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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13

3. 끝내 모를 일들
“착각이 아니군?” “그렇다니까요.” 가장 먼 풍경이 선명한, 그만큼 작은 행성. 마른 땅과 죽은 잔디 위에 대자로 뻗은 중년 남자와 젊은 여성이 연달아 말했다. 그들의 차림새는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덩치 큰 남자는 펑퍼짐한 로브를 둘렀고, 온몸에 오밀조밀한 근육이 들어찬 여자는 몸의 굴곡을 완전히 드러낸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달라붙는 레깅스와 크롭티를 입은 그녀는 복부에 사선으로 길쭉한 흉터가 있었는데, 마치 거친 날로 찢어낸 창상처럼 보였다. 그들은 하늘을 지속적으로 살피고 있었는데, 허공에는 수백만 개의 바윗덩어리들이 점멸하고 있었다. 천천히 추락하는 바위들을 보며 몸을 풀던 그녀는 허리를 튕기며 단번에 일어섰고, 남자는 땅에 맞닿은 손에 힘을 주어 몸을 들었다. 남자는 그 큰몸을 가볍게 들었고.. 2023. 1. 13.
2. 갈림길 귀퉁이
두피를 따라 전류가 흐른다. 몸의 잔털들이 파도치듯 일어나고 남은 포말은 피를 끓게 만들었다. 심장의 고동이 풍경이 전하는 소리보다 더욱 크게 들리기 시작하니, 나는 다른 감각을 불러오기 위해 손에 쥐고 있던 쇳덩어리를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얇은 살가죽에 한기가 감돌았다. 무기물에게서 빌려온 일말의 냉정으로 숨을 길게 들이쉰다. 필요 이상으로 긴장된 근육을 달래야했다. 청각에 날을 세운 상태를 유지하며, 느린 걸음으로 경계 초소를 벗어난다. 전투화 밑창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다. 어설픈 돌계단은 없었다. 사람들이 오가며 다져진 산길이 있을 뿐이다. 한낱 꿈인가. 분리된 시간인가. 서늘한 바람이 지표면을 따라 불어온다. 드러난 목덜미가 추위를 받아들였다. 몸이 잘게 떨린다. 내 상태를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2023. 1. 13.
1. 달아나 닿은 낙원
오래도록 이어지던 일과가 오늘을 기하여 마무리되었다. 전역을 앞둔 며칠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으나, 머릿속에 남은 말과 장면은 꽤나 많은 편이었다. 어느 바람이 불었는지 내 마지막 석식을 함께한 행정보급관. 퇴근 중에 슬그머니 다가와 혹시 숨겨둔 탄피 없냐며 묻던 중대장. 그래도 네 마지막을 두 눈으로 보는 건 자신 뿐이라고 말하던 포술부사관. 동기 한 명 없는 군생활, 그래서 더욱 마음이 쓰였던 내 어리숙한 후임들. 모든 인연이 살포시 닿은 뒤 흘러내려가 각자의 이별을 완성하고 있었다. 그래, 끝내 길동무가 될 사람은 없다. 애써 무리를 지어도 결국 끈없는 연에 불과한 신세였으니, 마지막은 처음처럼 외로우리. 강원도의 거친 산세에 땅거미가 내려앉는 모습을 바라보며 담배를 입에 문다. 가지고 온 한 보.. 2023. 1. 13.
엉겨붙은 허물
어느새 버릇이 되어버린 듯, 나는 이렇게 습관처럼 첫 날을 상상하고는 했다. 설명하기 힘든 허전함이 가시지 않아 그랬을지, 아니면 항상 가시를 세웠던 그녀가 못내 그리운 탓일지는 확실치 않았다. 아마, 그녀도 지금의 나처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었을지 모른다. 단절된 공감을 시사하듯, 물병에 꽃아둔 푸른 꽃잎을 손끝으로 쓰다듬는다. "한 번 쯤 만나고 싶네." 내가 준비도 없이 떠나보낸, 두 번째 인연이었으니까. 언제나와 같은 오늘을 셈하며, 주인을 떠나보낸 침상은 여전히 쓸쓸한 온기로 가득하다. 한 자리를 맴도는 체취는 한결같으니 이번 아침도 별 다른 일이 없겠지. 끝을 기다리는 자들 뿐인 낙오자들의 마을에서는 더더욱 그럴 터였다. 무언가 거북한 활기, 이미 지나간 옛을 탐하고픈 뒤틀린 .. 2022. 7. 13.
맴도는 것들
현실에 주인공은 없다. 늘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문장이라 여겼다. 빛나는 시절은 있겠으나, 결국 영원은 없을 테니까. 불안과 위안 사이를 걸으며 약간의 행복에 기대어 살아간다. 다만 이제야 되짚어 떠올리기에, 너무 급히 완결한 가치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영원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고리타분한 생각 끝에 옅은 한숨을 뱉는다. 그로부터 바람이 낮게 일어난다. 흐름은 지표면의 굴곡을 따라 굽이치고, 풀들은 일제히 휘청거렸다. 미약하게 남은 우울을 쓸어내던 풍랑이 허공으로 떠오르니, 시선은 기류를 따라서 멀어진다. 희미해진 기류 뒤편으로 푸른 달이 보인다. 달빛 사이에 숨은 온화함은 갈라진 마음을 또 한 번 긁어냈기에, 나는 발을 움직여 휘영청 떠오른 빛을 .. 2022. 4. 10.
주변을 보다 (2)
흙내음이 난다. 한기가 피부를 오르고, 불에 달군 돌이 점차 식어간다. 생전 처음 보는 문자가 모든 시선을 가져갔다. 머무르고, 주저 앉고, 흐르는 동시에 가로 막힌 기묘한 형태의 글자가 사방에 가득하다. 작은 등불을 곁에 두고, 손으로 짚어가며 글을 읽는 이는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존재였다. 단단한 흙벽에서 서늘함이 스며나오고, 그가 들고 있는 석판을 더 차갑게 만든다. “이 위치는...” 석판의 뒤에 숫자를 새기고, 어질러진 방을 가로질러 침상 위의 배낭에서 지도를 꺼낸다. 베두로페에서 펼쳤던 상세한 지도가 아닌, 조잡하고 낡았으나 다른 부분이 있었다. 죽음의 땅 사라노아를 지나, 신드라의 강줄기를 따라 해양으로 향한다. 현재의 지도에는 없는, 둥란이라는 섬이 그려져있다. “항해, 표류, 귀환인가.. 2021. 3. 28.
주변을 보다 (1)
바라지 않았었던,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그런 일이었다. 스스로가 지켜온 지난 시간들이 단 하루만에 무너진다는 것은, 긍정적인 변화라도 본인을 힘들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의식이 돌아왔음에도 눈을 뜨지 못했다. 조용한 방 안을 메운, 영상물의 음향이 가진 미세한 잡음조차 거슬렸다. “눈 좀 뜨지 그래?” 익숙한 목소리, 점점 무뎌질 수밖에 없었던 기이한 감각이 살아났다. 나의 여동생은 나와 닮았다.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자 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남이 될 수는 없었다. 편안해지고 싶었다. 내가 우연히 만났던 다른 사람들도 만남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감정을 쌓고, 덜어낼 이가 필요했었다. 그건 우리가 아닌, 자신을 신인류라고 칭한 모두의 의견이다. 하지만, 우리는 배려를 중시했기.. 2021. 3. 25.
한 걸음 (6)
라텐스는 천을 끌어올려 매듭을 묶었다.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닌지, 미간은 찌푸려진 채였다. “앞으로 며칠간 대기해야 합니까?” 퓌르레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점점 가까워오는 거대한 석재출입구를 올려다보고 난 후, 두둥실 떠오르듯이 말했다. “길어야 나흘...” 라텐스는 그 모습을 보고,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미적인 요소 보다는 사람의 기세를 찍어누르고자 조각된 거대한 석상이 입구의 양 옆에 서있다. 근엄한 표정와 자세로 경직된 것이 아닌, 통로에 창을 겨눈채 눈에 박힌 보석을 계속해서 번쩍인다. "이곳이 그렇게 가치가 있는 곳인가요?" "하하, 그건 나중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라텐스의 표정은 여전했다. 이 상황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별.. 2021. 3. 24.
한 걸음 (5)
눈길은 발끝에 채여 바닥을 굴렀고, 일행의 발길은 자신에게 허락된 시야를 따라 움직였다. 구불구불하게 파인 동굴이 라텐스의 앞을 채웠다. 초기에는 인공적인 형상이 선명했겠지만, 진보의 변화가 아니더라도 기억 이후의 광경은 괴리감의 거체에 따라 비틀어진다. 푸르스름한 등불이 일정한 간격으로 벽면에 매달려있다. 적토는 자신이 마주하지 못한 광채에 저항하는 법을 몰랐고, 이는 영원한 흔적에 질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억세게만 보였던 퓌르레로의 안색 또한 시퍼렇게 물들어 숨통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고, 주머니의 입구를 풀어헤쳤다. 히두는 통로를 가로지르며 허리춤에 매달아 놓았던 장도리를 손으로 옮겼다. 입자가 고운 흙에 묻힌 커다란 바위를 향해 공구를 휘두르자, 맑은 금속음이 얇으나 넓게.. 2021. 3. 23.
한 걸음 (4)
의외로 후덥지근한 기운이 감도는 내부에는 별달리 특별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실외보다 높은 온도가 의문점을 남겼지만, 보이는 풍경은 일상의 하나로 남을 피사체에 불과했다. 모래거미의 줄이 느슨하나 견고하게 벽면에 닿아있고, 손길을 허락한 지 오래된 듯한 농기구에는 먼지만 가득하다. 간혹 설치류에 의해 발생한 소음은 말 그대로 자연의 지저귐과 다름이 없었다. 그늘이 품은 아지랑이의 단말마가 가득하다. 그는 허리를 숙여 손으로 땅을 쓸었다. 부드러운 피부의 겉면을 타고 구르는 고운 입자는 손길에 따라 작은 생명들의 무덤가가 되었다. 그는 입술을 모아 바람을 불었고, 언젠가 다다를 운명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의 몸체가 휘청거렸다. 배낭 속의 잡동사니가 부딪히는 소리가 마중을 재촉하고, 그를 쳐다보던 남성의 .. 2021.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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