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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체
시절 귀퉁이, 나체로 활보할 때가 있었다. 시선에서 벗어나, 없을 때를 기다리고 알지 못하는 곳을 섬세하게 그려본다. 먹먹함을 토해내도, 그것에 먹히지 않을 내가 아무 것도 아니게 될 곳을 그린다. 길게 빼어 든 혀로, 초를 잰다. 이곳은 홀로 있어야 할 장소다. 침해받는 것이 아니라, 없어야 할 곳이다. 너는 절대로 이런 곳을 동경하지 말아라. 정체된 이 순간은 너무 높아 네가 보이기에 몸을 흔들어 없어진 때를 지워가야 하니까. 2020. 12. 4.
추락하는 말
소리를 벼랑에서 밀어내자 파동은 소름 끼치도록 무참히도 일그러졌었다. 너는 죽는 것도 아닐진대 왜 그리 슬피 우느냐고 의문 몇 방울, 저 아래 심연으로 떨어뜨렸다. 메아리는 울림을 잃고 비명은 규칙을 잊으며 아련하게도 깨져나갔다. 물끄러미 서 그 아래를 지켜보는, 나와 같이 2020. 12. 2.
새벽녘
누구나 한 때의 불로 태어났으니, 언제고 다시 피워낼 수 있으리. 이미 잿더미로 뒤덮인 대지 위에서 세상을 처음 만났더라도 내 몸 하나 불사를 것이 남았다면야, 포기할 이유는 없으니 밤을 몰아내는 횃불을 자처해 일렁이는 꽃잎으로 스러져라. 혹시라도, 꿈이 너무 드높아 네가 이미 한 떨기 떨어졌다면 그 다음에는 내가 네 잔재를 긁어모아 또 한 번 피워주겠다. 한사코 삶이 친절하지 못할지라도 결국 아침은 돌아올 테니 그 하루를 되감아 풀어내기를 항상 앎에, 두려워하지 말거라. 2020. 12. 1.
구석
녹아내린 발로 서늘한 바닥을 딛고 한 걸음마다 한숨을 자욱이 쉬며 어느새 어둑하게 그늘진 구석으로 메어오는 목의 끝자락 비명처럼 신뢰성을 잃은 옛이야기처럼 모순된 성정 같이 무엇도 볼 수 없는 그곳이 그리도 따뜻하게 느껴졌었다. 웅크려 앉아 앞을 보면 먼지 사이를 차분히 채워 들어오는 빛이 보이나 가벼운 화상 입을 것을 염려하여 두 무릎을 모아 안아버렸다. 2020. 11. 28.
작은 손
투박하기만 한 손바닥은 네 손등을 덮어줌으로 모든 걸 다한 듯 느꼈다. 황혼이 붉게 타올라 쓰러질 때쯤 눈이 마주칠 때 웃어주는 것 마저 한 폭의 수채화와 같이 추상적인 기억으로 마음 한 켠의 추억으로만 고이 간직 되어질 휑하니 빈 옆자리가 너무도 시려울 어느 여름날 오직 나만이 회상할, 따스한 겨울날의 그 작은 손. 2020. 11. 25.
조각들 (1)
늘어져 끝내 땅에 닿은 탄식은 더 이상 새로운 감정이 되지 못했으니, 나와 단비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깐 있을 고생 역시 불편하기 짝이 없기는 매한가지였기에, 우리는 나름의 계책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시선 끝에 기지국이 들어온 지 몇 초가 지났을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전." "무전기요!" 그럴 듯한 생각은 같은 곳에 닿았으나 감흥의 차이는 여전한 모양이다. 여전히 무상하다는 내 말투가 탐탁지 않았을지, 단비가 또 한 번 볼을 부풀린다. 언제 저걸 한 번 찔러보기는 해야 할 텐데, 그를 이유로 들어 가까워지고 싶지는 않았다. 이 짧은 상념을 통하여 새삼스레, 단비가 내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알아낸다. 어쩌면 내게 그녀가 달콤하게.. 2020. 11. 25.

한 층 두껍게 좀 더 강하게 꼬옥 꼭 눌러 한 껏 무엇을 한 번을 위해 꼬옥 꼭 눌러 좀 더 소중한 작은 널 위해 꼬옥 꼭 눌러 꼭, 만족하길 2020. 11. 24.

세월을 쓸어와 발 아래에 두고 이미 옛적에 죽은 불빛을 켜니 잿더미의 한 켠에 내가 보였다. 아주 조금 젊은, 고작 며칠 전. 앞을 시리도록 비추는 광명 속 지나가버린 후회를 추모하고 가라앉은 위안 안에 운명했다. 이토록 위약을 더욱 드높게 세워내어 살가죽 안에 새겨진 의미를 들춰내니 이는 곧 황혼이 된 지금을 풀이하겠지. 그러니, 우리는 이를 다시 고이 모아서 쌓여갈 뿐인 한탄을 명명하길 반복하여 아득하니 아주 오래도록 죽어갈 뿐이니 이는 결국, 내 삶의 단 한 줄기 빛이니리. 2020. 11. 24.
편지
낡음에 뭉개진 글자가 즐비했으나 나는 좀처럼 읽어낼 수가 없었다. 여림이 자라나, 그 명랑한 이상을 그저 서서히 키워나갈 때였을까. 거친 손길이 이 날을 해칠까 두려워 무심코, 눈물을 짜내어 적셔내었다. 축축이 젖은 글이 번져 지워졌을까. 나는 또 한 번의 편지를 적어내었다. 어느 미래에, 읽을 수 없는 나에게. 2020. 11. 21.
이유
날마다 몸을 일으켜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푸른 여명 아래, 꺾인 발자국이 즐비한 거리 위 녹아내린 밑창에 멈춰 선 우리들을 목격했었다. 어쩌면, 자욱한 꿈결 안에서 눈을 잃지 않았던가. 그리 허망함을 표하여 펜을 잡을 핑계를 대었다. 곧게 편 허리에 제멋대로 휜 손가락이 겹치고 색 바랜 시간을 역하게 느껴, 잉크를 뿌려냈다. 이 활자들은 무엇을 동경하여 이다지도 욕됄까. 어느 날, 여전히 후일이 오기를 바라마지 않을 끝 앞에서 심연을 마주하여도 알지 못할 터였다. 별 이유 없을 황혼을 지새워 그리며, 오늘을 세고 탓함은 언제나 친숙한 것에 있음을 앎에 흐느낀다. 그렇게, 내게는 별 볼 일 없을 하루가 또 다가온다. 2020. 11. 21.
헤아리다
녹슨 추의 바닥에 저울을 가져다 대었다. 어느 때인가, 무죄의 무게에 고개를 숙인 저지르지 않은 잘못에 마음을 졸이던 날 그 하루의 끝이 아닌 시작을 바랐던 나를 언젠가 올 때, 엮지 못한 손가락을 세우며 새기지 않은 약속에 온 기대를 보내던 날 그 하루의 맺음이 아닌 영원을 바란 나를 옛적에 한쪽으로 기울어진 애꾸의 눈물은 낯익은 꿈결에 파묻혀 당연히 여겨질 테니 그 착각의 깨우침이 아닌 우매함을 바라며 헤아림을 포기할 수 있는 법을 헤매이며 바닥에 닿은 수많은 추를 받치는 날들을 그렇게 생의 영원이 아닌 맺음을 바란 나를 저울판의 바닥에 내 살갗을 가져다 뉘이며 없을 날 중, 바람이 멎을 시기를 헤아린다. 2020. 11. 19.
벗꽃
풍파에 비해 한 없이 작았던 내 벗이여. 정처를 잃은 듯, 결심의 어귀에서 서성인 혹여나 재차 회귀하는 궤도 위를 걸었던 멎은 풍경에서 과연 무엇을 투영했었나. 선명한 투명함에 젖어 굴절된 벗이여. 향을 피워 나를 불러내었던 초로의 너를 표피 아래에 묻어둔 채, 맡으며 보고 있어 이미 시들고만 꽃을 내 손등 위에 올리네. 혹시 이 작은 태동이 느껴지는가, 벗이여. 추억으로서 만족하며 지금에 남은 이여. 자네를 떠민 풍도를 타고 다시 왔다네. 그 때에 남겨두었던 한 떨기 내 벗이여. 2020. 1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