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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하기 짝이 없는
짧은 시간으로 여겨졌다.모처럼 화목한 분위기는 충분히 그런 데가 있었다.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자열에 제정신이 돌아온 잿불.물 만난 고기처럼 화제를 바꿔가는 단비.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혈기가 기꺼웠는지 혈색이 밝아진 겨울비와 서리단풍이다.어김없이 상황과 거리를 두고있던 나는 랜드릭의 기척을 느꼈으나, 나머지는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괜찮으십니까?""그럼, 충분하죠. 늙는다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들으라는 듯한 말투, 서리단풍의 눈초리가 랜드릭을 스친다. "벚꽃은?""자료 확인 중입니다." 곧장 다가와 식어버린 찻잔을 매만진 그는 남은 물을 탁상의 화분에 흘려보낸다.주전자를 쥔 손마저 가벼워지자, 그대로 주방으로 향하는 랜드릭이다.잠시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벚꽃이 내 옆에 소리 없이 다가와 있었다.입술.. 2025. 2. 8.
여인과 소년
우두커니 서서 멋대로 자라나는 감정을 삭이는 나를 두고서, 일행들은 각자 제 차림을 확인했다. "그럼 이제 들어가볼까요? 다들 낙오자라는 거 티 내지 마시고요.""사람 비슷하게 생긴 놈들은 시선주지 말고." 벚꽃과 서리단풍을 선두로 다시 도로 위를 걷는다.당초의 예정보다는 느린 속도, 서리단풍의 머릿속 실계획은 애초부터 여유가 있었을까.햇빛에 달궈진 돌 위로 아지랑이가 아른거리고, 우리는 거대한 그늘 안에 들어선다.제 존재감을 과시하던 태양이 손쉽게 가려져, 나는 한 번 더 위를 올려다보았다.정성과 투박함이 함께 맞물려 있는 성벽이 눈에 한가득 들어찬다. 황량하다는 말이 그토록 어울림에도, 서리단풍은 쪽문 앞에서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몇 초를 기다리니 반대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내부의 사회를 어떤 형.. 2025. 2. 8.
무덤
언제나와 같이, 하늘을 곁에 두려 노력하는 수목의 틈새로 광명이 들어차 있었다.체류지로 떠밀려오기 전, 어느 날 상상해보았던 황홀한 장면이었다.작은 근심도 피어날 구석 없이 평온하기만한 풍경 속에서 나는 실타래의 끝을 보려 마을의 중심으로 향했다. 흙먼지 하나 날리지 않는 가벼운 걸음 끝, 납혼당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그에 맞춰 사람들의 면면이 하나씩 드러난다.신기하다는 듯 권총을 만지작거리는 단비, 밤 사이 완성한 무전기를 들고 머리를 긁는 잿불, 날붙이를 하나하나 빛에 비춰보는 서리단풍, 일상복으로 돌아와 흔들의자에 앉아있는 시든 벚꽃까지.같은 목적으로 모인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오합지졸이라 칭해도 반론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저희 무덤에 들어가는 것 맞죠?”“그렇지?”“그런데 왜 이 모양일.. 2024. 10. 13.
계시
꽤나 익숙해진 과정, 허나 결국 체화 되지 못할 일이다. 낙오자의 허물을 정리하는 건 항상 그랬다. 껍데기와 허물의 접촉을 미연에 방지하라. 한 마디로 추려 놓은 사정은 언제 떠올려도 담백하다. 서로 다른 걸음걸이가 같은 물웅덩이를 밟고 지나갔다. 찰박이는 소리의 질감, 밑창에 엉겨 붙어 흩뿌려지는 물방울, 후에 남는 다발적인 파문. 닮아 있는 점은 조금도 없었다. 동일한 부분은 수면에 비친 짙푸른 풍경 뿐으로, 밀려나는 먹구름이 선명했다. 현상의 여파도 확연히 잦아들고 있었다. 겨울비의 안내를 따라 걸어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기분 탓인지, 그녀의 거동이 다소 불편해 보였다. 왼팔은 반대 팔을 붙잡아 상반신을 감싸고 있다. 또한, 보폭은 다리길이에 비해 너무 좁다. 그리고 길게 찢어진 등을 보고.. 2024. 10. 13.

빛이 떨어지는 날에, 정녕 두려움을 느껴야 했을까. 여명과 맞닿으려는 황혼의 발자취를 따라가며저 뒷모습이 언젠간 온 시야를 채울 것이라고그리 믿어 의심치 못한 시절이 알리지 않던가. 우리들의 태양은 각자 다른 위상에 있기에근원마저 허망한 귀퉁이로 돌아갈 것이라고. 그 누군가, 제 희망 앞에 주검을 남겨놓았던 그가그리도 처절히 우리에게 죽음을 부르짖지 않았던가. 마지막이 무색하게도, 우리에게 안식이 될 끝은 없겠으니빛이 방울져 떨어질 날에 앞서 고요와 평안을 찾아 놓아야 할까. 이 역시 허망하여, 옛날을 되새겨 이미 눈이 멀었을 테니결국 내 안에 자리한 반딧불에 의존해 나아갈 따름이다. 그러니 이미 지나쳐버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자.한참 전에 스러진, 고작 한 걸음 앞을 밝히지 못할 희.. 2024. 9. 24.
꿈에
애써 잊은 당신을 보았다.아니, 당신을 보았다는 사람을 만났다.하여, 스물 어귀에 묻어둔 당신이 선명해졌다. 방향을 잃어가던 날들의 연속이었다.설렘이 불온이 될 때마다 당신을 삭여내었고이상 끝의 현실을 마주할 때는 당신이 밉기도 했다.하여, 스물이 멀어질수록 당신을 덜어내자고 다짐했다.그렇듯, 당신은 내게 과분한 마음이라 생각했다. 허나, 늘 그랬듯 끝은 어떠한 시작을 말하니당신의 옛 모습이 오래된 인연으로부터 들려왔다. 운무 속의 정처 없는 걸음과 이슬 맺힌 꽃망울들한껏 번진 흑연 위로 피어난 불규칙한 고동 소리빛바랜 종이와 수없이 닳은 첨단 끝에 매달린 먹물 그렇듯, 당신이 간직한 향수가 내게 밀려와 자연히 감사를 표합니다.어쩌면 정말 가까운 하늘 아래, 함께 밤을 지새웠을 꿈결이여. 2024. 5. 16.
어디에도
고요가 지나치다. 아스라이 남은 목소리와 눈빛, 차분한 웃음 가끔씩 드러나는, 그리움과 달라졌을 흔적마저 모두가 저변 아래에 묻혀 숨을 죽인지 오래다. 한 때는 남겨진 내가 안타까워 울었고 어느 날은 슬피 여기던 이유를 잊어 불안했으며 오늘은 그조차 지나가 덤덤한 삶이 비참할 따름이다. 그래, 익숙함이 지나쳤다. 나는 여전히 처음처럼 목청 높여 울어야 한다. 폐부의 호흡 한줌 남기지 않고 쉼 없이 흐느껴 놓친 것이 언제나 저변 위로 떠오르게 했어야 했다. 그리 뉘우쳐야 지나치지 않을 터다. 홀로 멀리 떠나버린 때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때 그토록 어설프고 미숙하여 놓쳐버린 시절이 음성이 들리는 곳, 시선이 닿는 곳, 서로 마주볼 자리 누군가는 지나치다 말하도록 소중히 간직해 나를 더욱 더 살아가게 만들 .. 2024. 1. 5.
3. 끝내 모를 일들
“착각이 아니군?” “그렇다니까요.” 가장 먼 풍경이 선명한, 그만큼 작은 행성. 마른 땅과 죽은 잔디 위에 대자로 뻗은 중년 남자와 젊은 여성이 연달아 말했다. 그들의 차림새는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덩치 큰 남자는 펑퍼짐한 로브를 둘렀고, 온몸에 오밀조밀한 근육이 들어찬 여자는 몸의 굴곡을 완전히 드러낸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달라붙는 레깅스와 크롭티를 입은 그녀는 복부에 사선으로 길쭉한 흉터가 있었는데, 마치 거친 날로 찢어낸 창상처럼 보였다. 그들은 하늘을 지속적으로 살피고 있었는데, 허공에는 수백만 개의 바윗덩어리들이 점멸하고 있었다. 천천히 추락하는 바위들을 보며 몸을 풀던 그녀는 허리를 튕기며 단번에 일어섰고, 남자는 땅에 맞닿은 손에 힘을 주어 몸을 들었다. 남자는 그 큰몸을 가볍게 들었고.. 2023. 1. 13.
2. 갈림길 귀퉁이
두피를 따라 전류가 흐른다. 몸의 잔털들이 파도치듯 일어나고 남은 포말은 피를 끓게 만들었다. 심장의 고동이 풍경이 전하는 소리보다 더욱 크게 들리기 시작하니, 나는 다른 감각을 불러오기 위해 손에 쥐고 있던 쇳덩어리를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얇은 살가죽에 한기가 감돌았다. 무기물에게서 빌려온 일말의 냉정으로 숨을 길게 들이쉰다. 필요 이상으로 긴장된 근육을 달래야했다. 청각에 날을 세운 상태를 유지하며, 느린 걸음으로 경계 초소를 벗어난다. 전투화 밑창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다. 어설픈 돌계단은 없었다. 사람들이 오가며 다져진 산길이 있을 뿐이다. 한낱 꿈인가. 분리된 시간인가. 서늘한 바람이 지표면을 따라 불어온다. 드러난 목덜미가 추위를 받아들였다. 몸이 잘게 떨린다. 내 상태를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2023.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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