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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유는 없다

2. 갈림길 귀퉁이

by 연안 어귀 2023. 1. 13.

두피를 따라 전류가 흐른다. 몸의 잔털들이 파도치듯 일어나고 남은 포말은 피를 끓게 만들었다. 심장의 고동이 풍경이 전하는 소리보다 더욱 크게 들리기 시작하니, 나는 다른 감각을 불러오기 위해 손에 쥐고 있던 쇳덩어리를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얇은 살가죽에 한기가 감돌았다.

 

무기물에게서 빌려온 일말의 냉정으로 숨을 길게 들이쉰다. 필요 이상으로 긴장된 근육을 달래야했다. 청각에 날을 세운 상태를 유지하며, 느린 걸음으로 경계 초소를 벗어난다. 전투화 밑창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다. 어설픈 돌계단은 없었다. 사람들이 오가며 다져진 산길이 있을 뿐이다.

 

한낱 꿈인가. 분리된 시간인가.

 

서늘한 바람이 지표면을 따라 불어온다. 드러난 목덜미가 추위를 받아들였다. 몸이 잘게 떨린다. 내 상태를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전투복의 깃을 세우고, 이석호의 습관에 맞춰진 총기 멜빵을 내 신체에 맞게 조정한다. 멜빵의 걸쇠를 단단히 고정하면서 비탈 아래를 살피니, 본래 탄약고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월동 물자들만 가득 쌓여있었다.

 

머리가 조금씩 차가워진다. 무의식이 쌓아올린 상상이라기에는 너무 정교하다. 내가 보고 느끼는 모든 일을 현실로 받아들이자.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할까? 빽빽한 침엽수가 우거진 곳 너머, 본청이 있을 터를 바라본다. 잎 사이로 스며드는 가로등 불빛은 희미했고, 희끄무레한 어둠에 잠긴 건물은 익히 알던 모습보다 추레했다.

 

중대 복도 한 켠에 자리한 옛 부대 사진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렇듯 아득한 과거다. 어쩌면 내가 나지 못한 시간일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기필코 가야할 곳이 있다.

 

발길을 돌려 아랫길로 향한다. 그런 내 뒤로 또다시 총성이 들려왔다. 좀처럼 쓰일 일이 없는 연발 사격이었다. 위협 사격은 좋은 징조다. 저곳에 다가가지 않는다면 당장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도로는 반사경이나 적사함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자잘하게 갈라진 곳이 없어 전체적인 모습은 되려 깨끗했다. 그렇게 경계 상태를 유지하며 위병소와 만나는 큰 길로 들어설 때였다.

 

다소 불쾌한 향기에 주변을 살핀다. 다행히 발원지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연대 부지의 중앙 사거리 구석, 좁은 배수로가 만나 넓어지는 지점에 레토나가 거꾸로 박혀있었다. 그래, 이건 진한 휘발유 냄새다. 찌그러진 앞 범퍼에서는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고 현장을 본 즉시 크게 돌아 운전석을 볼 수 있는 위치로 이동한다. 정면의 언덕으로 올라가 얼굴만 내밀어 살핀다. 현 국군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초기형 레토나였다. 탑승한 사람은 개구리 군복, 조수석에는 아무도 없다. 그 외로는 단지 비무장상태라는 부분만 확인되었다.

 

접근해도 좋을까? 나는 탄알집을 분리해 초탄을 빼냈다. 이렇게 공포탄을 제외하면 19발, 제 몸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는 충분했다. 다시 삽탄한다.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가 사뭇 경쾌하다.

 

비탈을 미끄러지듯 내려간 뒤, 낮은 자세로 접근해 문 손잡이를 당겨본다. 역시나 열리지 않는다. 곧장 몸을 일으켜 목표와 사선으로 선다. 깨진 유리창을 개머리판으로 쳐내어 정리하고 손을 넣어 잠금을 해제한다.

 

한달음에 문을 여니 운전자의 계급장이 보인다. 현 국군의 전투복과 다르게 실로 박아놓은 계급장과 이름표. 애석하게도 그는 나와 같은 끝물의 계급이었다. 선탑자는 어디로 갔을까. 조수석 수납장에 선탑자로 추정되는 주기표가 꽃혀있다.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손을 길게 뻗는다.

 

그러다 병장의 시신과 몸이 접촉했을 때였다.

 

[자격을 계승하시겠습니까?]

 

눈 앞에 문장이 떠올랐다. 하던 행동을 멈추고 천천히 물러난다. 더없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웹소설 단행본을 가져온 녀석이 있어, 시간이 남을 때 빌려 읽었던 기억이 있다. 바로 옆에 누워서 진행방식에 대한 비평을 쏟아내니, 요즘 소설들은 세세한 것까지 신경쓰면 오히려 망한다고 답했었지.

 

그렇듯, 다분히 공상적인 소설들이 떠오를 정도로 내게 펼쳐진 광경은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배운 것이 있었다. 본래라면 쓸 일이 없을 지식이겠으나··· 지금만큼은 필요했다.

 

“계승하겠다.”

 

어차피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이라면, 결과를 알 수 없는 기회라도 붙잡아야한다는 입장을 알고 있었다.

 

[죽음 책정 중···]

 

짧은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생되기 시작한다.

 

그는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는 시선 어림에서 당직병의 표식이 보였다. 그는 사관이 보이지 않자 복도를 살펴보았다. 소등하여 어두컴컴한 건물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대던 그는 요의를 느껴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러던 차에 세면대의 거울을 통해 그의 용모가 확인된다.

 

예상한대로. 이건 죽은 병장의 시점이었다.

 

소변을 보며 눈곱을 떼던 그는 뒤편의 칸막이 너머에 무언가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가 사관의 이름을 불러보았고, 이어서 불침번의 이름도 불러보았다. 하지만 어떤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바지를 추스르며 칸막이의 문을 발로 밀었다. 그렇게 마주친 대상은 전투복 혁대에 목을 매단 사람이었다. 창백한 얼굴에 뒤집어진 눈, 이완되어 길게 늘어진 혀가 나타내는 푸른 색감이 내게도 생생했다. 그는 자지러지며 뒷걸음질치다 본인이 변을 보았던 소변기에 주저앉았다.

 

이곳저곳을 마구 더듬던 그는 소변기에서 나오는 물을 맞으며 정신을 차렸다. 바닥을 기어가듯, 어찌보면 허공을 밟듯 사지를 따로 놀리며 상황실로 돌아간다. 손을 바들바들 떨며 지휘통제실에 통신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공황에 빠진 그는 횡설수설하며 밖으로 나와 자신을 도와줄 다른 사람을 찾으려 들었다.

 

그는 가장 가까운 생활관의 문을 거칠게 열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구식 생활관이 모습을 드러내고,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시체를 발견했다. 그는 현실을 벗어나기 시작한 순간에 뒤늦게 떠올렸다. 화장실에 매달린 사람의 얼굴이 낯설었다는 걸.

 

막사를 뛰쳐나온 그는 단지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라며 자신을 다독였다. 출구를 찾겠다며 무작정 발길을 뗀 그는 또다른 재앙을 발견했다. 고지에서 굴러내려가는 두돈반을, 그리고 그 길 끝에 자리한 유류고를 말이다.

 

그는 그때부터 비명을 지르며 할 수 있는 한 멀리, 최대한 멀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순찰을 앞두고 대기시켜놓은 레토나를 발견한 그는 연대 본부로 차를 몰기 시작했고, 도로를 지나며 또다른 참상들을 목격했다. 벼랑 아래에 뒤집혀있는 사오톤, 돌파된 바리게이트가 그대로 남아있는 검문소, 다리없는 민무늬 전투복의 남자··· 그제야 들려오는 거대한 폭발음.

 

본능적으로 본부로 향하면서도 어딘가 빠져나갈 길을 바라던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고, 그 탓에 연대 정문에 설치되어있던 스파이크를 미처 보지 못했다. 곧이어 그의 레토나는 실이 끊어진 연처럼 휘청거리며 도로를 주파했다. 미리 쉬어버린 목으로 쉼없이 브레이크를 밟아보았지만, 구형 레토나는 패드가 이미 마모되어있었다.

 

그게 그의 마지막이었다.

 

[책정 완료.]

[특성 – 아둔한 자를 위한 기회]

본디 스스로 판단하여 피할 수 있는 위협들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효과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레토나 근방의 모든 색이 흑백으로 바뀌었으니까. 마침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차량을 지나쳐 본청으로 올라가는 길을 밟는다. 범퍼에서 솟구치기 시작한 불꽃이 어쩐지 따스했다. 몸을 돌려 반파된 레토나를 바라본다. 개구리 복장 병장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가 체감한 이곳을 한번 더 상기해본다.

 

수많은 죽음이 산재해 있다면 그곳은 지옥인가? 아니다. 내게 그럴만한 죄는 없다. 생각을 끝맺으며 다시금 발길을 재촉한다. 다만, 소총을 붙잡은 손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굳건했다.

 

본청이 가깝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해 건물의 모습도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었다. 공기가 달궈지기 시작하면 이 일대는 안개로 자욱해지겠지. 건물을 천천히 뜯어본다. 사진으로 보았던 구막사와, 내가 오갔었던 신막사가 뒤섞여있었다.

 

‘···한 때의 시절이 아니다.’

 

가야할 곳이 사라졌다.

 

목적을 잃은 나는 잠시 멍하니 서있었다. 해가 점점 떠오르며 주변이 밝아지고 있음에도 한 자리를 고수했다. 그렇게 만물이 선명해지던 순간, 나는 바깥 전체가 색이 바래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렇지. 총성이 잦아든지 꽤 지났구나. 당장 엄폐해야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건물 안은 아직 색감이 남아있다. 전투화로 바닥을 세게 차며 뛰어나간다. 조정간은 단발로 두며, 내부에 있을지도 모르는 위협을 경계한다.

 

각 부처들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누군가 있었다면, 이미 내 발소리를 들었을 테지.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거칠어진 숨을 애써 죽이며 윗층으로 올라간다. 목적을 잃어버린 허탈함과는 별개로, 도달해야할 지점은 여전했다. 각종 시설로 접근할 수 있는 열쇠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미세하게 떨리는 총구는 의심가는 곳을 헤매이며 속내의 불안감을 지향하기를 반복했다. 그리도 계단을 천천히 올라간 나는 몇 가지 선택지를 마주한다. 지휘통제실과 연대장실, 그리고 주임원사실이었다.

 

지휘통제실의 출입문은 기이했다. 훈련 때나 쓸법한 야전 막사의 두껍고 빳빳한 위장색 천으로 가려져있다. 위화감으로 가득한 문을 노려보며 그럴듯한 이야기를 생각해본다. 적어도 희극에는 어울리지 않는 무대다. 확신이 들자, 점차 지통실 쪽의 색이 빠지기 시작한다.

 

나는 폐부에 고여있던 숨을 뱉어냈다. 저곳으로 들어가기 전에 최소한의 보호 장구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연대장실의 문을 살핀다. 기억과 다른 점은 다소 덜어낸 세월 뿐이다. 호흡 한 모금을 길게 들이키며 손잡이를 돌린다.

 

두 눈이 마주친다. 붉은 무궁화 세 개가 그려진 약장, 대령은 가죽 의자에 앉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덜미를 따라 흐르는 피에 전투복이 젖어든 상태다. 주변에 튄 혈흔으로 보아 총상은 아니었다. 조심스레 문을 닫고 사각지대를 확인한 뒤에 시신의 상태를 살핀다. 끈적한 핏물에 엉겨있는 담뱃재, 바닥에 나뒹구는 깨진 재떨이가 보였다.

 

아주 느리게 손을 뻗는다. 그의 턱 끝에 손등을 대어봤지만, 어떤 문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죽음에도 각자의 값이 있다. 이 사람의 이야기는 계승할 수 없다. 관심을 거두고 연대장의 관물대를 살펴본다.

 

역시나 다를까. 전부 신품이었다.

 

조끼에 방탄판을 넣고, 한 치수 큰 방탄모를 한계까지 조여 고정한다. 그 뒤, 자물쇠가 걸려있는 수납장을 개머리판으로 내려치기 시작한다. 기억이 맞다면, 이곳은 비밀문서와 K-5를 보관하던 곳이었다.

 

머지 않아 자물쇠가 뜯겨나간다. 서랍 안에는 분리해놓은 탄창과 K-5, 내게는 하등 쓸모없는 각종 비문들이 있었다. 삽입되어있는 탄은 12발, 전탄이었다. 안전 잠금장치의 위치를 확인한 뒤 탄조끼의 홀스터에 권총을 끼워넣는다.

 

얼추 준비가 끝났다. 그렇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애꿎은 무장들을 매만지고 있으니 초침이 째깍대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와 거슬렸다. 시계를 보니, 이곳의 시각은 자정을 조금 넘긴 때에 멈춰있었다. 나는 그에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완연한 밤이 그곳에 있었다.

 

불가해를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는 널뛰는 마음을 정리하고서 방을 빠져나왔다. 지휘통제실의 입구는 본래의 국방색으로 변경되어있다. 하지만 정말 안전할까? 아둔한 자를 위한 기회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위협을 표시하는 능력에 불과하다. 준비가 끝났을 뿐이지, 완전한 건 아니다.

 

하지만 들어가야한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으니까.  노리쇠를 젖혀 약실을 확인한다. 실탄의 표면이 조명에 반짝인다. 장전된 상태를 확인하고서, 총구를 앞세워 막 한 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생전 처음 맡는 냄새가 났다.

 

안쪽에 있던 무언가가 총열을 잡아당겼고, 버티려던 발은 미끄러져 상체가 속절없이 지통실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렇게 마주한다. 흐릿한 조명 아래로 늘어진 여러구의 시신과 그보다 지독하게 기억될 피비린내, 그리고 내 목덜미로 짓쳐들어오는 대검을 본다. 핏물이 말라붙은 날을 따라 올라가는 시선 끝에는 잔뜩 충혈된 외눈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잠에서 깨어났다.

 

잠깐 사이 눈곱이 엉긴 눈, 흐릿한 시야 속에는 민성이와 석호가 있었다. 여러 번 깨우려 시도했지만 내가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던 건지, 그들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목덜미에서 알싸한 느낌이 나는 것만 같다. 그리 생각하며 목 부분을 만져보았지만, 깃을 세워놓은 전투복만 만져졌다. 방탄을 벗어던지며 일어나 앞을 막는 녀석들에게 비키라는 손짓을 한다. 심장은 터질 듯 뛰고, 온몸이 간지러운 상태에 입을 떼어봐야 목소리가 떨릴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산 뒤편에서 밝아오는 여명이 보였다. 밤이 물러나고 낮이 몸을 일으키고 있다. 나는 탄창을 분리시킨 뒤, 노리쇠를 후퇴고정했다. 약실 속에는 보통탄 한 발이 들어있다. 말없이 검지를 넣어 탄알을 빼내고, 주머니에 넣어놨던 공포탄도 꺼내어 다시 삽탄한다. 탄조끼가 무겁다. 평시의 경계 근무에는 지급되지 않는 방탄판이 들어있었다.

 

마지막 장면을 조심스레 상기한다. 가느다란 핏줄이 모조리 터져버린 단 하나의 안구, 그것의 전체적인 형상은 미처보지 못했다. 다만··· 그 순간의 나는 그것을 사람으로 인지하지 않았다. 소설 속의 괴물이라도 만난 걸까. 아니, 확언하기는 어렵다. 찰나의 경험은 왜곡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죽다 살아난 걸까?

 

그건 알 수 없었다.

 

“전역 전에 푸짐한 똥 한 번쯤 싸고 싶다더니, 공포탄 한 발 숨기려고 한 거야?”

 

내 행동을 쳐다보던 전민성이 물었다. 피로가 쌓일 때마다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기는 했다.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먼저 선수를 쳐주니 되려 편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럴까 싶었는데… 그러면 우리 애들만 고생하잖아.”

 

보통탄 스무 발, 이상없다. 탄창을 재결합한 뒤 석호 쪽으로 돌아서며 조정간을 안전에 둔다. 던진 방탄을 받아들어 착용한 석호가 총을 받아들었고, 나는 그제야 탄조끼를 벗기 시작했다. 방탄판에 대한 사정은 어떻게 말할까. 장난스럽고, 태연한 한 마디가 필요했다.

 

“자, 선물.”

“뭐가?”

 

반문하며 탄조끼를 받아든 석호가 휘청거렸다. 제대로 쓰지 않은 방탄이 앞쪽으로 기운다.

 

“뭘 넣은 거야?”

“쟁여놨던 방탄판.”

 

얼떨떨한 표정으로 방탄을 올려쓴 그는 탄조끼에 들어있는 방탄판을 보고 얼이 빠지고야 말았다. 이승원은 아직 GOP에 투입한 경험이 없기에,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힐끔거렸다.

 

“소초 재산보다 많더라고. 관리하기 귀찮으면 승원이 주던가.”

 

잠시 그런 이승원을 바라보던 석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말년 병장이 물려주는 물건은 좀처럼 거절하기 힘들다는 걸 안다. 적당한 팁을 함께 줘볼까.

 

“아마 행보관한테 줘도 좋아할 걸? 남는 재산은 교환하기 편하거든. 계속 기록할 필요도 없고.”

“그렇습니까?”

 

이석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언젠가, 석호가 병장이 되어 근무 협상할 때 요긴한 패로 쓰이겠지. 그 정도면 충분하다. 좋다, 꿈의 잔여물을 어느 정도 처리했다. 그렇다면… 건빵 주머니에 들어있는 K-5 는 어떻게 해결할까. 투입로를 통해 복귀하고 있는 포술관을 바라보며, 나는 그가 내 휴가백을 열어보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받아.”

 

상황실로 돌아온 우리는 살짝 붉어진 얼굴의 포술관을 마주했다. 이 양반, 설마 한 잔 했나. 인사과장과 술 잔을 기울이는 포술관은 쉽사리 상상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손에 들린 건 내 전역증과 휴가증이었다. 이게 끝이라고? 가만히 선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아침 화상회의 앞에 앉아있던 포술관이 손을 휘저었다.

 

“아침 점호 없으니까 그만 가. 아쉬울 게 뭐 있다고 서있어.”

 

괜한 걱정이었나. 못내 고마운 마음에 각진 경례를 해주자, 그도 방긋 웃으며 정석적인 경례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버티던 힘이 빠져버린 몸을 이끌고 상황실을 나와서 곧바로 계단을 내려간다. 로비는 점호를 준비하는 막내들로 가득했다. 포술관이 본청을 다녀온 뒤 정신이 없는지, 점호에 대해 전달한 사항이 아직 없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주일의 점호는 생활복이었기에 모두 편한차림이었고, 특히나 추위에 약한 인원들은 치수가 큰 검은색 ROKA 패딩에 파묻혀 있었다. 그 사이로 군홧발 소리가 나니 사관이 내려온 줄 알았는지 몇 개의 시선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선은 발끝부터 얼굴로 올라갔고, 끝내 머리에 닿았다.

 

지나치게 화려한 전역모는 마치 왕관처럼 장식되었기에 눈길이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애들아, 점호 없다는데 들어가라.”

 

내 말을 들은 막내 중 한 명이 올라가 민성이를 찾았고, 확인이 끝나자 모든 인원이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텅 빈 현관을 통해 홀가분한 걸음을 딛는다. 중문을 열고, 다음으로 마지막 유리문을 열고 나간다. 바깥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본래는 각자의 생활관에 시체처럼 누워있어야할 병장들이었다.

 

“와, 진짜 동숙이 말대로 우리 보지도 않고 가려하네.”

 

뭐가 그리 부족한지, 담배를 한 번에 두 개비씩 물고 있는 놈들이 틱틱댔다. 가장 뒤쪽에는 굳이 보루째 들고와 한 개비씩 털린 차병호가 허망한듯 벽에 기대어 있었다. 서로 빌리던 담배들이 돌고돌 뿐인데, 저 녀석의 마음은 그보다 단순한 모양이다.

 

“봐서 뭐하려고? 어차피 너희들도 곧인데.”

“오매, 차가워라. 강원도 추위는 혼자 다 타나 봐.”

 

하룻밤 사이 턱에 여드름이 생긴 김동숙이 서운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은 담배 연기를 뭉게뭉게 뿜으며 다가오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맡겨 놓은 거 있냐?”

“그거 말고, 휴대폰.”

 

의도가 보이지 않아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자, 가장 뒤에서 터덜터덜 걸어온 차병호가 대답해주었다.

 

“너 우리들 번호도 저장 안해놨잖아.”

 

그렇기는 했다. 할 말이 있으면 대부분 문자로 했으니까. 나는 그들의 면면을 차례대로 한 명씩 눈에 담았다. 많은 부분들이 달라져있다. 색바랜 생활복 위에 그려놓은 낙서나, 군생활 중 어느 때보다 긴 머리카락들이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끼리 모였을 때는 예전과 같았다.

 

여전히 미숙한 것이 더 많은, 그럼에도 다 컸다는 말을 듣는 스물들이었다.

 

“그래, 번호 좀 줘.”

 

나는 그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넣었다. 뒤늦게 헐레벌떡 따라나온 민성이까지.

 

투입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 해가 훤히 드러났지만, 안개들은 미처 물러나지 못한 이른 아침이었다. 이 시간의 순간들이 자연히 떠오른다. 눈을 뜨자마자 삽과 넉가래를 들고서 제설을 했던 일, 구제역 걸린 멧돼지를 잡아야한다며 순찰을 떠났던 일… 지난 시절을 더듬어보니 가파른 내리막길은 금방 끝났다. 다만, 그렇게 사거리에 도달하자 가장 가까운 기억이 샘솟았다.

 

배수로에 처박혀 타오르는 레토나가 보인다. 감상이 지나쳤다. 솟아오른 감정들을 억누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뜬다. 그러자 아침햇살에 휘감긴 한적한 풍경이 보였다. 그 때의 위치로 천천히 걸어가 주변을 확인한다. 배수로는 멀쩡했다. 다시 정비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과거의 일이 아닌가? 개구리 군복에 구형 레토나…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부분이 있다. 꿈속에서 가치있는 죽음은 무엇일까.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골몰했다. 그 때, 바지 주머니 속에 넣어둔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확인해보니 행보관이었다.

 

“네, 행보관님.”

“통신보안은 어디로 갔냐? 야, 너 아직 민간인 아니고 휴가야. 나가서 재수없이 걸리면 부대에서 대기해야돼.”

 

그의 말에 작은 실소가 터져나왔다. 고작 주의사항 전달하려고 전화까지 한다고?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FM이었다고 확인을 했나. 내게 전화를 걸만한 핑계로 찾은 말은 고작 일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참, 이 사람도 아직 서른 중반이었지. 스물 정도는 아니어도 청년이로군.

 

“그런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어볼 게 좀 있는데요.”

“어? 뭔데?”

 

내가 대화를 이끌어주니 대답이 밝아진다. 평소보다 반응이 부드럽다. 이 양반, 혹시 내가 숨겨둔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사지방 본체 안에 탄피 몇 개 넣어뒀기는 한데…

 

“혹시, 수송대에서 유류고가 폭발한 적 있습니까?”

 

내 질문을 들은 행보관은 긴 침묵을 들려주었다. 나는 그에게 시간을 주려 위병소 쪽으로 천천히 걷는다. 내 주변은 새로운 날을 알리는 새소리로 가득해졌고, 이따금씩 잔잔한 바람결에 맞추어 나뭇잎들이 서로를 쓰다듬었다.

 

“나 임관 전에 그런 일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기는 한데… 박은 게 두돈반이었나, 사오톤이었나. 그런데 그건 왜?”

“아뇨. 예전에 탄약반장님한테 썰로 들었는데, 갑자기 생각나서요.”

 

과거에 있었던 일이다. 수송대의 병장의 반응은 내 처지와 비슷했다. 갑자기 전혀 다른 때에 떨어진 것처럼 끝없이 불안해했다. 하지만 그의 사고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지방 홀수번 본체 있잖습니까.”

“아, 어떤 놈이 훈련 때 집어던져서 전면 패널 부숴진 것들?”

“예, 그것들 기울여보시면 굴러 나오는 게 있을 겁니다. 요긴하게 쓰세요.”

“크… 역시 이선영, 어디… 내가 뽀뽀라도 해줄까!”

“그건 두 딸내미들한테 하시고요. 위병소 다왔으니 저는 이만 끊겠습니다.”

“그래, 집에 조심히 들어가라.”

 

위병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 전역증과 휴가증을 보여준다. 위병조장도 일면식이 있기에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부러운 듯 휴가증을 바라보았지만, 내 전역모에 시선을 뺏겨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다.

 

“이야, 휴가 엄청 쌓으셨네요? GOP를 얼마나 타신 거야.”

“그것도 있고, GP나 OP도 가고. 포상도 꽉 채워서요.”

“연대 에이스는 다르긴 다른가보네요. 잠시만요, 금방 해드릴게.”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린 조장은 휴가증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고생하셨어요.”

 

그가 뒤늦게나마 눈을 마주쳤고, 나는 웃는 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느릿하게, 그리고 진심보다 여유로워 보이게 위병소를 나온다. 얼마되지 않는 사이에 햇빛은 더 뜨거워졌고, 안개는 그보다 더 옅어진 상태였다. 연대 전체가 한 눈에 보인다. 공교롭게도 오늘의 정경은 전입을 왔을 때와 사뭇 닮아있었다. 그러자 시원섭섭한 마음이 서서히 커졌다.

 

‘정말 끝이다.’

 

괜스레 위병소의 인원들에게 목례를 해줄 때였다. 시야 언저리에 익숙한 질감의 잿빛이 보였다. 스스로 착각했다 되뇌면서도, 바깥으로 향했던 고개를 다시 그들에게로 돌린다. 아쉽지만 잘못 보지 않았다. 위병소 부사수의 K1A 는 분명히 흑백으로 물들어있다. 나는 빠르게 총기를 훑어보았고, 연발로 되어있는 조정간과 안전 고리가 없는 방아쇠를 볼 수 있었다.

 

“아저씨, 조정간이요.”

“네? 저요?”

 

아직 적응하지 못하여 흐리게 발음하는 끝음절, 머리를 바짝 깎아놓은 그의 약장은 이등병이었다.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다가온 사수가 부사수의 총을 확인한다. 연발로 되어있는 조정간을 확인한 사수는 곧바로 사선에서 비켜섰다.

 

“손 놔.”

 

사수의 굳은 목소리에 이등병이 총을 놓는다. 조정간을 안전으로 바꾼 사수가 약실을 확인하더니 깊은 숨을 내쉰다. 그의 손이 장전된 공포탄을 빼냈고, 상황을 알아챈 이병은 몸을 잔뜩 움츠렸다. 사수는 본인의 총기에서 안전 고리를 빼내어 부사수의 방아쇠에 걸었다.

 

“너, K1A 사용법 교육 받은 적 없어?”

“그렇습니다…”

 

얼어붙은 후임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화를 내려던 선임은 감정을 삭히며 그의 방탄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래, 그러면 근무동안 내가 알려줄 테니 잘들어.”

 

본인의 위치로 복귀한 사수가 내게 경례했다. 나는 그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그는 손을 내리지 않았다. 가만히 보다보니 뭔가 낯이 익었다. 계속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자 그가 먼저 경위를 말했다.

 

“저 신병 때, 확장 공사 때문에 지원중대에서 두 달인가 지냈었습니다.”

 

이제야 기억난다. 첫 근무를 나와 함께 들어갔던 녀석이었다. 탄약고 내초로 불러들여, 저 아래의 위병소가 네가 앞으로 근무하게 될 곳이라고 말했었다. 그 외의 잡설도 나누기는 했었다만 모든 말이 기억나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그다지 특별한 날이 아니었으니까.

 

“아, 그때 탄약고에서요?”

 

어렴풋한 장면이 기억난 내가 경례를 받아주고서야 그가 밝게 웃음짓는다.

 

“알아보시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건넨 그는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우리들의 눈치를 보던 부사수도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나는 짧은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역시나, 군대에 바람 잘 날은 없었다. 그렇게 끝을 장식하고서 정류장 벤치에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1/10]

 

현실에도 문장이 떠올랐다.

 

낯익은 양식이다. 내용은 열 중 하나, 알 수 없는 횟수가 아홉 번이나 남아있다. 그러니 죽음은 또다시 나를 찾아올 것이다. 끝났다고 판단해 놓아주었던 긴장이 발끝을 타고오른다. 하반신을 따라 음울한 전류가 흐르는 듯했다. 서서히 오르는 심박과 그만큼 솟아오르는 불안을 달래며 주변을 둘러본다. 풍경은 여전했다. 고즈넉한 산세 속에 숨은 막사들과 도로 바깥에 누워 이슬을 맞은 장애물이 눈에 들어온다.

 

늘 그렇듯 죽은 풀과 새싹이 뒤섞인 땅이다. 어느 곳의 어떠한 음영에도 내가 상상하는 불온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 당장 벌어질만한 일은 아니다. 잠시 경직된 몸을 손으로 주물러 풀어내며 생각한다.

 

느닷없이 시작된 셈으로 하여금 무엇을 예상해볼 수 있을까. 고개를 돌려 위병소를 바라본다. 주일의 한적한 낮 시간, 지나다니는 차량이 없자 부사수에게 교육을 시작하는 장면이 보인다. 이제 빛바랜 위험은 보이지 않았다. 가시를 돋친 내면과는 다르게, 단지 내리쬐는 햇살이 따스할 뿐이다.

 

잔잔한 바람과 빛줄기를 느끼니 밤사이 쌓인 피로가 체감된다. 초점은 흐릿하고 의식은 침전해 낮게 흐른다. 천천히 눈을 감는다. 눈꺼풀 너머로 보이는 태양을 느끼며 열 중 하나에 대한 가정을 해본다.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았기에 반짝 떠오른 뒤 침몰하기를 반복했다. 이미 결말을 알고 있었듯이, 해결된 건 조금도 없이 눈을 뜬다.

 

서서히 가까워오는 미세한 진동과 함께 가까워오는 버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높은 고개 끝자락에서부터 내려오는 붉은색 버스는 이슬을 맞고 달려와 환히 빛나고 있었다. 그에 눈을 살짝 찌푸리며 일어났다.

 

꼬리를 무는 생각은 그만두자. 어찌되었든 나는 더 이상 군인이 아니고, 이곳의 일들은 그저 머나먼 한 때로 남겨두어야 한다. 정류장에서 벗어나 모습을 드러내니, 그제야 서서히 멈춰서기 시작한 버스에 다가간다. 연식이 오래되어 거슬리는 엔진 소리, 경고음을 내며 열리는 문짝의 뻑뻑한 소음, 그리고 앞머리가 휑한 아저씨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연달아 듣는다.

 

“오, 군생활 잘했나보네? 모자가 멋져!”

 

인사과장이 주었던 차표를 건네며 웃음으로 응대한다. 버스는 한산했다. 점호를 완전히 생략하고 내려온 덕이었다. 중간 쯤의 자리 내측에 앉아 커튼을 친다. 민성이가 커피 한 병을 주었지만 마실 필요 없었다. 밤의 잔상은 잠을 완전히 몰아내었으니.

 

휴대폰을 꺼내 아버지에게 문자를 남긴다. 현실이 기이해졌더라도 할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자연스레 잊혀지지 않는 꿈과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들은 머리를 계속해서 맴돌았다. 얼굴을 덮은 손, 빛을 가린 커튼. 그 안에서 스스로 빛나는 건 휴대폰 화면 뿐이었다.

 

[지금 버스 탔어요.]

 

아들의 말을 한사코 기다렸는지 문자는 이미 읽혀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우리에게 침묵을 바라는 것마저 전부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숨을 가늘고 길게 이어갔다. 부족한 호흡으로 말미암아, 불안한 마음이 어떤 말도 뱉지 않도록.

 

 

 

 

시원한 아침바람은 산기슭을 따라 굽이치며 풀내음을 가득 실었다. 애써 길렀어도 결국 짧은 머리들을 헝클어본 바람 한 줄기는 다른 만남을 향해 떠난다. 온몸을 다해 기상예보가 틀렸다고 말하는 청명한 하늘, 그 위를 각기 다른 손가락이 가로지른다.

 

병장들의 삿대질이다.  

 

“저저, 저새끼 한 번도 안돌아보는 거 봐라.”

“새끼라니? 우리 동숙이, 이제 선영이 볼 일 없다고 말을 막하네.”

“아니, 틀린 말은 아니지. 낯 뜨겁게 번호도 땄는데 어떻게 한 번을 안 돌아봐.”

“사거리에서 멈췄다가 위병소도 한 번 돌아봤으면 된 거지. 뭐가 더 필요한데?”

“이 위를 봐야지, 이 위를! 우리들의 추억이 가득한 여기를!”

“오, 병호 형은 군생활이 추억이야? 신기하네.”

 

제식을 맞춰 아침을 먹으러 가는 후임들을 배경으로 둔 채, 벼랑처럼 가파른 언덕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선임들이 멀어지는 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 명은 지나가는 막내를 붙잡고 오늘 메뉴를 묻더니 표정이 썩어들어가기도 했다.

 

“어제 먹고 남은 거 좀 있는데. 휴게실 따고 들어가서 데워 먹을까?”

 

피로에 절어있던 전민성이 좋은 의견을 내자, 오징어처럼 널려있던 인원들이 다시 막사로 돌아간다. 넓은 돌에 앉아있던 병장들은 여전히 버스가 사라진 자리를 보고 있었고,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의 동기와 어울려 막사로 향하면서도 계속해서 뒤쪽을 힐끔거렸다.

 

“선영이, 우리들 전역하면 보러 올까?”

“글쎄.”

 

후임들이 물러가 병장들의 속마음이 나오기 시작하니, 식사를 거르는 놈들이 없는지 지켜보던 전민성도 코끝을 씰룩거렸다.

 

전민성은 상황실로 돌아가 당직 교대를 기다렸다. 모든 업무를 마치고 반쯤 기절한 포술관을 구경하다가, 실세 중 막내인 애들이 가져온 피자 한 조각과 치킨 두 조각을 질겅거린다. 선 교대를 해줬으면 좋겠다. 실속없는 바람만 들어차던 때에 포술관의 전화가 울린다.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으며 전화를 받은 포술관은 잠시 어벙한 표정을 보이다, 갑자기 기합이 들어가 벌떡 일어난다.

 

“야, 선영이가 사지방에 숨겨놓은 게 있다는데?”

“네? 뭘 숨겨요?”

“몰라! 그건 안 알려줬대!”

 

사지방 키를 챙긴 포술관은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주파하기 시작했고, 마주친 모든 인원은 그에게 끌려간다. 전민성은 그냥 총기 부속품이나 잃어버렸던 재산이겠지 싶어 밤 사이 질겨진 치킨을 되새김질할 따름이었다. 잠시후, 포술관이 감탄하며 들고온 탄피 여섯 개를 보고 잠이 달아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머리가 유리창에 부딪힌다. 서늘한 기운이 피부를 타고 뼈까지 흘러든다. 그에 천천히 눈을 뜬다. 버스가 몇 번이나 정차했더라? 주변이 꽤나 부산스럽다.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탑승한 모양이다. 민간인들도 이용하는 노선이니 그럴 수 있었다.

 

“이 새끼가 부대 나왔다고 빠져가지고.”

“아이, 형이 나와서는 형동생 하자고 했었잖아.”

“내가 그랬었나? 허헛, 까맣게 잊고 있었네.”

 

선임 쪽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니 들뜬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각자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첫 생각과 다르게 사람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목청이 큰 사람을 바라보았다. 계급은 상병, 한참 자신이 붙었을 때다. 한데, 그 뒤쪽에 앉은 사람이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누구를 닮았는데, 곧바로 떠오를 정도의 개성은 없는 외모다.

 

관심을 끊고,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시작한다. 머리를 울리던 목소리가 조금 작아진다. 그러면 어디쯤 왔을까. 머리가 개운해진만큼 시간이 지나기는 했겠지. 별생각없이 커튼을 걷은 순간, 내 얼굴은 일그러지고 말았다.

 

차량들이 도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전복되어있다. 우그러진 철판, 타오르는 불꽃. 잘려나간 팔다리와 사방에 뿌려진 혈흔이 가감없이 눈에 담긴다. 그래, 악몽은 물러난 적 없었다. 내가 우연히 도망쳤을 뿐이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나는 뒤쪽에 앉은 사람의 인상착의를 면밀히 살폈다. 이곳이 꿈이라면 그 사람이 맞다. 첫 휴가 버스가 전복되어 반년을 병원에 있었던 선임이었다.

 

그를 깨달은 즉시, 버스 전체가 흑백으로 물들었다.

 

머릿속으로 저 사람이 두서없이 풀었던 썰을 정리해본다.

검문소의 바리게이트를 빠르게 통과하려다 균형을 잃은 버스.

몇 차례 휘청이며 균형을 잡으려다 결국 가드레일을 받으며 이탈.

승객들은 전부 신체 건강한 군인들에 충돌 지점과 먼 뒷자리.

부상자는 군인 열넷, 사상자는 벨트를 매지 않은 병장과 운전기사 한 명.

 

마음을 다잡기 위해 다시 밖을 살핀다. 사방에 시체가 널려있다. 그러니 앞으로 벌어질 일도 어차피 허상에 불과하다. 오직 나와 지금에게만 진실이 될 터다. 휴가백 안쪽 깊이 손을 넣어 더듬는다. 차가운 금속이 만져지니 머리가 더욱 식는다. 몸총과 탄창을 결합하며 일어선 나는 천천히 앞쪽으로 걸어갔다. 애초에 운전을 거칠게 하는지, 좌석들을 붙잡으며 움직여도 균형을 잡기 까다로웠다.

 

그 때가 되니 뒤에 있던 군인들도 숨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달라진 분위기에, 손에 들린 권총이 다소 묵직하게 느껴진다. 운전석이 보이는 앞자리에 앉는다. 머리가 하얗게 센 운전기사는 군인들의 잡담소리가 시끄러워 좋아하는 가요가 들리지 않았는지 운행 중임에도 이어폰을 꽃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이어폰 줄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어엇! 씨발, 뭐하는 거야!”

 

가감없이 입에 올린 육두문자를 듣고서 고개를 끄덕인다. 굳이 윤리관에 맞춰가며 행동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탄창이 노출된 부분으로 이마를 가볍게 찍는다. 그가 아무런 책임감도 없이 두 손으로 이마를 가린다. 내쪽에서 발을 들어 핸들을 고정한 채로 명령한다.

 

“차 세워.”

 

거리낄게 없어 한껏 건조해진 목소리였다. 잠금 장치를 풀며 총구를 그에게 들이민다. 그가 부리나케 브레이크를 밟는다. 서서히 줄어드는 속도, 나는 적당한 때에 레버를 조작했다.

 

문이 굉음을 내며 열렸다. 운전기사의 셔츠 깃을 잡아채어 바깥으로 끌고 나간다. 관리도 대충했었는지, 버스는 곳곳에 녹이 슬어있었다. 손에 끌려오는 무게감이 불쾌해 군홧발로 가볍게 민다. 공포에 질려 힘이 풀려있던 그는 몇 발자국 물러나다 도로 위에 주저앉았다.

 

권총 파지법을 교육받은 적은 없었다. 두 팔을 곧게 뻗으며 자세를 잡는다. 하지만 장교들의 사격을 곁눈질로 본 기억은 있었다. 왼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오른손으로 아랫부분을 감싸며 손을 맞잡는다. 이렇게 가까우니 영점을 맞출 필요는 없겠지. 호흡을 조절하며 방아쇠를 당긴다.

 

총성이 사방을 채운다. 논두렁을 따라서, 산기슭을 따라서 지형에 맞게 변질되어 퍼져나간다. 나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숨죽이고 있던 군인들도 놀라 움찔대었다. 기합이 들어간 소수의 몇 놈은 이 와중에도 눈을 번뜩이며 기회를 찾고 있었다. 에이스가 아니면 폐급이 될 상이다.

 

그런가하면, 총성이 익숙지 않은 기사는 결국 소변을 지렸다. 자욱하게 풍겨오는 지린내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가 그를 한층 더 추레한 사람으로 완성한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바닥에 웅크려 부들부들 떨었으나, 사실 나는 그를 보지 않았다.

 

[3/10]

 

앞서 세웠던 가정 중 하나가 맞았음에 기뻐한다. 완전히 찢겨진 타이어, 숫자는 내가 구해낸 목숨의 수였다. 도로의 표면을 타고 흐르는 샛노란 오줌은 바닥을 구르던 탄피를 식혔다. 그러자 실없는 생각이 났다. 이제 저걸 주울 필요는 없다고.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눈을 뜬다. 유리창을 통해 현실의 도심이 보인다. 천천히 눈을 굴려 좀 더 세세히 뜯어본다. 악몽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은 온전한 자의로 마쳤기에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건 그렇고 벌써 다 왔구나. 터미널에 진입하기 시작한 버스 안에서 용모를 일일이 확인해가며 정돈한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기준을 맞춰줄 필요는 있었다.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휴가와 전역을 축하하려 마중나온 사람들이 버스를 반기기 시작한다.

 

나는 굳이 찾지 않았다. 그는 눈에 띄는 편이었으니까. 역시나, 승강장 중앙에 한 치의 티끌도 찾을 수 없는 차림의 아버지가 있다. 편찬이 끝난 책에 실릴만한 완벽한 정장 차림이다. 악몽 속에서 돌아온 직후라 그런가. 어리석게도, 그토록 변함없는 그가 반가웠다.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니 나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던 그도 마주 손을 흔들었다.

 

군대라는 도피처가 끝난 줄 알았건만··· 걸음을 번복해 달아낸 이곳도 어느새 낙원이 되어있었다.

 

버스가 부드럽게 멈추고 휴가를 나온 군인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사람만큼은 올곧게 서있었다. 나이는 어느덧 쉰을 마주하고 있지만 허리는 곧고 눈빛은 날카로웠다. 어머니와의 사별은 그를 분명 강하게 만들었으나, 정작 그녀에게 사랑받던 이유와는 멀어졌다. 그리고 내가 온마음으로 따랐던 아버지와도 담을 쌓았지.

 

하지만 나도 안다. 그는 남은 자식을 책임져야했고, 어린 이선영은 그저 쉽게 미워할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걸. 그저, 서로 고집을 부린 시간이 길어져 아무렇지 않게 풀어내기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탓이다.

 

다른 사람들이 전부 내리고서야 짐을 챙긴다. 뒤를 살피던 기사와 눈이 마주쳐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차하며 그와 눈을 마주친다. 내가 그였다면 어땠을까. 아버지의 위치라면 어땠을까. 아마, 외가의 손을 빌리는 것보다 좋은 선택은 없었을 거다. 그는 충분히 노력했다. 다만, 나는 충분히 자라난 지금도 여전히 그가 미웠다.

 

“오랜만이네요.”

“지난 휴가에 집에 안 들렀으니까.”

“선약이 있었거든요.”

 

대화가 짧게 끊어진다. 익숙한 상황이기에 아버지도 의도를 문제삼지 않았다. 부자는 나란히 걸었다. 두 남자는 걸음걸이가 닮았다. 신장은 아들이 더 컸지만 전체적인 체격은 비슷했고, 둘 중 하나의 얼굴은 되려 여인에 가까웠다. 그 탓에 외가는 나를 만나기 싫어했다. 내 딸을, 내 여동생을 잡아먹고 자란 사람같다는 이유였다.

 

내가 본 어머니의 일생 중 가장 화려했던 장면이 외가가 끼어든 장례식이었으니, 그들끼리 울며 나눈 말은 더욱 선명히 남아있다. 오랜 기억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입술을 강하게 깨물 수 밖에 없었다. 빛을 구분하도록 돕는 그림자, 그게 우리들의 삶이다.

 

주차장 구석의 검정색 세단을 향해 걷는다. 아버지와 항상 붙어있던 운전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예전처럼 뒷좌석에 타려던 나를 막아선 그가 조수석 문을 연다. 그에게 살짝 시선을 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내게 기필코 하려는 말이 있어보였다. 어쩌면, 해야만 하는 통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터미널을 벗어나 올림픽대교를 탄다. 어째서인지 꽤 많은 거리를 운전할 때까지 그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집까지 절반쯤 남았나. 그가 천천히 말문을 연다.

 

“외가에서 찾으신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던 자세 그대로 되묻는다.

 

“왜?”

“못한 말이 있다고 하시더라.”

 

못한 말이라…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감정이라도 참은 적이 있었나. 머리가 크고 나서는 의도적으로 그 집안 피했기에 최근의 태도는 알지 못했다. 그나마 어릴적부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인사를 다닌 여동생은 알고 있는 게 있겠지만… 제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그 녀석은 나보다 더 그녀를 닮아있었다.

 

“나한테 구태여 안한 말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때는 그랬지. 그래도 외할머니도 요즘은 좀 괜찮아지셨다.”

“…언제는 여동생 만날 때마다 여전히 우신다며?”

 

아버지는 그에 대한 변명은 하지 않았다. 운전에 집중하는 척을 하며, 아파트 단지 입구로 들어설 뿐이었다. 그래… 여동생은 어머니를 닮아도 너무 닮아있었다. 외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취향이나 억양마저도…

 

가슴이 미어진다. 옛적에 놓아준 슬픔이 먼 길을 돌아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린다. 나는 입술을 더욱 강하게 깨물었고, 비릿한 향을 머금었다. 조금도 울어선 안된다.

 

“준비되면 찾아가라.”

 

아니, 나는 그쪽에서 어느 것도 받지 않는다. 행여나 아쉬운 소리를 듣지 않도록, 우리의 생이 누군가의 미련에 묻히지 않도록, 씨앗을 새로 심어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꽃을 피워내야한다. 여동생이 벌어준 시간동안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야만 한다.

 

그게 일찍 철이 들어버린 남매가 정한 각자의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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