

 

또 한 번, 내 불안을 단숨에 종식시킨 아버지가 옷가지를 던졌다. 그는 내게 여유를 바랐을까? 따질 필요 없다. 아버지는 당연히 그럴 터다. 어려진만큼, 그에게 기대어 안정을 찾는다. 그래, 우선 어머니를 만나자. 다른 일은 차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테니.

 

물론, 모든 일이 의욕을 따라가진 못했다.

 

온 몸을 사용해 출입문을 열었으나 체고의 절반에 가까운 높이의 계단이 보였고, 열심히 기어올라도 다음 층이 있었다. 체력은 분명 남아있었다. 한데, 정신이 그에 따라주지를 못한다. 스물이 넘은 나이는 쓸데없는 괴로움에 취약했다.

 

“문이 많이 낡았네. 예전에는 진짜 이랬나?”

 

그에 반해 내가 형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나이가 된 아버지, 나는 그런 상황이 참 반가웠다. 감정을 가감없이 담아 아빠를 올려다본다. 계단을 올라오던 아버지는 내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란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나?

 

“왜, 어째서, 뭔데.”

 

당혹을 표현하는 말들이 쉴틈없이 새어나온다. 정신과 몸의 괴리를 느끼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본래의 아버지는 말이 좀 느린 편이었다. 마치, 업무가 아닌 일에는 혀를 놀리는 것조차 귀찮은 사람처럼 굴었지. 그러니 내 마음도 이상하지 않을 거다.

 

“업어줘요.”

 

때문에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어린아이의 칭얼임과는 거리가 먼, 참으로 속물적인 부탁이었다.

 

어둑한 지하에서 빠져나오던 우리는 곧 잊어버린 시절을 마주했다. 선명한 봄과 창연한 하늘 아래, 빛바랜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있다. 물빠진 색감의 간판 밑으로 까무잡잡한 꼬마들이 쏘다니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길에는 굳은 껌이 가득했다. 품에 안겨있는 내가 보는 세상은 그것이 전부일 정도로 좁았으나, 그 뿐이어도 충분히 그리웠다. 감상에 젖은 아버지는 그때처럼 나를 목마태웠고, 더 넓은 시야는 확연히 다른 부분을 골라내었다.

 

“우리 집이 왜 저기있어요?”

“그러게, 안 어울린다.”

 

적어도 목적지는 확실해보였다. 옛 향수가 물씬 피어오르는 도심 속에 신축 아파트가 우뚝 서있으니, 어머니도 당연히 저기에 계시겠지. 열심히 불을 피워낸 아버지에 비해 참으로 간결하고 편리한 신호였다. 내 보폭은 절망스러울 정도로 짧아졌기에, 걷는 건 그의 몫이었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길을 찾는다. 제과점을 지나면 문구점이 있고, 움푹 들어간 곳을 따라 들어가면 이발소가 나왔었지. 한창 걷던 우리들 앞으로 소독차가 지나간다. 분명 아까 뒤에서 보았던 꼬마들이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저맘때의 활동량은 기이한 데가 있다. 중간에 작은 소매점 앞을 지날 때, 아버지는 밖에 놓여진 아이스크림 진열대에서 하드 두 개를 꺼내들었다. 편의점 때와는 달리, 우리 손에 들려진 물건은 여전히 진열대 안에 자리했다.

 

포장지를 벗겨 입 속에 밀어넣는다. 모든 게 사실인듯, 차갑고 달았다.

 

“네 엄마가 뭐라고 할 것 같으냐?”

“마냥 반겨줄 것 같진 않아요.”

“가끔 표현이 서툴 때가 있기는 하지.”

 

아버지는 가볍게 웃었다. 다만 그가 이해한 내용과는 다르게, 나는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목적이 부여되었다고 말했듯, 이 세계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결정된 자유 아래에서라도, 나는 이 시간이 길었으면 했다. 그런 마음을 아버지에게 말해야 할까. 그럴 수는 없다. 애써 말한 의견에 반대한다면, 나는 그가 이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길지 모른다. 수없이 부정하게 될 기억을 가지고 싶지는 않다.

 

“아들아.”

 

그가 내게 말을 건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어쩐지 낮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언덕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단지와 접하게 되는 오르막길에 기다린 그림자가 늘어져있다. 호리호리한 여인의 체형, 몸매를 드러내는 원피스를 입은 윤곽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아버지의 시선을 따라갔다. 봄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보인다. 앞을 가리는 부분을 쓸어넘기는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기에, 나는 점점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는 다리가 땅에 박힌 듯 굴었다. 내 다리를 붙잡은 손에 땀이 배어나오는 것이, 그도 이 순간이 못내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무엇이 마음에 걸렸을까? 끝내 잃어버릴 순간이 너무 값질 게 두려웠나. 아니면, 살고 싶어진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다만 그 모든 가정들이 무색하게도, 그는 또한 기뻐하고 있었다. 그의 불안과 환희가 피부를 타고 전해진다.

 

아버지의 반응이 너무 적나라했나. 그녀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구두굽 소리에 맞춰 그의 심장이 출렁이고 있다. 그가 흥분할수록 그림자는 점점 짧아지고, 그녀는 그만큼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아버지처럼 젊어진 얼굴, 다만 그보다 극적인 변화가 있었다. 나이든 나는 이제 어린 사람들의 화장법이 통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셨던가. 그때, 지레 겁먹어 포기한 게 아니셨구나. 마치 지금을 위해 안배해둔 것처럼, 그녀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나만 어려진 줄 알았는데…”

 

더욱 맑은 목소리, 부끄러운 듯 살며시 가린 볼. 그렇게 두 그림자가 겹친다. 그 시절 그 나잇대의 이상적인 여성처럼, 그녀는 부서질 듯 연약한 미소와 함께 자연히 와닿았다. 그건 아버지의 표정이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 발짝 물러서 그들을 지켜본다. 작은 품에 고개를 파묻는 아버지와, 아이를 대하듯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어머니. 그 모든 호흡과 손길, 그리고 떨림에 담긴 수많은 감정이 흘러나왔다.

 

그로서 깨닫는다. 내가 진정 무엇을 바랐는지를.

 

언덕으로부터 봄바람이 불어온다. 한사코 짚어봐도 막연해,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바람이 그곳에 섞여있었다. 온화하고 그리운 기색이다. 어릴적 동네의 향기와 다소 빛바랜 색채로 완성된 작품에, 며칠새 얹힌 감정이 속절없이 녹아내린다.

 

그래, 우리는 단 한번도 마지막을 약속한 적이 없었다. 일상이 영원할 듯, 모든 순간을 당연하다 믿어 의심치 않았지. 그렇기에 죽음은 되려 초라해졌다. 빛날수록 끝내 허무를 논하는 삶이니 남은 생도 그저 덧없게만 보였으며, 나는 결국 마음 귀퉁이에서 불온에 기대 소망했다. 시위를 메길 수 없던 시작이니만큼, 죽음이라도 스스로 선택하기를.

 

우울은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련되었고, 오랜 집으로 돌아가는 젖은 길은 그에 어울렸지. 대체 왜 그랬는지. 나는 내 변화들이 극히 일반적이고, 또한 자연스럽다고 믿고 있었다. 뭐, 덕분에 이리 되었으니 다 괜찮은 걸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내 수많은 번뇌와 결론들을 알고 있으니까.

 

아버지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어머니가 그리도 그리웠을까? 아니면, 문득 이 때가 떠올라 감정이 복받친 걸까. 아쉽게도, 나는 그런 아버지를 두고 있지 않았다. 내색하지 않는 게 힘들었을 거다. 내 가장 큰 추억이 될 순간을 망치는 게 두려웠겠지.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부모가 아닌 그들을 내가 알지 못하니까.

 

“아들도 이리와!”

 

어머니가 밝게 웃었다. 더는 생각하지 말라는 듯, 거리를 둔 나에게 손짓한다. 괜찮다고 말해야할까. 이제 전부 괜찮다 말해 안심을 주어야 할까. 과연 그들은 그런 마음을 바랄까? 아버지라면 모를까,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말했다. 함께하는 시간을 더욱 가치있도록 하기 위해 나는 기꺼이 가족이 되겠노라고. 한 명의 의사는 우리보다 중요하지 않다며, 그런 건 언젠가 갈라설 사람들과 따지라고 했었지.

 

그렇듯, 모든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나고 있다. 그리운 모습 안에서, 정겨운 행동 안에서. 이별 앞에서 버렸던 언약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회상보다 느린, 통통하니 짧은 다리가 야속했다. 하지만 매걸음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기에, 나는 곧 그들 사이에 기거했다. 먼 길을 돌아 가족이 돌아왔구나. 부드러운 살결과 익숙한 체취, 그로부터 밀려오는 평안이 지금을 알렸다.

 

상봉이 끝났다. 흔한 말 한 마디 없는 잔잔한 만남이었다. 갈증이 사라진 공간에는 부끄러움이 가득했기에, 아버지는 체온이 여전한 자리를 피했다. 그에, 우리는 단지 앞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내 다리는 도통 땅에 닿지 않았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아버지는 괜한 헛기침을 하시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 아, 그런가. 옛 시절이 돌아온다 느낀 건 나 하나만의 감상이 아니었다.

 

“꾸미니 예쁘네.”

 

서두를 연 건 남자였다. 마치, 이미 준비된 답을 읊는 것만 같다. 무심한 표정과 여상한 말투, 미세하게 떨리는 끝음절. 그녀도 진부함을 느꼈을까. 기대와 불안이 혼재된 감정은 깨지고, 작고 포근한 웃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흐흣, 그게 뭐야. 얼굴은 좀 나아졌어도 말재주는 없네요.”

“당신 말재주는 여전하네. 익숙해. 그럼, 나 혼자 설렌 건가?”

“…그랬을까요?”

 

그의 마음에 답을 맡기겠다는 듯, 은근한 눈길을 건넨 그녀가 이어 내 손을 부여잡았다. 감촉은 봄을 닮아있었다. 밀려드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나는 두 분을 곁눈질했다. 현상은 이미 마무리되었다. 수렁에서 나를 건져내었고, 이로 인해 나는 더 살기를 바랐으니. 비록 어디를 살아갈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은 분명 나를 쓰기로 했다. 대가없이 주기에는 과분한 호의다.

 

“다 끝난 거죠?”

“그렇지..?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으니까.”

 

바람결에 휘날리는 머리를 쓸어넘기던 어머니가 아쉬움을 담아 웃음지었다. 단편적인 행복에 빠져 의미를 잊고 싶지 않다. 나는 어머니의 표정에 담긴 말들이 들려왔다. 그도 그런 것이, 나는 그녀를 글로 적어낸 경험이 있었다. 인물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게 무얼까. 방 안에서 맴돌던 질문을 들은 것이 내 어미였으니, 나는 그녀의 마음 깊이까지 닿은 일이 있었다. 다만, 이 현상에 대한 소감과 결론까지 알 수는 없었다. 마음은 내 생각보다 일관되지 못하니까.

 

“이제 좀 괜찮은 거냐?”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무너지는 나를 붙잡겠다. 그리하여 더욱 살게 하겠다. 자식의 세계라, 지금껏 체감한 적이 없던 일이다. 어느 경우라도, 제 세계를 알아챌 때면 대체로 늦은 감이 있겠지. 삶은 후회와 미련으로 점철되어, 언젠가 올 선택을 위해 우리는 벼려진다.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그리 인정받고 싶었다. 풍요보다는 명예가 값지리라 생각했고. 그랬기 때문에, 두 분의 죽음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그들은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았으니까.

 

“다른 우울이 생겼죠. 그래도 어제같지는 않아요.”

“그럼 됐다. 그런데 너는 항상 우울했잖아?”

“그렇게 보였나요? 딱히 그런 건 아니었는데.”

 

항상 울적한 사람으로 보였구나. 하기야, 달빛을 벗삼아 글을 쓰다 밤이 침잠한 뒤에야 잠들었으니. 가끔 보여준 모습이라고는 자판을 두드리다 미간을 한껏 찌푸리거나, 책을 펼쳐둔 채 먼 하늘을 바라보던 것 뿐이었지. 되려, 어릴적에는 함께 놀러다닌 일이 많았다. 내가 기억을 더듬는 동안, 어머니는 아버지의 등짝을 소리나게 때리고 계셨다. 한다 해도 여자친구랑 놀아야지, 왜 당신과 놀겠느냐며 놀리는 건 덤이었다.

 

두 남자의 생각과는 달리, 어머니도 죽음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단지 지금을 만끽하는 풍경이 자연스러웠고, 살갖 아래 감춰둔 불안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둘이 해괴망측한 계획을 짜고 있을 때, 그러다 사고나면 누가 책임지냐고 제동을 걸던 건 언제나 그녀였는데.

 

“엄마.”

“응?”

 

젊어진 덕에 살이 탄탄하다며, 아버지의 옆구리를 꼬집고 있던 어머니가 나를 돌아보았다. 좀 더 풋풋해진 표정이나 말투는 그렇다해도,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외모다. 심혈을 기울여 꾸민 내 동년배와 다름이 없다. 때문에 잠시 말문을 잃었다가, 침묵이 어색할 때쯤에야 묻는다.

 

“나 잘할 수 있을까요?”

“잘하겠지.”

 

어머니는 자상하게 미소지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려져 솜털 같아진 머리칼을 바람에 나부끼게 하며, 애정 가득한 눈은 찰나에 가라앉아 그럴듯한 말을 꺼내왔다. 또한 나는 바랐다. 계획된 현상이 마무리되었으니, 이 순간들은 내 꿈이 아닌 그들의 진심이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해준 건 딱히 없었어. 부족함을 느낀 건 오히려 나였거든.”

“그랬었지. 너는 유난스러운 데가 있었다. 뭐랄까, 보살핌이 딱히 필요하지 않아보였거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부모님은 옛날의 일들을 말하며, 서로를 보며 웃었다. 아들이 가끔 훌쩍 자라버린 것 같다고 이야기하면, 외딴 섬의 가족이 된 것 같은 취급을 받았다는 말도 들렸다. 내가 그리 특이했나? 해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걱정하지마라.”

 

아버지가 나를 번쩍 들었다. 그와 시선을 맞추는 각도가 애틋하고 그립다. 애를 써도 기억나지 않는 시절은 미처 돌아오지 못했으나, 단편적인 감상만을 홀연히 전했다. 간지럽고 포근한 기색에 나도 모르게 장난을 친다. 양손을 들어 아버지의 이마를 때린다.

 

“걱정 안해요.”

 

내 행동에 이어진 웃음에 아버지는 얼이 빠져버렸다. 그렇게 안어울리는 짓이었나?

 

“그럼, 누구 아들인데.”

 

어머니가 나를 휙 낚아채며 말한다. 여인의 몸으로는 무거울 텐데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느낌이 그리웠다며, 나를 강하게 끌어안을 뿐이다. 확실히, 많이 그리운 품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걸어 언덕길 끝에 선다. 우리를 내려다보았던 지점이었다. 동네가 확연하게 내려다보였다. 냉탕에서 깨어났던 곳, 옛을 가로질렀던 거리가 보인다. 그리고 그 위로는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이 있었다.

 

비가 다가오고 있다. 어머니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약한 물비린내가 묻어나, 봄은 한발짝 물러나있었다.

 

“…부족했지?”

“아뇨. 딱히 원하는 건 없었어요.”

 

뒤에서 다가온 아버지가 어머니와 나를 감싸안았다. 밀착한 몸 사이로 미약한 습기가 느껴진다. 이윽고 풍경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언덕이 끝나는 경계부터 시작해,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빗물에 젖어든다. 청아하게 그려진 시절이 흐릿해진다. 빗줄기는 점차 강해지고, 급히 만든 세계는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현상이 준 시간이 끝나고 있다.

 

“나름 예쁘네.”

 

휘몰아치는 비바람이 고점에 다다를 즈음, 수많은 색들이 뒤엉켜 흘러내린 빗물은 검디 검었다. 어머니의 공간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 색이다. 어머니의 감상과 달리 아버지의 손길은 좀 더 억세졌다. 빗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언덕을 기어오르는 끝이 어느덧 코앞까지 왔다.

 

“이제 가자.”

 

우리는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고작 몇 시간 전에는 비에 흠뻑 젖은 채 지났던 길이었다. 어느 때보다 순수한 몸과 마음으로 되짚는다. 서로를 바래다주는 길까지 불안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울먹일 수 없었다. 우리는 웃었다. 이 순간이 조금도 슬프게 기억되지 않게.

 

현관은 활짝 열려있었다. 벽면엔 먼지 한 톨이 없어 조명이 수없이 반사된다. 우리의 모습이 그만큼 많은 수로 묘사되었기에,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더욱 완벽히 알 수 있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끝이 아름답기를 바라고 있다. 가벼운 걸음으로 승강기에 오른다. 계단은 어둑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기에, 우리는 더 빠른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마주보고 있는 거울이 양쪽을 비춘다. 수많은 가족이 한 선분 너머에 자리했다. 서로가 서로를 마주하고, 각자가 각자를 뒤돌아본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를 건네기에는 목이 너무 메어온 탓이다. 문은 알아서 닫혔고, 버튼은 없었다. 도착할 곳은 하나 뿐이다. 몸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저항감과 함께 지긋한 부유감이 따라온다.

 

끝으로 솟구칠수록 늙어가는 몸을 느낀다. 서서히 이별을 하던 날로 회귀하고 있었다. 나는 부모님을 돌아보지 않았다. 흘러가는 시간이 두려워, 곁눈질로 거울을 보았다. 그들의 옆모습이 보인다. 자라나는 나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오랜 흐름 끝에 속도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한다. 오감은 어느덧 평소와 비슷해지고, 이어서 천천히 문이 열린다. 물건도 시간을 같이했는지, 버거운 소음이 울려퍼졌다.

 

어느새 조명이 꺼져있었다. 우리의 마지막을 담았던 거울은 뽀얀 먼지에 파묻혀있었으며, 바깥에서 밀려오는 공기는 내 어느 때보다 청량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기척은 이미 사라졌기에, 마음은 앞서 붙잡아둔 뒤였다.

 

덩그러니 놓여진 납골함 두 쌍이 보인다. 현상이 끝났다. 마음이 더없이 가라앉는다. 생각보다 의연한 내게 놀라면서도, 두 분을 챙기는 손길은 위태로웠다.

 

느린 걸음으로 바깥을 향한다. 여기는 버려진 건물 안이었다. 어딘가에서 들어온 넝쿨에 벽면이 뒤덮여 있다. 녹슨 골조들은 노출되어 을씨년스러웠으며, 시멘트는 이곳저곳에 균열이 일었다. 각종 가구가 있는 것을 보아하니 이곳도 온전할 때가 있었던 모양이다. 창가의 유리창은 뼈대만 남아있다. 이 삶은 어떤 기조를 타고났을까. 발걸음이 아련히 울리고, 사그라드는 떨림은 아득했다.

 

달빛이 가장 먼저 보였다. 아니, 달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커다란 위성이다. 내 시야의 대부분을 채우는 섬휘에 눈이 시렸다. 그에 시선을 천천히 내린다. 이곳의 어스름은 온통 새하얗게 물들어있었다. 일렁이는 빛에 맞추어 제 색채를 흔든다. 황홀경에 잠시 눈을 깜빡이던 나는, 그것이 내게 익숙한 계절이라는 걸 알아차린다.

 

“눈.”

 

본래라면 여린 꽃은 먼저 저물어 갈 때다. 첫 비에 젖어들어, 온 길가에 처연한 심정을 알릴 봄의 한복판이다.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따스했으니, 계절은 내가 알던 때와 같다. 나는 창을 넘어 걸었다. 뛰어내려도 좋을 높이였기에, 나는 그대로 땅에 내려앉았다. 그로서 확실해진다. 이건 결정화된 눈, 그 아래에 숨은 건 흐드러진 꽃밭이다. 푸른 꽃잎이 인상적이다.

 

잔잔히 내려앉는 눈송이들 사이를 지나쳐 더욱 먼 곳을 바라본다. 평탄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교차되는 꽃밭 끝에 자그마한 불꽃이 보였기에, 나는 홀린 듯 그 방향으로 나아갔다. 가지를 뻗는 생각을 정리하고, 선명도를 잃어가는 장면들을 깊게 되새긴다. 덕분에 거리가 짧게 느껴졌다. 매캐한 향, 모닥불이다. 텁텁한 향은 나지 않았다. 애써 억누른 감정이 심장 어림에서 요동친다.

 

“늦었어. 늦었다고.”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마지막 오르막길을 앞두고, 불빛을 등진 인영이 보인다. 바람에 따라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공연히 아릿했다. 하지만 그녀와는 다르다. 펑퍼짐한 후드에 굴곡을 드러내는 청바지 차림이다. 기다란 막대기에 몸을 기댄채, 그녀는 또다시 말을 걸었다.

 

“꽤 좋았나봐?”

“누구나 그렇지.”

 

한 남성이 언덕 뒤편에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의 검은색 코트자락이 나부낀다. 눈이 쏟아지는 광경 안에 서있는 둘은 어쩐지 사람같지 않았다. 많은 것에 해탈한 듯, 그저 담담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납골함을 껴안은 채, 봄눈을 맞고 있는 사람은 딱히 특별하지 않은 것 같았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눈꽃이야.”

 

이름? 그녀의 말에 멍해지는 것도 잠시, 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만 갑시다.”

 

그의 손짓은 투박했으나 거칠지는 않았다. 그들은 헤어짐이 당연했던 것처럼 만남 또한 순리라는 듯 내게 다가왔고, 현상의 경험은 이마저도 꿈결같이 만들었으나, 밤 하늘은 분명 희미한 안녕을 읊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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