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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낙오자들

엉겨붙은 허물

by 연안 어귀 2022. 7. 13.

어느새 버릇이 되어버린 듯, 나는 이렇게 습관처럼 첫 날을 상상하고는 했다. 설명하기 힘든 허전함이 가시지 않아 그랬을지, 아니면 항상 가시를 세웠던 그녀가 못내 그리운 탓일지는 확실치 않았다. 아마, 그녀도 지금의 나처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었을지 모른다. 단절된 공감을 시사하듯, 물병에 꽃아둔 푸른 꽃잎을 손끝으로 쓰다듬는다.

 

"한 번 쯤 만나고 싶네."

 

내가 준비도 없이 떠나보낸, 두 번째 인연이었으니까.

 

언제나와 같은 오늘을 셈하며, 주인을 떠나보낸 침상은 여전히 쓸쓸한 온기로 가득하다. 한 자리를 맴도는 체취는 한결같으니 이번 아침도 별 다른 일이 없겠지. 끝을 기다리는 자들 뿐인 낙오자들의 마을에서는 더더욱 그럴 터였다. 무언가 거북한 활기, 이미 지나간 옛을 탐하고픈 뒤틀린 체념이었다.

 

해묵은 사색을 이어가는 내가 때묻은 거울에 비쳤다. 온통 타버린 눈빛과 처진 어깨, 힘을 잃어버린 열의가 가득한 자신을 마주봤다. 그리, 헤픈 삶을 걸어온 두 남자가 서로를 비웃었다. 어쩌면 본인의 부정과는 다르게, 전력이었을 나를 알아가는 여정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늘 그랬듯, 슬슬 색이 바래지는 납골함을 닦아댈 뿐이었다.

 

해가 세상을 몇 발자국 더 오르며, 선명한 햇살이 창 틈으로 스며들어왔다. 오래된 향으로 가득한 집이었다. 아득한 세월동안 내려앉은 서글픔이 그만큼의 얼룩으로 곳곳에 쌓여있다. 분명 청결하게 정리했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누구도 덜어낼 수 없는 흔적이리라. 세상을 등진 각 스스로를 포함한 영원이다.

 

이런 사족과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이 마지막 신념을 꺽어내고 조심스레 내려둔 장소는 끝이 가진 의미만큼이나 초탈하고 별 볼일이 없었다. 단지, 향방을 잃어버린 뒤에야 칭얼이는 두려움에 불과하다. 문 옆에 난 작은 창에 얼굴을 쑤셔 박은 이웃이 아니었다면, 나는 상념의 끝자락을 보고서 한동안 속을 달래고 있었겠지.

 

“눈꽃, 미적거릴 시간이 어디있나."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장난기 많은 중년의 남성, 겨울비다. 그 추운 겨울의 어느 날,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검댕을 닦아내며 찾아왔던 불쌍한 남자였다. 자신에 대한 소개는 뒤로 물려두고 한동안 앓았더랬지. 한 가족만을 위해 살았으니, 그 하나가 사라지며 세상에서 낙오된 사람이다. 뭐, 현상의 잔여물에 찌든 채로 만난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내가 조금 더 나았을 거다, 아마도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겨울비씨.”

“그런 것치고는 여유로운데?”

 

한결같이 익살스러운, 투정이 일상인 내 즐거운 이웃이었다. 물론 외양과는 다르게 사적인 이야기들은 전혀 웃기지 않았다. 우울함이 가시지 않는 어느 날 밤, 서투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평범했었으니까. 그래도 아직 짐 하나가 남아있어 떠나지 못한다는 건 나름 듣기 좋은 운율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에게 우를 범했으니, 상기에 대한 대가를 주어야하는 게 옳겠지. 나는 서랍에 넣어두었던 스마트폰을 꺼냈다. 계곡의 물레방아가 좀 더 거대했다면 좋았을, 전력의 잔량이 절반을 살짝 넘은 수준이었다.

 

“따님이 손주를 보셨다고요?”

 

레인코트를 마지막으로 착장하고, 전체적인 차림새를 정리하며 그에게 안부를 물었다.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단어들이지만, 실제로 내가 대상에 비하여 아득히 어린 걸 어찌 에둘러 표현할까. 아리면서도 따스할 말들이니, 단어를 고르는 데 더 조심스럽기도 했다.

 

“...글쎄, 처음 듣는 소식인데."

 

그저께 경첩에 기름칠을 해둔 덕에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나와 비슷하나 좀 더 무심한 옷가지, 겨울비는 울타리에 걸터앉아 있있다. 여린 햇살들이 그의 몸 주변에서 빛나고 있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은근히 공허한 듯한 어투로 정보의 출처를 되물었다.

 

"누가 그러던가?"

 

코트 주머니에서 낡은 스마트폰을 꺼내 손톱 끝으로 액정을 두드린다. 그의 눈길이 자연히 내 손으로 향한다.

 

“통로가 생겼잖습니까. 어찌, 이번에는 직접 보실래요?”

 

그의 심경이 널뛰는 걸 기다리며 사진 하나를 화면에 띄운다. 겨울비의 누나라고 불러도 될 듯한 지긋한 나이가 확연하게 보였다. 지난 번에 보았을 때보다 주름이 늘어있었지만, 두꺼워진 분칠이 그녀에게는 달콤하게 느껴졌을까. 슬슬 검버섯이 피기 시작한 만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되었네. 아비라는 게 되려 남보다 멀리있는 느낌이라서 그랬네. 자네도 슬슬 갈 날이 머지 않아서 더 그럴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는 무성한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을 하늘을 꿰뚫어보려는 듯, 녹색 천장을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 노력의 의미가 부질없어질 때를 다시 기억해냈을까. 겨울비는 짧은 숨을 한 번 뱉고 다시금 인자한 표정을 지어주었다.

 

“그래, 괜찮아 보이나?”

“웃는 표정이 본인 따님인 줄은 잘 알겠네요.”

 

올해의 계절들이 조금은 덜 시렵기를 바라며, 나는 또 거짓말을 했다. 닮은 점이라고는 눈꼬리 밖에 없는 딸을 보며, 그와 똑 닮았다는 새빨간 한 문장을 적어낸다.

 

“하하, 그런가? 나 역시 더 많이 알고 싶은 마음은 있다네. 다만, 뭐라해야할까..."

 

겨울비는 말 끝을 흐리며 몸을 뒤로 기울였다. 허리를 울타리에 걸쳐놓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자세를 유지하다가, 해야할 일들이 있던 그는 다시금 현재로 돌아왔다.

 

"아닐세. 말은 이만 줄이지. 오늘은 멀리까지 가야하니.”

 

짧은 웃음으로 미련을 털어낸 겨울비는 땅에 발바닥을 붙였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니, 그의 체격이 좀 더 거대해보였다. 겨울비가 주머니에서 작은 쪽지 하나를 꺼낸다.

 

- 남동쪽 바위산, 현상 최초 발현은 새벽 3 시 경이에요.

 

"벚꽃 씨가 문틈에 넣어두고 갔더군."

 

시든 벚꽃, 서리단풍과 함께 마을을 설립한 사람이었다. 현 구성원 중 가장 늙었지만, 낙오 시점은 그와 대비되어 스물이 채 되지 못한 때였다. 영원한 풋풋함 속에 이미 반쯤 승천한 이무기를 키우는 여인인지라, 처음 대면하는 순간에는 많이들 실수하고는 했다.

 

나는 눈꽃이라 적힌 팻말을 거꾸로 돌렸다. 직접 만들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우편함을 괜히 열어보고는, 그와 함께 천천히 마당을 나섰다.

 

“많이 따듯해졌네요. 작년 이맘때는 계속 정신이 없었는데 말이에요.”

 

나뭇잎 사이를 파고든 햇볕이 다소 따갑게 느껴졌다. 길가를 구르던 빛뭉치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여댔고, 풀내음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몹시도 기분좋은, 모든 것이 들떠있는 시작의 계절이었다. 끝을 인정하기에는 너무 잔인한 시기이기도 했다. 경험 본위의 결론은 아니었다. 현상 대부분은 봄과 가장 멀 뿐이다.

 

“혼이 찾아오기에는 너무 좋은 날씨지.”

"오늘은 조금 먹먹해도 괜찮을 텐데 말이죠."

 

하루의 첫걸음을 간단하게 평하고는 둘 다 입을 다물었다. 지난날들이 범람하기라도 한듯, 서로가 먼 곳을 바라보며 내색을 가라앉혔다. 거대한 숲이 바람결에 휘청이는 겨슬에 이 근심들마저 전부 무너져내릴 때까지. 익숙한 침묵이 이어졌다.

 

“지형에 대해서 따로 아시는 건 없습니까?”

 

다시 말을 꺼낸 건 내쪽이었다. 이전의 불쾌했던 감각이 깨어난 탓이기도 했고, 더 많은 사색을 원하지 않기도 했다. 겨울비 역시,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지나왔으니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그쪽 바위산은 잘 모르겠더군.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서리단풍 씨에게 여쭤볼 생각이네.”

 

겨울비는 손 안에서 굴려대던 쪽지를 접어 품 안에 넣었다. 마음이 복잡해보이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구겨진 옷소매가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며 겨울비의 부족함을 챙긴다.

 

“늘 그렇지만, 좀 덜 굴곡진 생들이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내 행동에 대한 감사로 겨울비가 미소짓더니, 이내 내 말을 정정해주었다.

 

“아쉽지만, 이 풍경과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거야.”

 

씹어뱉은 그 말은 한참동안 우리 사이를 맴돌았다. 짙은 회한이 뭉게뭉게 피어나 두 사람의 눈 앞을 메웠다. 감각이 붕뜨고 내 시선은 다시금 아득해졌다. 그가 내 어깨를 두드려주지 않았다면, 꽤 오랜 시간을 헤매지 않았을까.

 

“그래, 자네도 이제 갈 때가 되었지.”

 

겨울비는 발치에 있던 돌멩이를 걷어찼다. 가볍게 튀어오른 돌이 어느 집 마당으로 들어갔다. 서리단풍의 발끝이 보였다. 괜스레 반가운 상황에 웃음이 나온다.

 

짧게 길러 정돈한 수염, 한 치의 의심도 없다는 듯 강직한 눈매와 굳게 다문 입. 한 눈에 들어오는 이목구비를 가진 황혼기의 남성, 완연한 가을의 한복판에 때이른 서리가 내려앉으며 찾아온 귀인이었다. 내가 먼저 그에게 안부를 물었다.

 

“서리단풍 씨, 작업은 잘되고 있나요?”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한결같이 그림을 그리시는 분이었다. 한 삶이 다하고 나서야 세간의 인정을 받기야 했지만, 그런 건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이 골동품 같은 마을을 장식할 한 점을 내어놓기 위해, 밤낮의 구분을 먼 곳으로 치워버리셨지. 귀감이 되기 충분한 위인이나, 나는 그와 너무 다른 사람이기에 선을 긋는다. 혹시나 색이 섞여버릴지 모르니까.

 

“감이 잡히기는 했지. 오래된 혼이 도움이 되었어."

 

뜻 모를 소리를 늘어놓는다. 겨울비보다 연차가 높은 터라, 그도 단지 아리송한 눈빛을 보낼 뿐이다. 까마득하니 긴 기간동안 이들은 서로를 얼마나 이해했을까. 어쩌면 그저 서로가 다르다는 것만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별 말 없이, 서리단풍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우리가 그를 찾아온 이유를 스스로 짐작한 모양이었다.

 

“바위산은 습지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마을과 멀기도 하고, 주변 생태도 좋은 편은 아니야. 지역 전반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더군. 흘러내린 토사물은 진창이 되었을 테고, 여린 나무들은 모조리 뽑혔겠지. 그러니 도깨비가 남긴 기체를 쓰게. 잿불이 주기적으로 관리해주었으니 상태도 괜찮을 거야."

 

도깨비라, 대장장이로 들어와 계속해서 무언가를 배우던 사람이었나. 푸른 불똥들이 천지에서 미친듯 튀기던 탓에 정신이 없던 날이라했지. 이미 방황을 끝낸 사람인지라 자세한 일은 모르고, 한계를 모르고 성장하던 장인이란 것만 주워들었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도록 하죠."

“그래, 눈꽃은 말 뿐만이 아니라 자주 보자고.”

 

지형이 좋지 않다면 걸음을 더 서둘러야했다. 현상이 마무리될 시점을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공방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서리단풍의 거처와는 정반대였기에, 납혼당을 지나는 길인 마을의 중심부로 향한다.

 

“시든 벚꽃 씨는 아직 납혼당에 계십니까?”

“오는 길에 얼핏 보았을 때는 집에 인기척이 없었으니까, 아마 계실 거야.”

 

세상이 그렇게 좁아졌어도 아직도 예비 낙오자가 많은 건가. 기준점은 잘 모르겠지만, 세계가 움직이는 이유를 우리가 알 턱이 있을까. 늘 그에 대해 말이 많으면서도, 의문만 가득히 떠안은 채 방울져 지낼 뿐이었다.

 

서리단풍 씨는 전이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알고 계실까. 내부의 혼들이 어떤 식으로 준동하는지, 어떤 꿈을 꾸는지 가늠이 되실 거다. 아득한 세월동안, 혼을 마주하고 스스로를 가라앉혔을 테니까. 티끌의 미련도 없어, 이후 따위 원하지 않게 될 때까지. 그는 이곳에서 생을 완전히 마무리하게 되고, 걸맞은 후계가 또 찾아오겠지. 이곳은 세계가 만든 지하창고에 가까우니, 일련은 어색함없이 진행될 거다.

 

“전이 이후에 대해 알고 계시는 게 있으십니까? 아무래도, 조금 걱정되기는 해서 말입니다.”

 

겨울비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미 수백번은 더 다닌 길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무엇도 흥미가 생기지 않아 그랬을까. 그도 아니면, 본인의 대답에 확신이 없어 그랬나.

 

“자세한 건 모른다네. 단지 그럴 듯한 이론과 지금까지 일어난 현상들에 빗대어 추측한 것 정도야."

 

길은 점차 넓어져 둘 사이의 거리도 더 여유있게 변해간다. 그 환경이 어떤 말을 고를 지 도움을 주었을까. 겨울비의 생각이 쏟아져나왔다.

 

“옛날에는 우리가 어느 곳으로 흐르는지, 혼이라는 게 무언지 정의를 내렸다고 하지. 그 유산이 지금 남아있을 리는 없지만, 적어도 한 문장의 남짓되는 지침은 기억하네.

 

‘혼은 더욱 거대한 세계의 재산에 속한다.’

 

이 작은 세상의 조그마한 행성이야. 그렇다면 단지 우리는, 살아갈 뿐인 게 아니겠나. 어느 누구도 감히 예상하려 들지는 않는다네. 아마 그건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던 옛날에도 같았을 거야. 조금의 안심을 위해, 당장 지금의 평안을 위해 현상을 분석할 뿐이지.”

 

겨울비의 표정은 없었다. 다만 켜켜이 쌓은 지난 세월을 토해낸 듯, 안색은 좋지 않았다. 나 역시, 무지가 가져온 불안감에 시선을 멀리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 우리가 안쓰러워보였을까. 납혼당에서 나오던 시든 벚꽃이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얼핏, 보이는 외견처럼 아주 밝은 웃음과 함께.

 

“벚꽃 씨!”

 

나 역시 마주 손을 흔들었다. 세월은 예의 선을 정하는 데에 쓸 뿐, 나이가 많다하여 어려운 건 아니니까. 그녀도 이런 생각이 더 옳은 것이라 말해주기도 했고.

 

“마중 나가는 길인가요?”

 

희미해진 생을 그냥 놓아주기로 한듯, 완전히 색을 잃은 모습이다. 분홍색 스커트에 두툼한 흰 티셔츠, 설렘을 기대하는 차림새와는 달리 단적으로 끊어진 분위기를 풍긴다. 희뿌옇게 물든 홍채는 빛을 삼키고, 투명한 백발은 창백한 피부를 타고 찰랑인다.

 

“서리단풍 씨가 도깨비의 물건을 쓰라더군요. 하여, 공방을 거쳐서 가려합니다.”

“네에, 신입은 항상 환영해야죠. 안 그래도 우울에 찌든 사람들이니까요."

 

화사한 나른함이랄까. 그녀는 가까우면서도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를 앞두고 여러 번 뒤집히는 감흥에 새삼스레, 나도 육체가 십대에 고정되었으면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내 어린 시절은 그리 좋지 못했으면서도.

 

“참, 눈꽃 씨는 슬슬 준비하셔야죠?”

 

시든 벚꽃은 평소와 같은 말투와 웃음으로 내게 작별을 말했다. 아마, 그녀가 사람을 떠나보내는 방법이겠지. 젊은 노인에게 이별은 새롭지 못했다.

 

“딱히 준비할 건 없어서요. 마음만 더 추스르면 될 것 같습니다.”

 

겨울비도 마음의 준비는 이미 끝났겠지, 그리 생각할 뿐이었다.

 

서로를 붙잡는 상념은 공방의 지척까지 이어졌다. 이제 익숙해진 길, 낮은 정취가 스며있는 거리를 가로지른다. 이 마을은 새로운 날이 밝았음에도 고요했다. 비어있는 집이 많은 탓이다. 언젠가 사람이 많아질 것을 염두에 둔 결과였다. 세상이 얼마나 혼란해져야 그때가 올까. 북적임은 조금 그리울지 모르나, 낙오자가 늘어나는 건 달갑지 않았다. 그래,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작은 결론이 온점을 찍을 즈음,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는 굴뚝 모서리가 눈 끝에 걸쳤다.

 

“잿불은 오늘도 작업 중인가요?”

“도깨비가 떠나고 서리 단풍도 공방에 가질 않으니까. 잿불이 날을 잡은 게지.”

 

널찍하고 평평한 마당 곳곳에 그을음이 남아있다. 건물 안쪽은 부산스러웠다. 이윽고 땟국물이 가득한 남정네가 마당으로 뛰쳐나온다. 마스크를 집어던진 그는 바깥 공기를 들이키더니, 입에서 검은 매연을 뱉어냈다.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 끝이 푸석푸석하게 타들어있다. 내부의 격벽이 올라가는 소리가 나고 있다.

 

“이번에는 뭘 만드시는 겁니까?”

 

그는 쇳가루와 재가 가득 묻은 보안경을 쓰고 있었다. 작업복의 밑단이나 소매는 타들어 거뭇거뭇했다. 그제야 우리를 알아본 그가 씨익 웃으니, 검댕이 묻은 치아가 햇살을 받아 흐릿하게 반짝였다.

 

“일단 무작정 만들고 있어서 설명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아마, 마지막 작업이 될 것 같아요.”

 

그는 완연한 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저 시간을 축내며 현상을 기다리는 나와는 달랐다.

 

대부분의 낙오자들은 허무 앞의 무력감을 온전히 받아들이고는 했지만, 비뚤어진 잔재였음에도 다시 한번 타오르는 이들이 있고는 했다. 이후의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라 했던가. 더 나은 선택이 있는 게 아쉽게도, 나는 아직도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을 달래기 위해 토해낸 이물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어려운 법이었으니까. 시든 벚꽃도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독자를 생각하는 편이 어떻겠냐고 물었지.

 

타인을 위한 글, 달리 말해 읽혀지기 위한 글이라. 대중이 없는 세상에서는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였다. 나 하나를 알기가 어려운 삶인질데, 과연 마을 사람들의 눈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기록 중 하나가 되어 언젠가의 지침이 된다… 나를 기쁘게 하지는 못할 일이다.

 

조건 없는 호의는 오직 받아본 기억밖에 없어, 나는 희생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니. 혹여나 미련이 남을 게 두려워 답을 구했으나 부모님은 어떤 대답도 주지 않으셨다. 나는 변했어도 여전히 유약했다.

 

“눈꽃, 또 뭘 그렇게 멍하니 서있나."

“별 거 아닙니다. 그냥... 전이 이후에 대한 생각을 좀 했어요.”

 

우리의 짧은 대화를 들은 잿불은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괜찮을 거에요. 같은 과정을 거친 낙오자들 모두가 한 세상에 몰려있지 않을까요? 분명 알맞은 쓰임새가 있을 거에요."

 

그는 한 차례 더 해말간 웃음을 보였지만, 티끌만한 일그러짐을 감출 수는 없었다. 단지 아직 살아있다는 이유로 불가해한 죽음을 경계해야 하는 우리의 찰나를. 산산이 조각난 파편들이 사방에 떠다니는 듯했다. 이런저런 감정으로 점철되었던 이 거리에 영원히 잔류하게 될 사념들이 아른거렸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아득함에, 내 이름조차 벚꽃처럼 시드는 느낌이었다.

 

등짝에 쓰라린 통증이 온 건 그때였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겨울비는 덤덤한 표정으로 손을 털고 있었다.

 

“뿌리가 부실한 생각에 좀먹히면 노망이 생기지. 일이나 하자고, 눈꽃.”

 

그는 외부에 노출된 승강기에 먼저 올라서 내게 손짓했다. 외관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투박한 생김새, 온전한 작업을 위한 일환이다. 잠시 다른 꿈을 꾸어도 금방 제자리를 찾게 할 일관됨이니, 나도 할 일을 마쳐야 조금이나마 떳떳하겠지. 새로운 주민을 맞이한다. 푸른 꽃잎의 자리를 이은, 그게 마을에서의 내 일이었다. 금속 표면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본다. 평소와 같은 무심한 복장,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다.

 

이어 코트 안쪽에 미리 매달아둔 장비를 확인한다. 다섯 번 접히는 금속 봉, 적당한 무게감이 안정감을 줬다. 본래, 푸른 꽃잎을 위해 도깨비가 만들어주었던 물건이었다.

 

“완벽하군.”

“또 영문 모를 소리.”

 

지하로 내려가자, 흙내음이 머무는 공간이 앞에 펼쳐졌다. 서늘한 감촉과 약간의 숯향이 가득하다. 바깥의 소리가 일체 차단되어 집중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만약 무언가를 남기고 가기를 원했다면 나 역시 분주하게 이곳을 오가지 않았을지. 그리 생각하며 벽면의 손잡이를 당긴다.

 

기동음과 함께 내려가는 격벽, 촌스러워도 견고해보이는 기체가 보였다. 외관은 끝까지 취향이 아니었나. 단지 성능에 심혈을 기울였을지는 모를 일이다. 이 물건들의 장인은 이제 없으니.

 

광택없는 회잿빛 몸통, 내부가 보이지 않는 짙은 창. 섬세히 음각되었으나 마음껏 날려 적은 문양들, 마지막과 참으로 걸맞은 모양새였다. 서슴없이 들어가니 더욱 별게 없었다. 단지 여러 형태가 그려진 기판과 조종간, 골격이 드러난 좌석이 곧 전부였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멋이 없네요.”

“단풍이 디자인을 해주기는 했었어.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지.”

 

겨울비는 쓰게 웃으며 기기를 작동시켰다. 사용법은 전부 그림으로 표시했고, 외곽선은 점으로 양각되어있다. 문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듯, 이곳은 국적과 인종이 쓰잘데기 없어지는 장소였다. 역사가 주는 가르침은 온데간데없이 그릇만 덩그러니 흘러들어와 그랬으며, 본인의 생각을 쉬이 꺼내기가 어설퍼 더욱 그랬다. 구태여 말로 꺼낼만한 본심이 없었음에도, 낙오자들은 서로 닮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떠난 뒤에 마무리할 생각은 없었나요?”

“그게, 그 양반은 뭘 만들던 수정을 엄청하거든.”

 

겨울비는 좌석 아래를 매만졌다. 체형과 맞지 않는지 온몸을 구겨가며 무언가를 찾는다. 그의 미간이 다시 펴진 뒤에, 운전석이 후덕하니 넓어진다.

 

기계는 첫인상보다 조용히 움직였다. 졸지에 두 남성의 숨소리만 가득해진다. 그리, 침묵을 쥐어짠 힘으로 차량을 승강기에 올린다. 지상 위에 노출된 차체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어떤 염료를 쓴 건지, 그제야 앞면의 글자가 홀연히 드러났다.

 

‘설렘을 잃은 이곳의 모든 홀아비들에게.’

 

잠시 마당에 정차한다. 그리움이 물씬 묻어나는 말을 뒤로하고, 나는 조수석에서 내려서 잿불을 찾았다. 아직 내부가 정리되지 않았을까. 바깥의 그늘에 앉아있는 그가 보인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깊이 가라앉은 눈이 인상적이었다. 흔한 사색이었다.

 

"바로 가시려고요?”

“이미 늦은 감이 있습니다.”

 

잿불은 내가 다가가자 금방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살짝 올린 입꼬리와 휘어진 눈이 인상을 밝게 만들었으나, 그의 눈동자는 이전과 진배없이 침잠해있었다.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공방 뒤로 돌아가 열 개는 족히 넘어보이는 우산들 중, 적당히 좋은 물건 세 개를 챙겨돌아간다.

 

차량에 다시 올라타서 우산을 뒷좌석에 두자 겨울비가 그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남색 계열에 금색 실이 수놓아져 있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낭창하게 새긴 글자, 누군가 읽기를 바란 문구가 아니었다.

 

"도깨비가 쓰던 거다."

“사실 단순한 악필이 아니었을까요?” 

“때로는 정갈하게 쓰더군. 그게 그의 멋인 게지.”

 

겨울비는 헛웃음을 지으며 마을 외곽을 향해 운전했다. 못내 옛생각이 들었는지, 입가에는 작은 웃음이 매달려있었다.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마을은 드넓은 평야 위에 세워졌기에 체류지의 정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평탄한 대지 위에 각 시절을 떼어다놓은 듯한 장소들이 있다. 꽃망울이 맺힌 작은 동산, 숲 속의 계곡이 도처에 산재했다. 우리는 잠시 쉬어가고픈 때를 지나쳐, 저 멀리 떨어진 바위산으로 향했다. 거대한 지형은 짙은 먹구름과 빗방울에 덮여 둔탁한 윤곽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꽤 거친 현상이다.

 

“우리 같았어. 너 같기도 했고, 잿불 같기도 했지. 시든 벚꽃이나 서리단풍 같지는 않았어도 말이야. 그래, 이 말이 옳겠군. 낙오자답지 않게 평범한 사람이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딱 적당한 단어라고 되뇌었다. 지극히 평범한, 불운했던 우리라고. 밀려오는 감상에 시선을 저 멀리에 둔다. 하늘이 인상을 한껏 찡그려 화를 내고 있었다. 낙뢰 줄기가 여럿이었고, 뇌성은 웅장했다.

 

“저는 비가 싫습니다.”

“그 말도 참 여러 번 들었다.”

 

슬며시 창을 올리고 뒷좌석을 살펴본다. 어디 불편할만한 건 없을지, 처량한 이에게 줄만한 건 없을지.

  

몸을 한껏 기울여 바라보니 양옆으로 열리는 구조가 보인다. 안을 살피니 담요와 수건 여러 장, 물이 찰랑대는 보온병이 보였다. 물건들을 꺼내 좌석 위에 올려둔다. 하나같이 상태가 좋다. 서리 단풍이 미리 넣어둔 물건일까.

 

현상의 권역에 들어서며, 강판에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그 날이 떠오를 만한 엄청난 폭우였다. 와이퍼가 열심히 움직여도 시야가 트이지 않는다. 계기판에 붉은 등이 켜졌다. 차량을 기준으로 물의 수위를 나타내는 그림이었다.

 

“속옷까지 홀딱 젖겠어.”

 

겨울비가 조정간을 만지니 몸이 한 차례 붕떴고, 사방에서 튀어 오르는 물보라가 잠잠해졌다. 그제야 주변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지형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작은 폭포와 같았고, 거친 서슬에 깎인 흙더미는 쉼없이 쓸려내려간다. 물살에 떠밀려온 수목들이 아무렇게나 얽혀있다. 뒷일이 자연스레 연상되는 풍경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허물도 알아서 죽지 않겠어요?”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사실, 그럴 일이 없다는 건 이미 둘 다 알고있었다. 허물은 본인이 직접 먹어치우도록 설계되었으니까. 어딘가 태풍의 눈이 있겠지. 우리는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굵은 빗줄기는 온 풍경을 흐리게 만들었기에, 나는 챙겨온 우산을 붙잡았다. 도깨비의 작품은 바위산을 기어오를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겨울비는 도깨비의 우산을 택했다.

 

그가 먼저 문 손잡이를 잡았다. 미리 여밈끈을 풀어두고, 문을 밀며 우산을 펼친다. 나도 같은 방법으로 땅을 밟는다. 사방을 가득 채운 물보라를 느끼며 천천히 바위산을 올라간다. 흙이나 식물이 엉킨 곳은 미끄러웠기에, 드러난 암석들을 골라 밟았다. 넓게 딛는 걸음에 바짓단은 금시에 흠뻑 젖어들었고, 우산은 어깨 어림에만 효용이 있었다. 단정한 맵시가 망가졌으나 괜찮다. 어떤 진창도 결국 현상에 쓸려 씻길 터였다.

 

길을 찾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확연히 잠잠해진 빗발을 따라 걸으면 되었으니.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도 점차 미약해졌다. 폭우는 그렇게 봄날의 첫비가 되었다. 먼저 산을 오르던 겨울비는 어느 바위 틈 앞에 멈춰서있었고, 그의 주변에서는 바람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근처에 동굴이 있다.

 

그가 발원지를 찾았나? 한결 여유로워진 산행에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그에게 다가간다. 마침 적당한 이름이 떠오른 참이었다.

 

“단비, 어떻습니까?”

 

뜻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시선을 한 곳에 둔다. 바위 아래에 조그만 틈이 있었다. 바람이 맴돌고 있었으며, 빗물은 구멍으로 흘러들었다. 바닥에 부딪힌 물방울이 깨지는 소리가 비어있는 공간을 따라 울린다. 가늘고 길게 이어지는 물소리에 나와 그가 서로 마주본다.

 

“꽤 쌓였겠네요.”

“아마도.”

 

몸을 한 층 가볍게 여긴다. 그를 위해 행동을 머리보다 앞세운다. 이는 낙오자들의 방식이며, 육체를 기억하는 의식의 한계였다. 우리는 좁은 틈으로 몸을 넣었다. 한 사람은 여유롭고, 두 사람은 비좁은 넓이다. 그도 잠시, 가파른 경사의 입구를 지나니 널찍한 동공이 나왔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렴풋한 윤곽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가 희미한 빛을 바라보고 있을 때, 겨울비는 나보다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에겐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다. 밖과 안을 번갈아보며, 홍채가 변화하는 감각을 선명하게 만든다. 경험을 앞세워 상상에 살을 붙이니, 내 동공도 어느덧 그처럼 팽창되어 빛의 주검으로 연명할 수 있게 된다.

 

겨울비는 어둠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장한 내 모습이 기꺼운지, 새로운 낙오자를 만날 때와 비슷한 표정이다. 그런 겨울비의 뒤로는 희미하게 점등하는 허물들이 있었다. 오래된 종유석들 사이, 고치에 매달린 얇은 피막 안쪽에서 붉은 빛이 흘러나온다. 짧은 맥동 주기, 다소 검붉은 빛깔. 현상의 주인은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현상은 적합자가 낙오자로 전환되는 과정을 총칭한다. 그렇다면, 현상은 얼마나 오래된 규칙일까. 체류지의 역사에는 수많은 기록들이 쌓였으나, 우리는 그로부터 기준을 알아내지 못했다. 누군가의 삶 전체를 수치로 나타내는 것이 가능할 리 없었으니까. 혹여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세계의 의도를 해석하기란 요원한 일이기도 했다. 갇힌 눈은 바깥을 보지 못하니, 체류지의 학문이 세상을 번역하기를 포기한 이유였다.

 

이후로, 우리는 처음처럼 직관에 의존했다.

 

허락된 계층 안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누려라. 다만, 체류지는 그 너머와 가장 가까우리라. 현상과 전이의 연관성이나, 과정 중 간혹 시공간이 분리되는 상황들이 가설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렇기에 가끔, 우리는 체류지를 다르게 부르고는 했다.

 

‘세상의 끝.’

 

이렇듯, 허물을 마주한 나는 벚꽃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현상이 숨을 내쉴 때, 허물은 빛을 발했다. 얇은 피막 너머로 실루엣이 보인다. 얇고 긴 팔다리, 길쭉한 머리와 짧은 몸통, 끝으로 다가오는 자가 상상하던 분노는 그러했다. 사람과 먼 형상을 확인하며, 나는 품 안에서 금속 막대기를 꺼냈다. 엄지와 소지를 벌려 양 끝의 걸쇠를 푼다. 펼쳐진 봉의 길이는 168cm, 이는 푸른 꽃잎의 신장과 동일했다.

 

“처음은 같이하지.”

“제가 상반신을 보죠.”

 

우리는 양옆으로 갈라졌다. 겨울비의 소태도가 검집을 긁었고, 나는 봉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일정한 박자를 유지하며 눈을 감는다. 옅은 명암만 남아있던 시야가 암전되고, 내가 만든 진동을 시각적으로 상상한다. 어두운 공간을 울리는 파동, 박자는 점차 빨라진다. 그렇게 적절한 강도가 되었을 때에, 나는 그를 내 심박으로 삼았다.

 

눈을 부릅뜬다. 온 몸을 타고 흐르는 혈류가 거칠다. 시선은 목표 주변을 흐릿하게 처리했으며, 봉을 휘감은 손은 단단했다. 봉 끝이 긴 곡선을 그린다.

 

가죽을 두드리는 먹먹함과 곧바로 이어지는 살을 찢어발기는 감각. 피막은 가볍게 찢어냈고, 웅크려 있던 놈은 서서히 눈을 뜨고 있었다. 붉은 눈자위가 아직 뿌옇게 물들어있다. 엄지와 검지를 살짝 당겨 봉을 거둔다. 손바닥을 타고 미끄러지는 봉을 놈과 직각이 되도록 고쳐잡는다. 내 심장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웠고, 시야는 붉게 물들었다.

 

예열이 너무 과했을까? 괜찮다. 아무렴, 화끈하기는 할 테니.

 

“가겠습니다.”

 

굉음이 터진다. 벽면을 타고 전해지는 울림은 서로 맞닿아 더욱 크게 변모한다. 공격은 겨울비에게 신호가 되었으며, 허물들에게는 기다림이 끝났음을 알렸다.

 

머리를 울리는 이명과 들끓는 피에 적응하며, 잠시 어긋난 초점을 원래대로 되돌린다. 피막 속의 허물은 가루가 되어 휘날리고 있다. 감정은 형상을 빚어도 이렇듯 공허하다. 붉은 명암으로 이루어진 동굴, 깊은 곳에 매달린 허물이 피막을 찢는 모습이 보인다. 놈들이 나와 같은 바닥을 밟는다.

 

신장은 대략 230cm, 하체의 비율은 70% 남짓, 팔의 길이는 다리와 동일. 봉 끝으로 전달되었던 느낌은 경도는 높고 탄력은 없었다. 효율적인 공격법은 점 타격, 무기는 할 수 있는 한 길게 잡는다. 분노에서 비롯한 허물은 피아를 구분하는 능력이 적으니 난전은 피해야한다.

 

서로의 거리가 멀어진다면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었으니, 왼쪽 시선만을 돌려 겨울비를 바라본다. 오른쪽 눈은 내게 다가오는 허물을 본다. 더욱 많아진 정보량에 지긋한 두통이 밀려온다.

 

공격 간격이 짧은 겨울비가 먼저 직선으로 나아간다. 자세를 낮춰 파고들며 소태도로 발목을 잘라낸다. 몸과 떨어진 부위는 가루로 흩날렸으며, 균형을 잃은 녀석은 한 손으로 땅을 짚었다. 이어서 땅을 딛은 손목에 반동을 주며 남은 손을 한껏 위로 치켜든다. 

 

그동안, 내 쪽의 허물도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나는 벽에 가까이 붙은 상태로 거리를 좁혔다. 왼손으로 각도를 잡고, 오른손은 끝을 받친다. 몸통에 내질러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왼발을 내딛으며 힘을 전달할 때였다.

 

겨울비가 검을 쥔 쪽의 하박에서 얇은 침을 꺼내는 게 보였다. 곧이어 한 줄기 빛살이 허물의 턱을 관통해 후두부로 빠져나가니, 곧바로 놈이 허물어진다. 바닥면을 따라 움직이다 다시금 솟구치는 참격은 한 호흡 뒤에야 따라왔다.

 

‘머리.’

 

왼손을 급히 안쪽으로 당겨 타격점을 놈의 발등으로 향한다. 맞지 않아도 좋았다. 내게 반동을 주면 된다. 봉은 놈의 엄지발가락을 뭉개며 내 몸을 허공으로 띄워냈다. 놈은 갑자기 제 가슴으로 들어온 내게 손을 맞부딪혀 공격하려든다.

 

봉을 잡은 손을 축으로 몸을 돌린다. 한껏 비틀어지는 손목과 빙글빙글 돌아가는 시야 속에서 놈의 머리를 찾는다. 그 모든 과정 속을 지나며, 손목을 고정하여 회전력을 허리로 전달한다. 근육을 쥐어짜내며 힘을 이동시키는 곳은 다리, 발뒤꿈치는 어느새 놈의 정수리에 당도했다. 조준점 변경은 끝났다. 순간적으로 힘을 실어 발목을 단단히 고정한다.

 

곧, 두꺼운 석고를 치는 듯한 충격과 함께 뇌리를 관통하는 통증이 밀려든다. 피부와 뼈로 느낀 분노는 화끈하고도 알싸하다. 허물의 머리는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비산했다.

 

“머리군.”

 

겨울비의 전언은 그 뒤에야 들려왔다. 그토록 찰나였고, 순간적인 집중은 모든 변화를 쪼개어 체감했기에 약간의 탈력감을 남겼다. 달궈진 피부 위로, 서늘하고 습한 바람이 스치고 있다. 허물의 첫 만남은 항상 이러했다. 늘 새롭기에 어려웠고, 그건 체류지에서의 가장 큰 자극 중 하나였다.

 

“무운을 빌지.”

“겨울비도요.”

 

이번 허물의 파악이 끝났기에, 겨울비는 동굴을 되돌아나갔다. 그는 껍데기의 접근을 확인해야했다. 근래에 슬슬 개체 수가 고갈되었는지, 나로서는 몇 번 마주하지 못한 편린이기도 했다. 납혼당을 거치지 못하고 나아간 낙오자의 이물, 우리는 그것을 껍데기라 불렀다. 내가 먼 발치에서 느낀 바로는 허물의 연장선에 가까운 존재였다.

 

등을 보이는 겨울비의 그림자 위에 선다. 남은 허물들이 몰려오고 있었기에, 나는 출구를 막아설 필요가 있었다. 몇 마리나 될까. 분노의 울음 소리는 깊은 곳에서도 전해졌기에, 꽤 오랜 전투가 될지도 모른다. 수많은 상념을 끌어와, 과열된 몸과 머리를 가라앉히는 동시에 봉을 조금 가볍게 잡는다. 약점이 정면에 노출되어 있으니, 과한 힘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적당한 열감을 유지하고, 귓속에서 울리는 맥박을 전우로 삼는다. 시야는 아직 붉었다. 하지만 문제없다. 낙오자의 육신은 의식으로 유지되니까. 그러니, 단지 내가 흥분했을 뿐이다. 사선이 선사할 감흥이 그리 기대되었을까? 어쩌면 단순한 놀이로 치부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봉 끝을 놈들에게 겨누면서도, 나는 여전히 내가 의심스러웠다.

 

발끝이 땅에서 떨어진다. 뜀박질의 마지막 순간, 발가락에 힘을 주어 쏘아진다. 봉은 최대한 곧게 뻗어 다음 동작이 유연하도록 대비한다. 한 놈, 두 놈. 작살을 쏘듯 찔러 머리를 터트린다. 힘의 정도를 정확하게 맞추니, 피로 물든 시계도 점차 무채색으로 물들어갔다.

 

좁은 통로를 점차 거슬러 오른다. 성난 허물들이 몰려오고 있다. 각 허물은 하나의 분노를 말했으니, 나는 그들이 평범한 군중임을 알고 있었다. 번들거리는 눈빛은 있으나 울음에는 의미가 없었기에, 나는 이 끝에 무엇이 있을지 예상이 갔다.

 

허물들의 간격이 점점 좁아진다. 일렬로 통로를 걷는 그들은 검붉은 맥박과 함께 위아래로 출렁였다. 그래, 분노의 대상은 뛰는 법이 없다. 마주한 사람만 발을 구를 뿐이다. 그러니, 내가 그보다 앞서 걸음을 엮는다. 사뿐히 뛰어올라 딛을 곳에 족적을 찍고, 또 한번 쏘아져 같은 선상의 머리들을 부순다. 이곳부터는 햇빛이 들지 않아, 내가 들이키는 빛은 온통 붉었다.

 

마치, 새빨간 파도가 밀려오는 듯했다. 그에 몸을 끊임없이 움직인다. 역설적으로, 의식이 점차 가라앉는 걸 느낀다.

 

얼마나 머리를 부쉈지? 통로는 점점 넓어져, 언제부턴가 나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때로는 찰나의 선을 찾아내 몇 걸음 나아갔으나, 밀려오는 군중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집단에 숨은 개인은 흐름에 휩쓸려 자아를 잃는다.

 

강한 한 방이 필요하다. 봉을 한 손으로 잡는다. 손의 위치는 보다 중심에 가까워졌다. 찌르는 공격으로는 힘을 전달하기 어려웠기에, 나는 좀 더 접근하여 봉을 휘둘렀다. 남은 손은 연신 품을 뒤적인다. 이내 금속 막대가 만져진다. 봉의 마지막 단보다 한 단계 작은 크기, 부속이다.

 

뒤로 훌쩍 물러나며 중간 단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비튼다. 그렇게 열린 끝단에 부속을 넣는다. 어떤 부속을 챙겨왔더라. 아니, 그건 중요치 않다. 화력을 위한 무기라는 건 매한가지다. 봉을 다시 두 손으로 잡는다. 걸음은 붉은 파도에 맞추어 물러난다. 그렇게 직선 통로에 놈들이 가득해지고, 한 차례 휘어지는 길을 만날 즈음이었다.

 

그래, 바라던 때가 되었다.

 

시야가 검붉게 물든다. 예열된 몸은 더욱 큰 격류를 감당했기에, 내 고동은 끊김없이 이어져 거대한 이명을 만들었다. 파도를 삼키는 파동이 내 안에 생겨났다. 마음이 행동을 앞서나가, 봉을 피부가 찢어지도록 거칠게 붙잡는다. 급격한 변화에 정신이 몽롱해진다. 나를 일깨울 고통이 필요했기에, 몸을 뒤로 내던졌다. 벽에 맞닿는 충격과 함께, 등판에 박힌 돌이 느껴진다.

 

몸을 관통하는 통증에 온 몸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간다. 그렇게 만들어낸 수많은 감각으로 한 발자국을 딛는다. 땅을 흉폭히도 파고드는 걸음이 완성되고, 운동량에 무게가 더해진다. 아까처럼 허리를 비튼다. 모든 동력을 온전히 전달해야한다. 그렇기에, 근육들은 뼈를 긁는 듯한 통각을 전했다. 어깨가 빠지고 인대가 찢어진다. 대신, 대부분의 노력은 심혈을 기울인만큼 온전되어 봉을 통해 빠져나갔다.

 

반복되는 고통은 의식을 흐렸으나, 또한 수없이 일깨웠다. 그렇기에 끝까지 볼 수 있었다. 회전하는 금속봉이 군중의 첨단에 맞닿는 모습을. 거대한 섬광과 근소한 차이로 따라붙는 진동, 폭발물이 만들어낸 충격파가 밀폐된 공간을 울렸다. 종유석이 빗발치고 석순은 조각나 쏟아진다. 힘을 다한 몸은 벽면에 틀어박혔다. 옷 위를 두드리는 돌조각을 느끼자, 그제야 응어리가 풀린다.

 

개운하다. 마음이 홀로 동하여 귀찮은 뒷일이 좀 생겼지만 겨울비가 마무리 해주겠지. 그의 투덜거림을 상상하면서 기분 좋게 눈을 감는다.

 

 

 

 

눈두덩 위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싱그러운 냄새다. 풀내음이 섞인 빗물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래, 나는 단지 비릿한 향이 싫었을 뿐이다. 향기는 그날의 기억을 한층 선명하게 만들었으니까. 자식된 자로서 잊지는 말아야 하겠으나, 굳이 되새겨 우울하고 싶지도 않았다. 의식이 있음에도 보이는 게 없으니, 생각이 또다시 길어지고 있다.

 

성의를 다하여 쉬는 건 어렵다. 애써보아도 결론은 늘 그랬다. 불가해한 천성이 있다고 이해하자. 언젠가 다시 핑계가 되더라도 말이다.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물방울이 마침 망막에 떨어진다. 이물감보다는 청량감이 더 기꺼웠다. 본래 내 것이라 믿는 기억으로 재구성된 육체는 이렇듯 순수하다. 하면, 몇 분이나 기절해있었을까?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을 거다. 내가 정신을 잃은 상태를 길게 유지했다면, 몸이 아직도 바위틈에 끼어있지 않았을 테니까. 안구 위에 떨어진 빗물이 작은 길을 만들며 흐르니, 흐렸던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진다.

 

“겨울비 씨-.“

 

목소리를 길게 끌며 그를 부른다.

 

“일어났나?”

 

그는 내 위쪽의 나무 위에 누워있었다. 토사물과 함께 쓸려내려 뿌리가 대부분 드러난 활엽수다. 잎맥 끝에 방울진 물방울이 또다시 내 얼굴 위로 떨어진다. 고개를 돌려 이마에 떨어지도록 한다. 얼굴에 흙먼지가 가득한가. 피부에 스민 물이 질척하다.

 

“저 좀 꺼내주실래요?”

“…또 몸까지 날려먹은 모양이지?”

“네, 뭐. 항상 그렇죠.”

 

애석하게도, 몸을 당장 굴릴 수는 없었다. 재구성된 몸의 감각은 그때마다 새롭게 익혀두어야했다. 믿어 의심치 않아 고정된 기억이라도 모든 요소가 매번 똑같을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이럴 때마다 겨울비가 하는 말이 있었지.

 

“둘 중 하나라도 완벽해지라니까. 몸을 통제하는 거나, 기억을 고정하는 거나. 스스로 믿는 육체의 한계가 높아지는 게 제일 좋긴 하겠다만… 하긴, 그런 건 체류지에서 오래 썩은 사람이나 되는 거겠지.”

 

한 마디가 늘어났군. 내가 어떤 사고라도 쳤나?

 

달라진 것이 있나하여 눈을 굴리고 있자니 겨울비가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그가 대수롭지 않은 발길질로 바위를 걷어찬다. 별다른 장비도 없이 거대한 바위에 균열을 만들고 있다. 실로 무식한 몸이다. 이 사람이 믿는 자신은 곰의 자손이라도 되는 걸까? 신기한 생물을 보는 눈빛을 숨기지 않자, 겨울비는 내게 담백한 사실을 말했다.

 

“눈꽃, 너도 쥐어짜낼 때는 사람같아 보이지 않아.”

 

장난을 진실로 받아치다니. 어르신들은 달갑지 않은 농에 인색했다. 특히, 시든 벚꽃이 주는 괴리감은 어쩐지 섬뜩할 때가 많지. 젊음과 늙음이 혼재된 사람들이 주는 감흥은 그렇듯 어려웠다. 소녀의 외견이 아주 오래된 가치관을 말할 때면… 으음, 그 느낌을 어찌 설명할까. 먹을 잃어버린 필사는 감히 지어내지 못할 문장이었다.

 

괘씸한 생각이 들켰을까? 조각난 바윗덩이가 머리쪽으로 튄다. 뇌가 흔들리는 감각, 시야는 잠시 암전되었다 돌아온다. 맞은 부분이 축축해지는 것 같았다. 근육을 조여 혈류를 끊고, 새살이 돋는 장면을 떠올린다. 잠깐 사이에 아물어가는 상처를 보던 그도 내게 농을 던진다.

 

“네가 사람이냐?”

“적당히요.”

 

낙오자다운 대답에 그가 웃는다. 겨울비는 조각난 바윗덩이를 옆으로 치워주었다. 상반신이 노출되자, 그는 나를 힘껏 잡아당겨 꺼내주었다. 바지가 걸레짝이 되어가는 느낌이 사뭇 선명하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니, 지반이 내려앉아 거대한 구멍이 형성된 모습이 보였다.

 

내가 어떤 사고를 쳤을까. 바위와 흙이 내려앉으며 쓸려내려온 수목들을 훑어본다. 가장 안쪽의 어둑하니 깊은 곳, 유난히 튀어나온 부분이 눈에 띈다. 무언가 살아있는 것이 파묻힌 듯,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허물이 남아있을 리는 없었다. 파괴된 지형 덕에 현상의 출구가 밖으로 드러났다 보는 게 옳다.

 

“봤으면 가서 치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몸을 가볍게 푼다. 각 부위의 신체에 자극을 주고, 근섬유의 형태와 상태를 점검한다. 이전의 몸보다 조금 튼튼해졌을까? 미약한 차이라도 그러기를 바란다. 가파른 내리막을 미끄러져 내려간다. 발목과 무릎에 적당한 긴장을 주고, 충격은 최대한 허벅지와 종아리에서 감쇄시킨다. 그런 와중에, 균형을 잡으려 할 때마다 종아리의 근육이 요동친다.

 

바닥으로 내려온다. 아래쪽은 아직 화약의 잔향이 남아있다. 부슬거리는 비가 매캐함을 덮었으나, 쇳내는 미처 가시지 않았다. 혀끝에서 비린 맛이 난다. 부속을 쓰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음을 경험이었다. 번거로움이 즐겁다면 굳이 자중할 필요는 없나. 겨울비는 그저 귀찮은 모양이다만. 버릇처럼 입술을 살짝 깨문다. 텁텁한 흙맛, 손에 빗물을 모아 얼굴을 닦아낸다.

 

쉼없이 꿈틀거리는 흙더미 앞에 선다. 그러고보니 현상의 입구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상징후가 나타난 구역에서 허물을 찾아 제거하고, 동시에 껍데기와의 접촉을 막는다. 새로운 낙오자를 맞이하는 일은 그보다 중요하지는 않았으니까. 허물은 현상의 진행도와 맞추어 생성되기에, 신입의 마중은 자연히 이어지는 일이었을 뿐이었다.

 

체류지에서 보는 현상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오랜만의 호기심이 즐거워, 흙더미를 신나게 양손으로 파낸다. 젖은 흙은 덩어리져 떨어져나갔고, 얼마가지 않아 단단하고 거친 표면이 만져졌다. 무기없이 바위를 부수는 건 못할 짓이다. 나는 오래 묵은 낙오자가 아니니까. 깔끔하게 포기한 뒤 살짝 옆을 파내려간다. 이윽고, 똑같은 돌덩이를 만난다.

 

참으로 크고 둔한 녀석이 반가워 방긋 웃는다.

 

“그래, 부수면 되잖니.”

 

나는 항상 쉽게 가는 법이 없는 친구에게 작별을 고했다.

 

봉이 없어도 방법은 있다. 부속 몇 개 정도는 여분으로 가지고 다니니까. 어디보자, 어떤 걸 넣어놨더라? 코트 안주머니에서 부속을 꺼내 용도를 확인한다. 화력이 높을수록 검은색에 가깝고, 기호는 효과를 알려준다. 색상은 옅은 회색에 기호는 접촉면에 대한 파쇄 효과다. 한데, 짧은 문구가 추가로 적혀있다.

 

‘방어도가 높은 껍데기를 위한 부속, 여러 번 재사용이 가능하다.’

 

한껏 휘날려 적은 필체, 도깨비가 만든 물건들의 특징이다.

 

“아저씨, 요즘은 껍데기가 도통 보이질 않네요.”

 

아쉽기에 되려 다행스러운 일이나, 부속의 안전장치를 제거하며 장인에게 용서를 구했다. 신입을 맞이하는 일에 쓰이는 거니까, 너무 상심하지는 마시기를. 첨단이 뾰족한 부속을 역수로 잡은 채 바위에 강하게 찔러넣는다. 손아귀에 강한 반동이 느껴지고, 바위의 표면에는 거대한 금이 생겨난다.

 

좋아, 반복하자. 그리 되뇌며, 자세를 다잡는 내 눈에 이상한 현상이 비친다. 바위에 일어난 균열에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몸을 뒤로 물린다. 어딘가 고여있는 빗물이 흘러내리는 듯했던 물살은 급속도로 거칠어져, 주변 바닥을 흠뻑 젖게 할 정도로 쏟아진다. 현상이 끝나 공간이 겹치고 있다. 또한, 수압은 끝을 모르고 강해지고 있다. 현상과 체류지가 동화되는 과정은 이질감을 느낄 새 없이 신속하게 이뤄진다.

 

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한 뒤 몇 초나 지났지?

 

굳이 따질 필요 없다. 생각은 이미 한참 느렸으니까. 다급히 결론을 내린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겨울비가 나를 보며 껄껄 웃는 모습이 코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했고,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와 함께 금간 바위가 완전히 부숴져 사방으로 튀어나간다. 등을 때리는 돌조각을 느끼며 몸을 더욱 일깨운다. 한계까지 수축한 근육에 혈관이 파열하고, 강한 힘을 전달 받은 관절은 삐꺽인다.

 

그리도 절박했으나, 겨울비의 웃음은 조금도 잦아들지 않았다.

 

그래, 이미 늦었구나. 숨을 한껏 들이킨다.

 

거친 물결이 몸을 한달음에 집어삼켰다. 힘이 과하게 들어가있던 팔다리는 우스꽝스럽게 휘적이고, 여러 차례 반전되는 시야로는 위아래를 구분할 수 없다. 먹먹한 귀는 쓸데없는 흐름까지 잡아내 머리를 울릴 뿐이다. 상황을 따라갈 수 없다. 호흡이 흔들려 입술 사이로 기포가 새어나간다.

 

헤엄쳐 벗어나기는 요원하다. 그냥 놓아버릴까? 아니, 숨 따위는 쉬지 않아도 문제없다. 벚꽃의 기척이 유난히 흐린 이유가 그곳에 있었지 않나. 내가 겨울비를 따라나선 이유를 상기하자.

 

그들을 닮고 싶지 않았던가. 푸른 꽃잎의 여유와 겨울비의 연륜을, 더 나아가 단풍의 초연함과 벚꽃의 허허로움까지. 닿지 못할 이상은 그만큼 더욱 아름답게 빛났기에, 나는 이전의 생과 다른 선택들을 하고 싶었다.

 

내가 하지 않을 법한 일을 하자.

 

남은 숨을 내뱉는다. 공기방울이 눈 앞을 스쳐 상승한다. 그렇게 하늘과 땅을 가늠했다. 다만, 내가 가야할 곳은 바닥이다. 손과 발로 급류를 거스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온 몸의 근육을 부풀려 가라앉은 뒤, 바닥에 부속을 박아 중심을 잡는다. 부속이 사용되어 바닥이 갈라진다. 남은 손을 틈새에 끼워넣고, 천천히 자세를 잡는다. 몸을 한껏 웅크려 뛰어오를 채비를 마친다.

 

다리를 본다. 허벅지에 수놓아지는 근육의 갈래를 보고, 그를 더욱 크고 단단하게 만든다. 차가운 물 속에서도 달아오르는 피부가 느껴진다. 저항을 줄여 빠져나가자. 압착되어 비틀어지는 근육, 그와 동조해 찢어지는 피부 탓에 물 속에 피가 섞이고 있다.

 

피를 보자 허리가 빳빳하게 서고, 등근육이 파도치듯 일어난다. 그렇게 두 다리를 곧게 편다. 잡고 있던 땅가죽이 벗겨지고, 힘을 못 이긴 검지와 소지의 손톱이 빠져나갔다.

 

포말이 가득한 수면을 뚫고 솟구친다. 공기를 느끼니 자연히 호흡을 몰아쉰다. 희석되어 옅어진 피냄새, 뒤늦게 두 다리를 찢어낸 고통이 몰아쳤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겨울비가 있는 방향을 본다. 내 선택을 기대하는 표정, 그에 이 순간이 조금 즐거워졌다.

 

부속을 쥔 손을 두 발 아래에 둔다. 또다시 피부가 갈라져, 선홍색 혈액이 뿜어진다. 혈향이 더욱 짙어져 물냄새가 완전히 사라졌다. 뭇 낙오자들이 그러했듯, 스스로 가벼이 여겨야 하는 일이다. 그대로 몸을 쏜다. 부속을 쥐고 있던 팔은 반대편으로 뜯겨 날아간다.

 

그림이 완성되었다.

 

부슬거리는 단비가 내려 무지개가 떠오른 하늘, 그 위로 가느다란 붉은 선이 그어졌다.

 

바닥을 쓸며 내려앉는다. 팔 하나가 없어 균형이 무너진 탓이었다. 밀려오는 통증을 하나씩 가라앉힌다. 빠진 손톱은 서서히 자라났고, 우악스럽게 뜯겨나간 팔은 스스로 조여들어 지혈된다. 찢어진 다리는 실타래를 엮듯, 가닥이 서로 뒤섞여 피부를 재건한다.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아 행동의 대가를 치른다. 회복할 게 더는 남아있지 않았으나, 의도한 상흔은 환상통으로 이어졌다.

 

뜯긴 단면을 붙잡은 손이 잘게 떨렸다. 생각보다 여운이 길다. 너무 즉흥적인 결단이었을까. 경험에 갈증을 느껴 진창을 굴렀구나. 바보 같은 짓이다. 모든 과정을 되짚으니, 되려 낙오자같지 않은 일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성공했다는 만족과 괜한 일을 했다는 자책이 공존했다.

 

“눈꽃, 네가 한 일이 어떤 건 줄 아나?”

 

겨울비의 질문이 들려와,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엔 뜯겨나간 신체가 들려있었다. 내 의식이 닿지 않아 핏기가 빠져있었기에, 창백한 팔을 서둘러 단면에 가져다댄다. 뼈를 제 위치에 맞추며 평소의 몸 상태를 떠올린다. 서로 붙잡는 세포들을, 이어지는 감각들을 엮어 원래대로 구성한다.

 

“미친 사람처럼 보일만한 짓이었죠.”

“의도를 묻는 게 아니야. 네가 완성한 감각을 묻는 거지.”

 

붙인 팔을 천천히 움직여 보며 일어선다. 완성한 감각이라. 몸을 사용하는 영역을 확장했을 뿐이다. 단지 찰나의 순간에 최대한 노력했을 뿐, 그 이상으로 특별한 게 있었나? 골똘히 생각해보아도 딱히 다른 점은 없었다. 사람이라면 시도하지 않을 범위까지 나아갔을 뿐이다.

 

“수단을 가리지 않았죠.”

“그래, 목적을 위해 형을 벗어났지. 그건 껍데기의 방식이다.”

 

…껍데기의 방식. 그의 냉정한 말에, 나는 염원하던 내게서 또 한 발자국 멀어진다.

 

“눈꽃, 의미를 찾는 게 그리도 어렵나?”

 

말을 끝맺는 겨울비의 눈길은 아버지를 닮아있었다.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우산을 건넨 뒤 현상이 만들어낸 물길을 따라 내려갔으니, 나는 우두커니 선 채 허공을 떠도는 말을 곱씹었다.

 

“의미라.”

 

현상을 해석하여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가 말했듯, 낙오자들에게는 명확한 목표가 필요했다. 끝에서 비롯하여,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된 존재는 분명 그러했다. 철새로 살아가던 어느날, 스스로를 의심치 못해 추락할 때에도 끝내 울지 않을 터이니. 피가 말라붙은 생명이란 이토록 공허하다.

 

겨울비의 뒷모습을 내려다본다. 과연 그가 찾은 의미는 뭘까. 앞서 포기한 나로서는 감히 닿지 못할 결론이겠지. 그의 처세는 존중하나, 어느 누가 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한사코 믿는다하여도 결국 진실이 되지는 않을 터였다.

 

‘서로의 옛을 묻지 말라.’

 

체류지의 역사가 손수 만들어낸 격언이었으나,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는 떠밀려 도착한 낙원에서마저 도망쳐야할까. 껍데기와 낙오자 중, 무엇이 더 근원에 가까울까. 목적을 위해 형을 벗어났다. 하면, 틀은 결과보다 중요한가? 또다른 질문을 만들어낸 공간을 뒤돌아본다. 내려앉은 동굴은 어느새 잔잔한 호수가 되어있었다.

 

그래, 내가 또 제 꼬리를 물었구나.

 

젖은 머리칼을 툭툭 털어내며 겨울비의 뒤를 따른다. 넘친 물살이 떠내려간 길을 확인하며, 먹구름이 개어가는 하늘을 본다. 뇌리에 똬리를 튼 모든 불온이 그 청명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언젠가, 해답이 생길 날을 고대하며.

 

기암괴석이 뭉쳐있는 지형이 끝나간다. 몇 걸음 더 나아가면 수목이 우거진 산세가 드러나겠지. 겨울비는 이미 초록의 틈새를 비집고 나아갔나. 바위산이라 부를만한 공간이 끊기는 곳, 급격히 꺾이는 비탈 아래. 그곳은 아직도 희미한 빗발이 내리고 있었다. 눈에 확실히 담기지 않았지만, 비의 정취는 느껴져 알 수 있었다. 질척한 흙길에 겨울비의 발자국이 남아있다.

 

그의 걸음을 쫓아간다. 흙을 쓸며 내려간 물길이 선명했기에, 겨울비의 발자국도 그만큼 짙었다. 그렇게 왔던 길 대부분을 다시 되돌아오자, 현상의 여파에 망가진 숲이 보였다. 붙잡을 땅이 깎여 끝내 쓰러졌거나, 몸은 건사했어도 대부분의 잎을 놓친 나무들이 가득하다. 이곳의 비는 아직 확연했다. 하지만 모질지 않은 기세다. 현상은 단비를 남기고 사라졌다.

 

저 앞에 겨울비가 보인다. 바위산 구역이 거의 끝나, 넓은 들판이 시작되는 경계선 어림이었다. 우산을 들고 멀거니 서있는 그의 발치에 한 사람이 누워있다.

 

나뭇잎과 진창 위에 펼쳐진 머리카락은 적빛이 섞인 검정이었다. 눈썹의 색상을 보아하니 본래 타고난 체모가 그랬다. 두꺼운 원단의 티셔츠는 회색, 청바지는 진청색이다. 한 눈에 보아도 질긴 청바지는 곳곳이 찢겨 있었는데, 단면이 꽤나 날카로웠다. 현상에 적대적 인물이 있었을까. 상흔은 현상의 동화와 함께 사라졌을 테니, 관찰만으로 알아낼 방법은 없다.

 

겨울비는 손끝으로 턱을 매만졌다. 몇 가지 단어들을 중얼거렸으나, 북유럽의 몇 국호를 제외한 발음은 한껏 뭉개져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대로 데려갈까요?”

“…깨어나길 기다리지.”

 

그의 말에 좀 더 많은 외관을 살핀다. 여인의 눈가가 잘게 떨리고 있다. 움찔거리는 입술에는 가라앉지 못한 흥분이 엿보였다. 그녀에게 시간이 필요한가. 나는 아직도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펼쳤다. 괜스레 강하게 붙잡고 있었는지, 겉 피막에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여인의 머리맡에 우산을 세운다.

 

그런 나를 뒤로하고, 겨울비는 차량을 세워둔 방향으로 사라진다. 쓸만한 물건들을 가져올 요량이겠지.

 

길게 누운 나무줄기에 기대어 앉는다. 긴장해야할만한 일은 완전히 끝났나. 우거진 수풀 안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잔잔해진 빗줄기가 서로 다른 생명에 떨어지는 소리, 현상이 끝난 뒤에 찾아오는 정취는 이렇듯 낮고 평안하다.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급히 지나온 시간을 돌이킨다. 그렇게 결론이 될 문장 하나를 떠올린다.

 

추적이는 봄비 아래, 지쳐 잠든 그녀의 이름은 단비였다.

 

단비가 깨어나면 어떤 말이 선행되어야 할까. 이제 막 태어난 낙오자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잔뜩 응어리진 감정이 외압에 튀어나가지 않고, 속에서 닳고 닳아 둔감해져, 불사르고 싶던 불온까지 자신의 일부가 될 때까지. 그 쯤은 정돈되어야, 그녀도 온전한 다음을 바라볼 수 있겠지. 세월은 전혀 약이 되지 못하겠으나, 쓴 나날을 삼키다 보면 오늘의 기억도 그리 잿물 같지는 않을 거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시선이 부담스러웠을까. 곤히 잠든 단비가 몸을 뒤척인다. 어깻죽지부터 골반어림까지 길게 찢어진 상의가 보였다.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가 드러나있다. 맞서 싸워 이겼을까. 끝없이 달아나 어설픈 낙원에 도달했을까. 그녀에게 건넬만한 서두들이 늘어나고 있다.

 

단비는 어떤 사람일까. 마을의 대부분은 남성이기에, 나는 그녀가 가져올 새로움이 기대되었다.

 

온연한 자연을 깨트리는 작은 소음, 풀잎이 무언가에 스치고 있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니, 어두운 숲 속을 가로질러 자그마한 등불이 다가오고 있었다. 목을 축일 물은 겉옷 주머니에, 수건 네 장은 옆구리에 끼워놓은 겨울비다. 그가 다가올수록 젖은 땅을 밀어내는 질척한 걸음이 점점 선명해진다.

 

충분히 가까워진 그가 내게 수건 한 장을 내밀었다. 그는 동시에 보온병을 살짝 흔들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음식이 필요할 때는 이미 지난지 오래다. 그는 내가 기대어 있던 나무에 걸터앉았다. 가져온 등불은 적당한 나뭇가지에 걸어둔다. 잠시 등불에 시선을 두니, 그 안에 앉아있는 반딧불이 두 쌍이 나를 마주보았다.

 

“왜 그랬나?”

“흉내라도 내보려고 했습니다.”

“누구 흉내? 설마 벚꽃은 아닐 테고.”

 

그의 입에 담긴 이름에 작게 웃는다. 그래, 그녀를 떠올리기는 했었지. 당장 곁에 앉은 겨울비도 한 순간 스쳐지나갔지 않은가. 다만, 애초에 특정한 대상을 두었던 생각이 아니었다. 시선을 가늠하는 건 언제나 나였으니까.

 

“그냥, 모두를요.”

 

내 말을 들은 겨울비가 내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내 표정을 살핀 그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또 멀리 떠났군.”

 

짧은 문장이 귓속을 울린다. 멀리 떠났다라. 점점 자주 듣는 표현이다. 마을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더욱 멀리있는 사람이 되어간다. 어쩌면 내가 벚꽃을 닮아가는 수단일지 모르지만, 정작 그녀가 내 희미함의 본질을 알아차렸지. 본래는 훨씬 가벼운 울림이었다.

 

비유하자면, 웃지 않는 소녀의 목소리와 같았다.

 

‘그리운가요?’

 

시든 벚꽃의 음성은 그녀의 이름처럼 색이 없었기에, 전해지는 감정 따위는 없었다. 단지, 늘 그랬듯 글자에서 의미를 가늠했을 뿐이었다. 체류지의 경험들이 벚꽃의 한 마디를 자연스레 해석해주었다. 언젠가 서리 단풍이 그랬지. 현상에서 태어난 이라면 이전의 삶 전체를 도구로 써야한다고. 그 말에 감격하여, 그리하면 원래의 쓸모를 찾을 수 있을 거라던 잿불의 대답도 아직 선하기만 했다.

 

그때를 회상하니, 또다시 체류지의 기억이 밀려온다. 시간을 인지하게 할 빛의 질감, 기척과 말을 잠시 맡아주는 공간, 불완전한 관념을 믿는 인물들. 이곳의 환경은 분명 아름다웠고 기후는 온화했으나, 그 안에 기거하는 생명들은 하나같이 병들어있었다.

 

어쩐지 닮아있지 않는가.

 

애써 일구어낸 낙원마저 삶의 연장에 불과하다면, 체류지의 역사는 무엇이라 불러야할까. 조금씩 움직임이 커지는 단비를 보면서도, 나는 가장 오래된 옛이 그립기만 했다.

 

그녀가 깨어나면 나는 늘 하던 말을 하겠지. 새로운 이름을 알려주고,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희미하게 여기라 할 터다. 그들을 앞서 인도할 나는 정작 반대로 가면서도 앞에서는 나를 믿으라한다.

 

그리운 세상처럼 한없이 추하구나.

 

깨달았어도 움직이지 않는다. 배웠으나 실천하지 않는다.

지식된 자는 침묵하여 품위를 지키겠으나 지키려한 가치는 되려 실추된다.

 

“당신의 이름은 단비입니다.”

 

몸을 뒤척이며 주변을 확인하던 그녀가 내 말을 듣고서야 경직된다. 이윽고 살짝 열려있던 눈꺼풀이 들리니, 그녀의 녹안이 드러난다. 흰자위의 일부는 충혈되어있었다.

 

“이제 그만 갑시다.”

 

단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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