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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유는 없다

3. 끝내 모를 일들

by 연안 어귀 2023. 1. 13.

“착각이 아니군?”

“그렇다니까요.”

 

가장 먼 풍경이 선명한, 그만큼 작은 행성.

 

마른 땅과 죽은 잔디 위에 대자로 뻗은 중년 남자와 젊은 여성이 연달아 말했다. 그들의 차림새는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덩치 큰 남자는 펑퍼짐한 로브를 둘렀고, 온몸에 오밀조밀한 근육이 들어찬 여자는 몸의 굴곡을 완전히 드러낸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달라붙는 레깅스와 크롭티를 입은 그녀는 복부에 사선으로 길쭉한 흉터가 있었는데, 마치 거친 날로 찢어낸 창상처럼 보였다.

 

그들은 하늘을 지속적으로 살피고 있었는데, 허공에는 수백만 개의 바윗덩어리들이 점멸하고 있었다. 천천히 추락하는 바위들을 보며 몸을 풀던 그녀는 허리를 튕기며 단번에 일어섰고, 남자는 땅에 맞닿은 손에 힘을 주어 몸을 들었다. 남자는 그 큰몸을 가볍게 들었고, 다리마저 아무 소리없이 바닥에 붙여냈다.

 

“어떤 별이 사라진 건지 알겠나?”

“음… 방금 사라진 건 교통사고요.”

“네가 사라졌다 말한 별은 군대라고 하더군.”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청자켓을 입던 그녀가 말했다.

 

“스물 초반 남자? 잘생겼으면 좋겠네요.”

“부사관이나 장교일 수도 있지 않나?”

“자격 있는 사람이 군대에 오래있을 리가요?”

 

중년 남자는 그녀를 착잡하게 바라보다가, 멀지 않은 지평선에서 뛰어오는 인영을 발견하고서 느릿하게 허리를 숙였다. 자켓을 입은 여자가 남자의 옆에 서서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반응을 보아, 달려온 남성은 그녀와 연관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르신, 힘을 아끼시지요. 아직 하셔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새치와 검은 머리가 절반씩 섞인, 환갑을 넘었을 법한 나이의 남자다. 연세가 꽤 차오른 그는 남부럽지 않게 빠른 속도로 뛰어왔음에도 호흡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고, 중년의 남자는 아직도 건재하기만한 그의 건강을 염려했다.

 

“자네, 마침 정했던 별은 없앴나보군. 당장 도움이 필요한 곳이 생겼네.”

 

어르신의 말을 들은 남자가 얼굴을 가린 로브를 걷는다. 굵은 모발이 두꺼운 천과 만나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고, 얼굴을 전부 드러낸 그의 눈은 멀어있었다. 완전히 색을 잃어버린 동공이 기이한 열망으로 번들거린다.

 

“어떤 별입니까?”

 

 

 

 

 

 

 

아버지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준 뒤 곧바로 회사로 떠났다. 혼자있는 집은 빌어먹도록 밝았다. 어느 구석진 자리도 짙은 음영이 없다. 몇 번이고 닦아낸 대리석바닥에 비친 나를 본다. 갈아입지 않은 군복과 쓸데없이 화려하기만한 전역모는 이 집과 어울리지 않았다. 고급스러움을 강조하는 광택, 서로 뽐내어 수없이 산란하는 햇빛.

 

채광조차 좋은 집, 블라인드를 전부 내려버린 나는 그래도 공연히 불편한 마음이 밀려와 방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간다.

 

방은 크기에 비해 가구가 몇 개 없었다. 싱글 침대와 밋밋한 책상, 적당한 의자와 수십 권의 서적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 이정도 물건들은 괜찮다. 전역모를 침대 머리맡에 두고서 옷방으로 향한다. 군대로 도망치기 전의 고등학교 교복 두 벌, 외출복 몇 세트를 제외한 착장품은 없었다. 외가에서 선물해준 시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아버지의 수납장에 뜯지 않은 포장 그대로 넣어놓았다.

 

상의는 ROKA 티셔츠를 그대로 입고, 바지만 적당한 것을 걸쳐 방으로 돌아온다. 그 뒤, 침대수납장을 열어 낡은 랩탑을 꺼낸다. 아직 군인 신분이지만 하루빨리 돈을 벌어둔 곳을 찾아야했다. 세월을 따라간 기계는 운영체제의 로고가 뜨는 기초적인 반응마저 느렸다. 잡을 방도가 없어 하릴없이 흘러가는 시간, 빛에 가까이 다가와 더욱 음울해진 그림자는 숨죽여 울었다.

 

 

수도 없이 문자를 남겨 찾아낸 일거리는 초라했다. 내가 가진 기록은 고등학교 졸업장과 몇 개의 기능사 자격증, 잡다한 공모전의 수상기록, 입학한 대학의 이름 뿐이었다. 나는 아직 누군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군인 신분이라는 걸 밝히니 몸을 다루는 일조차 어려웠다.

 

이런 일당이나 시급으로는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 저녁에 돌아온 여동생을 무표정으로라도 반길 수가 없을 거다. 확연히 다른 업무,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했다. 누구에게 피어난 분노인지, 책상을 강하게 내려친 나는 머리를 감싸안고서 응어리진 감정들을 토해냈다. 찢어진 입술에서 아주 미약한 혈향이 맡아졌다.

 

“…있어.”

 

나만 할 수 있는 일.

확실히 돈이 될법한 일.

 

오랫동안 앉아있던 다리가 저렸으나, 나는 균형을 잡으면서 서둘러 거실로 나갔다. 설움에 복받쳐 가려놓은 세상을 환하게 드러낸다. 대낮에도 다채로운 색을 알려주는 도심, 수많은 차량들과 그보다 많은 군중들. 그 사이를 채우는 수 억개의 빛나는 별들.

 

비루한 삶은 악몽이라도 기회로 삼아야했다. 남은 탄은 열한 발, 내가 가진 초석의 갯수다. 현실의 초라함을 달랠 일 따위를 구할 때가 아니다. 매일밤마다 찾아올 악몽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남길 방법을 구상해야했다.

 

힘있는 걸음과 총기가 살아난 눈으로 다시 어두운 방으로 향한다. 빛을 시기한 그림자는 끝내 더욱 깊은 곳으로 침잠하여, 태양을 비춰낼 물을 퍼올릴 준비를 시작했다.

 

 

 

 

 

조급함이 티가 났을까? 한결같이 따라붙을 뿐인 시선이 오늘따라 부담스럽다. 애써 만든 몸짓과 표정이 무너지려할 때마다 손목에 뿌려둔 향을 맡는다. 그러자 오빠와 나눈 말들이 떠오르며 두근거리던 가슴이 점점 진정된다. 벌써 몇 번째인지… 잠시 눈을 감고서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반복되자 외가에서 고용한 선생들이 걱정스레 물었다.

 

“세화 아가씨, 어디 편찮으십니까?”

 

그들의 신경은 걸어다니는 돈다발인 우리에게 집중되어있었기에, 내 변화를 더 민감하게 느꼈다. 몇 미터 옆에 떨어져 앉은 백하선과 백예화의 시선도 나에게 온다.

 

“오늘 좀 그러네요.”

 

여상한 말투와 고저가 흐릿한 음성으로 답한다. 호흡은 넉넉하게, 하지만 새어나가는 숨이 없도록 발성한다. 나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자의 목소리였다. 검지와 중지를 붙여 뺨에 살포시 대고 소지는 살짝 벌려 바깥을 향하게 한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턱선을 따라 늘어진다. 그녀는 생각이 깊어지면 손을 얼굴 근처에 가져다대고는 했다.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모두 신경써야할 과목도 없으시고, 지난 성적도 많이 좋았으니까요.”

 

가운데에 앉아있던 여자가 우리들에게 묻는다. 한 올 머리카락까지 끌어올려 묶은 머리, 표독하게 일어선 눈꼬리가 장내를 빠르게 훑는다. 그러자 백하선이 피식 웃었다. 그의 행동이 예상이 간다. 그는 집안을 나왔던 여인의 자식에게 끌리는 주목을 부당하게 여겼다. 아마, 갑자기 나타난 같은 또래의 여자가 할머니와 장남의 관심을 가져갔기 때문이겠지.

 

“내가 몇 번을 말하나? 너희들은 선생이 아니라 살아있는 기계라니까… 대체 어떤 기계가 주인을 살펴보고 판단하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찡그린 채 그 위에 손을 얹은 백하선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으르렁거렸다. 건너에 앉아있던 백예화는 듣기 싫다는 듯 이어폰을 낀다. 여자는 나와 백예화의 반응을 살핀 후에 답했다.

 

“도련님, 요즘 기계들은 잡다한 기능이 많답니다. 상태를 보는 것도 저희 업무라서요.”

 

지위의 고하를 새기는 듯한 보다 예의있는 말투, 하지만 살갗 밖에 꺼내둔 뼈가 있다. 그들도 남은 둘의 동조가 없으면 위해가 없다는 걸 아는 탓이다. 그렇듯, 백하선은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실패한 사람이었다. 그의 발언권은 적었다.

 

“그럼 정리하겠습니다. 오늘도 수고많으셨어요.”

 

여자가 박수를 두 번 치자 각자의 성별에 맞춘 세 명의 수행원이 들어온다. 경호원은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일제히 교재와 각종 도구들을 챙기는 수행원, 정돈방식은 요구를 따라 제각기 달랐다. 백예화의 의자까지 빼주는 수행원, 백하선 쪽은 이미 자리를 박차고 나가 보이지 않았다.

 

‘지랄맞은 집구석.’

 

백하선의 수행원이 고개를 숙이며 먼저 물러난다. 아직 의자에 앉아있던 백예화는 그제야 높은 굽을 또각이며 걸어나갔다. 그 뒤를 수행원이 따라나간다. 나는 치마를 끌어모으며 일어섰다.

 

허리와 목은 항상 꼿꼿하게.

얼굴은 한 터럭도 주름지지 않게.

그 모든 행위 중에 타인의 손이 내게 닿지 않게.

어머니가 만든 기본들을 지키며 발을 딛는다.

 

백예화와 같은 높이의 구둣굽이어도 소리가 나지 않게 걷는다. 출입문을 앞두고 느릿하게 눈을 내리깔자 남아있던 선생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살짝 돌려 잠시 그들의 정수리를 바라본다. 몸을 낮춘 여자의 눈꼬리는 그제야 기세를 잃었다.

 

“건방지기는 했어요.”

 

물건을 평하듯 한 마디를 내뱉으며 사라진다. 숨죽여 물러나있던 수행원이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왔다. 내 규칙과 하등 상관없을 수행원, 그녀의 발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언제나 느끼지만… 참 지독한 집안이었다. 이렇게 살았던 어머니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혐오감이 들 정도로.

 

바깥은 서서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영역을 넓혀가는 노을빛, 시간이 좀처럼 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도 어떻게든 버텨냈구나. 품위가 묻어나는 걸음걸이를 유지하는 동시에 남몰래 숨을 깊게 들이켜본다. 먼지와 매연 냄새, 미처 치우지 못한 쓰레기에서 풍기는 희미한 악취. 손목에 남은 향을 더욱 커다랗게 만드는 요소다.

 

수행원이 열어놓은 문에 올라타 앉는다. 다리의 각도, 포개어 올려놓은 손모양을 확인해 교정한다. 이 모든 건 순간의 눈짓만으로 완성된다. 그 뒤 기사의 뒤통수를 본다. 권태로운 눈과 마뜩찮다는 고개의 기움, 그러자 기사 물었다.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집으로.”

“예, 출발하겠습니다.”

 

거리의 모습이 조금씩 밀려난다. 죽은 눈에 야경의 다양한 색감이 들어찬다.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해, 손목을 끌어올려 잔향을 폐부 가득히 밀어넣는다. 그래도 진정되지 않는다. 표정에 금이 가는 게 느껴진다. 손을 뻗어 앞좌석과 뒷좌석을 나누는 가림막을 친다. 그렇게 거칠어진 숨을 희미하게나마 뱉어본다. 사라지지 않은 향이 화장품 냄새와 섞인다.

 

더욱 짙어진 향에 볼에 홍조가 어린다. 표정은 깨진지 오래다. 하지만 이대로 괜찮다. 오늘은 그래도 좋은 사람이 있으니까. 심장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차량의 엔진소리는 들리지 않게 된다. 강줄기를 따라 보이는 황혼, 아름다운 정경이 오늘따라 새로웠다.

 

‘2년만인가… 오랜만이기는 하지.’

 

오빠를 만나러간다. 고작 그 한 문장에, 기어가던 하루가 날개를 펴고 창공으로 떠올랐다.

 

 

 

 

 

창가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며 경로를 짠다. 돈이 될 뿐만 아니라, 환전성이 큰 물건들을 습득해야했다. 제조번호가 겹치는 물건도 지양해야한다. 꼬리를 남기지 않을 자신은 없으니 결국 가장 좋은 건 귀금속… 특히 금이 편하겠지. 악몽은 시간이 겹쳐있으니 여러가지 동선을 만들어야한다. 주변 지도를 출력해 하나의 선으로 이어보며 가장 좋은 결론을 찾는다.

 

낡은 랩탑을 두드린다. 사고가 일어났던 거리도 피하고, 인구유동이 큰 곳도 멀리하는 편이 좋겠지. 해당 블록은 빨갛게 칠해둔다. …중간에 랩탑 같은 것도 챙겨볼까?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어지러운 생각들이 조금씩 가닥이 잡힌다. 그제야 주변이 보인다. 거실 바닥이 지저분하다. 구겨놓은 지도, 찢겨진 페이지, 탄창을 분리해놓은 K-5 와 500ml 생수병 하나를 달아놓은 커다란 백팩.

 

아버지는 언제 퇴근하나? 여동생은 언제 돌아올까? 최근의 일상을 알지 못해 가늠이 잡히지 않는다. 그러던 차에 익숙한 차량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세화의 자가용이었다. 에스코트를 받으며 하차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렴풋이 보이는 그녀의 전체적인 모습은 예전보다도 더 어머니를 닮아있었다.

 

그녀가 올라올 동안 계획의 흔적을 지운다. 완성한 지도를 제외한 종이는 전부 파쇄하고, 필요한 물품은 백팩에 넣어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다. 그 뒤 옷을 다시 갈아입는다. 마치, 전혀 바뀌지 않은 사람처럼 꾸민다. 그렇게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기다린다. 동생과는 쌓인 말이 꽤 많으니.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구두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현관을 벗어나 중문에 손을 대는 그녀가 보인다. 세세하게 조각되어 빛이 굴절된 유리를 통해 우리의 시선이 마주친다. 세화는 온몸에서 기품을 뿌렸다. 동시에 내려앉은 신발굽과 코, 허벅지와 종아리의 내각, 아랫배를 살짝 가리며 모아놓은 두손, 가슴사이를 통과해 내려오는 가방끈… 죽은 어미가 돌아왔다 해도 믿을 용모다.

 

“많이 노력했구나.”

 

내 말에 살며시 웃던 그녀는 어머니에서 점차 이세화로 돌아온다. 감정을 감추지 못하며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피부, 앙다문 입술과 흔들리는 시선, 변한 자신이 부끄러운지 모여지는 다리… 그녀의 지난 삶을 보여주는 편린을 음미하던 나는 미묘한 균열을 느꼈다. 그러고보니, 중문을 지나온 여동생은 나를 마주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래?”

“…오빠 맞아?”

 

아, 내 얼굴이 좀 바뀌기는 했지. 소년이 청년이 되어 돌아왔으니까. 군대는 소리를 키워야할 때가 많다보니 목소리도 좀 변했고.

 

“어색한가?”

“…많이.”

 

쭈뼛대던 그녀는 신발을 벗어두고서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부탁할 것이 있다.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던 그녀의 어깨를 팔을 붙잡는다. 그렇게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여동생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달아오른다. 그녀가 손목을 끌어올려 냄새를 맡는다.

 

“그 향 이럴 때 쓰는 거 아니잖아.”

 

천천히 손을 내린 그녀가 나를 마주본다. 평소에 억눌렀던 감정이 일시에 터져나오기 시작했는지 눈시울이 붉었다. 하기야… 그녀는 외가에 다녀올 때면 항상 내 품에 안겨 울고는 했다. 버거움을 느끼는 순간마다 못내 그때가 그리웠을까. 나는 살며시 세화를 끌어안았다. 예전처럼 다정하게, 그리고 그보다 많은 미안함을 담아서. 또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 예감이 만든 죄책감을 조금 묻혀둔 상태로.

 

맞닿은 가슴, 전해지는 떨림에게서 그녀가 가진 파문이 느껴지고 있었다.

 

‘부탁은 잠시 미뤄둘까…’

 

잠든 나를 깨워달라는 말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정제되지 않은 거친 감정이다. 마주한 사람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쏟아져내리는 마음은 한껏 곪아있었다. 나이가 들며 조금씩 익숙해질 일이라 생각했었다. 어쩌면 언젠가 어머니의 빈자리를 완전히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속 좋은 기대가 고개를 내밀 때도 있었다. 하지만 철 없던 때의 가정은 너무 많은 걸림돌을 무시했다.

 

싫다. 보고 싶었다. 두서와 순서를 무시하고 쏟아지는 말들의 대부분은 어미는 그러했다. 그럴수록, 내가 품고 있던 죄책감은 점차적으로 커져간다. 조금씩 혀 밑에 숨겨놓았던 말을 삼킨다. 그녀에게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끝내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세화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준다. 쓸데없는 마음 밖에는 줄 것이 없다. 그녀가 기대고 있는 나는, 자라나는 불온이 두려워 도망치는 겁쟁이일 뿐이었다.

 

그녀가 진정하기까지, 다행스럽게도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비록 해가 완전히 저물기는 했으나 어차피 꺼져가던 불빛이었다. 내 가슴을 밀어낸 세화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흐느낌이 끝난 그녀의 목덜미는 붉었다. 휘몰아치던 감정이 가라앉은 뒤 한걸음 늦게 따라오는 부끄러움에 뒷걸음친다.

 

“…정리하고 올게.”

 

세화는 흐트러진 얼굴을 가리며 방으로 사라졌다. 살짝 열린 방문 틈으로 여러 종류의 인형들이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어머니보다 밝은 색을 선호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한 뒤에 잠자리에 들자. 그 정도 여유는 있었다.

 

어디… 남은 시간동안 식사나 준비해볼까. 인덕션 위는 당연히 비어있다. 주방은 전체적으로 얼룩 한 점 찾아보기 힘들었고, 냉장고를 열어 상태를 확인하니 이미 조리가 끝난 음식들이 들어있다. 아버지는 집에 있는 시간이 적고, 내가 없는 집에 여동생이 굳이 있을 이유가 없으니. 가정부는 정해진 시간마다 들어와 청소만 하는 모양이었다.

 

조리를 시도할 기본적인 재료조차 없다. 두 번째 성징이 끝난 내가 혼자 사는 친구놈 집에 얹혀사는 동안 이 집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여동생의 울음은 그토록 복합적이었다. 수익이 생기는대로 집을 알아보려 했었지만, 그 계획은 취소해야겠지.

 

가더라도 함께여야한다. 차가운 물을 들이키며 시선을 옮긴다. 불을 꺼놓은 방,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백팩이 더욱 거대해보였다.

 

그녀는 정돈할 것이 많았다. 눈물에 젖은 머리카락이나 번진 화장은 그렇다쳐도 부어오른 눈주변은 처치가 힘들었으니까. 시선을 분산시킬 여러 장신구를 착용했지만,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게 내 시선은 도통 그쪽으로 가지 않았다. 나는 아직 남아있는 그녀를 찾으려 애썼다. 왼쪽 눈가의 눈물점, 완만하게 내려가다 직선으로 끝나는 눈꼬리… 그 사이 성형이라도 했나? 내가 아는 세화는 그것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왜 그렇게 빤히 봐?”

 

간단한 저녁을 차려놓은 상태로 앉은 우리는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서로의 지금을 기억하기도 바쁜 탓이었다. 머리 모양, 이마, 귀, 턱선, 입술, 코… 서로의 시선이 한 부위에도 여러 번씩 머무른다. 그렇게 좀 더 시간을 쓰니 가장 확실하게 남아있던 부분이 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같지 않은가.

 

“많이 변했길래.”

“오빠도 그래.”

 

내 말에 동의한 세화는 턱을 괴고 본격적으로 내 변화를 살폈다. 탐색이 끝난 나는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져 고깃덩이를 썰기 시작했고, 세화는 내 저작행위마저 면밀하게 머리에 담았다.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모습도 뚫어지게 바라본다. …슬슬 제지할 필요가 있었다.

 

“어디 안간다.”

“알아, 이제 도망 못칠 거야.”

“…”

 

도수 낮은 와인으로 입을 헹구며 세화의 말을 뜯어본다. 외가에서 내 움직임에 제한을 두겠다는 뜻인가? 장례가 끝난 뒤에 삿대질한 이후로 완전히 내다 놓은 줄 알았는데. 하루빨리 잠적할 필요가 있다.

 

“누가 그랬어?”

 

외할머니는 배우자와 막내 딸의 죽음으로 급격히 노쇠하였다. 큰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면 움직이지 않으실 거다. 그렇다면 두 삼촌 중 누구의 사주일까. 장남은 독단적인 성향이 아니다. 둘째는 굳이 이제와서 내게 신경을 쓸 이유가 없다.

 

“내가.”

 

상황에 따른 대처법을 생각하던 내게 세화가 이상한 말을 했다. 그녀를 한 번 쳐다본 뒤, 입에 머금고 있던 와인을 삼킨다.

 

“나는 그쪽 재산 쓸 생각 없어.”

 

식기를 가지런히 정리하며 세화의 반론을 기다린다. 그녀도 이제 알았을 거다. 현대는 지원없이 홀로 서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세상을 모르는 두 아이의 결심은 처음부터 이뤄질 수 없었다는 비극을, 사람은 이토록 자란 뒤에야 제 이야기의 표지를 살필 수 있다는 현실을.

 

“외할머니가 내게도 지분을 주셨어. 백 씨 남매가 가져갔어야 할 것까지.”

 

양손을 깍지낀 그녀에게서 소싯적의 어머니가 보였다. 저 말을 시작하면서부터 눈꼬리도 살며시 올라가있었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세화는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행동에 놀란 듯, 양손도 풀어 무릎 위로 올렸다.

 

“…이건, 버릇이 돼서…”

 

그녀의 목덜미가 다시 붉어졌다. 앞서 예상했듯, 우리에게는 아주 많은 말들이 필요했다.

 

 

 

여동생에게 들은 상황은 많이 바뀌어있었다. 우선, 외할머니의 건강이 회복되었다. 때문에 두 삼촌의 위세는 아직 동일했다. 질투심이 휩쓸린 백하선이 제풀에 추락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백예화는 자신을 드러내려하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 백예화의 판단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덕분에 세화에게 이목이 쏠렸고,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어머니를 훌륭하게 연기해낸 그녀는 백씨 집안의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더욱이 외할머니의 회복세에 영향을 준 것도 세화였기에, 장남은 여동생에게 감사를 느끼고 있다…

 

“그래서?”

“오빠가 고생할 필요 없다고.”

 

내가 큰 착각을 했구나. 그녀는 이제껏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게 아니었다. 단지, 딸을 잡아먹은 가족이라는 취급을 받기 싫었을 뿐이다. 하면, 시간이 지나서 죄가 용서 되면 그만인가?

 

“세화야.”

“응?”

 

앞으로의 생활을 상상하며 더없이 밝은 표정을 지어내는 그녀를 보며 말한다.

 

“나는 용서를 구하는 게 아니라 사죄를 받고 싶은 거야.”

 

외가의 손을 빌려서야 능력을 찾은 아버지, 체면을 차리다 끝내 품격을 잃어버린 외가. 내가 바란 건 증명과 사죄였다.

 

“내가 실수했네. 너는 어머니와 살았던 기억이 없었지.”

 

다시 식기를 집어든 나는 고깃덩이를 거칠게 찢었다. 그사이 식어버린 소고기는 질겼다. 억지로 씹어 삼키니 턱이 살짝 저릴 정도다. 내 몫을 먹어치운 뒤,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세화를 두고서 방으로 들어간다. 서랍 가장 깊은 곳에서 손때 묻은 다이어리 여러 권을 꺼내어 다시 식탁으로 향한다.

 

“너는 외가에서 알던 어머니를 배웠지.”

 

세화는 말없이 내 행동을 지켜봤다.

 

“아랫사람을 굽어보고, 없는 신분이 마치 있는 듯 행동하고, 자기 분야에서 완벽하지 못한 사람을 혐오했어. 추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좋은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지. 그런데, 내가 아는 어머니는 좀 달라. 부족함을 통감하셨으니까.”

 

식탁에 다이어리를 올려둔다. 집안에서 나온 뒤로 적기 시작한 어머니의 일기였다. 처음에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나를 임신한 후에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쓴 하루들이다.

 

“이것들은 내가 아는 어머니야. 다 읽고나서 그때 이야기하자.”

 

나는 잠시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화를 낸다면 기꺼이 받을 생각이 있었다. 이건 내 편협함이 만들어낸 순간이니까. 하지만 세화는 그러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짧게 생각을 정리하더니, 이내 식탁 위에 올려둔 다어어리를 집어들었다. 나는 그녀의 선택에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는 마음이 들었지만, 무심코 뻗으려던 손을 물렸다.

 

세화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니까.

 

“그럼, 내일 이야기해.”

 

그녀가 방으로 들어간다. 음식은 한 입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오늘 밤 사이에 전부 읽을 생각일까. 나는 그제서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이 복잡하다. 이럴 때는 뭐라도 해야지. 먹은 자리를 치운다. 음식물은 분해기에 넣고, 접시는 세척기에 정렬하여 넣는다. 나이프와 포크에 묻은 기름기를 닦아내면서 생각을 끝마친다.

 

아무래도, 서로 떨어져있던 시간을 더 값어치있게 사용한 건 세화쪽인 것 같았다. 그렇기에 마무리가 끝난 뒤 손을 씻으며 떠오르는 건 하나 뿐이었다.

 

나는 스스로 떳떳하기 위해 악몽으로 향해야한다고.

 

 

 

침대에 누워 백팩을 끌어안은채 잠을 청한다. 악몽을 길게 쓰기 위해 아버지의 수면유도제까지 먹은 상태다. 의식이 점차 흐려지는 것이 느껴진다. 팔다리의 감각이 옅고, 눈꺼풀 사이로 스미는 빛조차 희미하다. 꿈결이 다가온다.

 

어느덧, 침잠하던 감각이 선명해졌다.

 

천천히 일어난다. 마치 현실을 옮겨놓은 것처럼, 꿈의 시간대는 잠을 청하던 때와 동일했다. 어두운 방, 끌어안고 있던 가방을 고쳐매고 거실로 나간다. 이 장소는 변하지 않았다. 사물들의 위치가 앞서 배치해놓은 그대로다.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본다. 내 계획을 비웃듯, 야경의 밀도가 거리마다 달랐다. 어느곳은 건물의 형태마저 다르다.

 

점점 시선을 가까운 곳으로 가져간다. 짜놓은 동선 중, 시작점이라도 맞는 곳으로 향해야하니까. 그렇게 재밌는 장면을 만난다. 아파트의 일부분은 공사 중이었다. 조명 하나없는 상태로 작업 중인 인부들, 저들이 기록된 시간은 대낮이었겠지. 그 중 몇몇은 위태롭게 매달려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잰다. 방에서 거실 창가까지 6초, 저 인부들을 확인하는 게 또 8초.

 

점점 흘러가는 초를 세기가 버거워질 때쯤, 어느 한 인부가 추락하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의 끝을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의 주변은 이미 흑백이었으니까.

 

“기상 직후로부터 217초.”

 

급한 불을 끈 언젠가, 그 다음 날에는 구해도 좋을 사람이었다.

 

한 명의 목숨을 기억한 뒤 악몽의 모습을 옮긴다. 투명도를 높여 뽑아낸 지도 위에 여러 사족과 기호들이 그려졌다. 다만, 이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한계는 명확했다. 이제 움직여야할 때다. 바깥으로 나가기 전, 나는 세화의 방문을 열었다. 공간이 담아해야낼 특정 시간이 없다면 현실과 동일할까. 그 의문을 완전히 해결할 장면을 바란다. 살짝 열어본 문틈으로, 책상 위에 펼쳐진 다이어리가 보였다.

 

조심스레 문을 닫은 뒤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는다. 안그래도 옛날 옷을 입으니 여유가 없다 싶었는데, 이건 좀처럼 들어가지를 않았다. 그에, 나는 손이 닿지 않은 곳에 넣어둔 전투화를 꺼내어 신었다. 딱딱한 감촉과 은근한 무거움, 익숙한 느낌이다. 군대의 경험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덕분에 망설임없이 집을 나설 수 있었으니.

 

현관문을 열며 휴대폰의 스톱워치를 누른다. K-5는 가방에서 꺼내어 허리띠에 달아둔 홀스터에 장착한다.

 

오전과 똑같이 전기가 돈다. 다만, 이 건물은 악몽 속에서 아직 완공되지 않았 상태다. 고층까지 전력이 올 리가 없다. 꿈의 규칙은 어떤 기준으로 세워졌을까. 시공간이 서로 분리되어 움직이다가도, 어느 순간 덩어리져 군집을 이룬다. 이해가 가능한 영역을 이미 벗어났다고 결론지어야할까? 승강기를 호출하며 일어날만한 변수를 상상해본다.

 

까마득한 옛날의 죽음, 전쟁의 여파가 남은 장소… 좀 더 멀리까지 간다면, 글로만 남은 옛 시대가 눈앞에 펼쳐질수도 있을까. 수많은 가정이 서로 앞다투어 똬리를 틀었다.

 

도착했다. 내리기 전에 주변부터 살핀다. 아무렇게나 쌓인 자재하며, 형식상으로 만들어둔 안전장치는 헐겁다. 내게 위해를 가할만한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위치를 가늠하며 천천히 걷자, 얼마가지 않아 난간에 몰려든 인부들이 보였다. 그들의 시간은 이미 끝났는지, 기함하는 얼굴 그대로 굳어져 까마득한 아래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지 하나로 그들을 찔러본다. 재현을 마친 배우들은 돌처럼 딱딱했다.

 

그들의 몸을 붙잡고 아래쪽으로 고개를 내밀어보니, 사지가 기형적으로 꺾인 인부가 보였다. 현장을 확인한 즉시 스톱워치를 다시 누른다. 쓰고있던 안전모는 저만치 튀어나가있다. 드러난 얼굴로 보아 쉰을 넘긴 나이, 몸을 쓰는 직종에 종사하기에 적절치 않다. 하지만 당장 주변에 보이는 대부분의 남성들도 불혹을 넘은 듯 보였다. 현장이 모두 이렇다면, 주변만 돌아봐도 비슷한 죽음을 더 발견할 수 있겠지.

 

일곱 개의 죽음을 막아내면 어찌 되려나… 또 다른 변화가 있으리라는 건 알 수 있었으나, 나는 그때의 일부라도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낸다. 화면에 적힌 시간은 2분 41초, 이 죽음은 여유가 있다.

 

시작은 전부 같다. 동선이 갈라지는 지점은 사거리를 다다랐을 때다. 아파트 단지를 나가서 관광센터를 지나친다. 곳곳에 죽음이 산재해있다. 인도 한복판에서 심정지로 쓰러진 사람이 보인다. 죽지 않았다. 신고 전화를 한 중년 여자가 아직 움직이고 있다. 심폐소생술을 한 번도 배우지 못했는지, 조치내용을 지시받고 있음에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모습이 선하다.

 

이쪽도 여유가 있다. 시작이 좋은 편이면 끝이 별로던데, 현실이 아니면 좀 다르겠지.

 

쓰러진 사람을 지나쳐 도착한 사거리에는 경적을 울리는 차들이 있었다. 등을 킨 차량과 키지 않은 차량으로 그들의 낮과 밤이 구분되었다. 사고의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일정 부분 연루된 이들 역시 현장을 꾸며주니, 차량이 얼기설기 섞여 상황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 거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오래된 연식의 차량들도 많다. 잠시 혼란스러운 도로를 보고 있던 나는 또다른 규칙을 발견했다.

 

차량들이 서로 투과되어 움직인다. 다마스와 포르쉐가 뒤섞인 끔찍한 혼종을 본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서로 다른 시간은 완전한 객체로 판정된다. 동일한 차원으로 표현되어도 위계가 다르다면, 나는 왜 모든 것에 대해 관여할 수 있지?

 

“남은 목숨.”

 

[3/10]

 

이 일그러진 현실이 내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그조차 내게 가혹한 일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추돌하기 시작한 차량들을 뒤로하고 내 본래의 목적을 따라간다.

 

백화점. 이 건물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다행이었다. 하기야, 여기도 준공된지 오래되었으니까. 층수가 더 높았으면 챙길 게 많았을까. 막상 증축이 반려되었을 때는 별 생각 없었는데, 내 처지가 이리 되고서야 아쉬움을 느낀다.  정문을 통해 입장하니 의외로 손님들이 많았다. 사건사고를 검색해도 별 내용이 없었던 것과 다르다. 긴장을 유지해야한다. 영향력이 행사된 순간부터는 그쪽도 나를 인지할 수 있을 테니.

 

걸음을 재촉한다. 가방을 앞으로 맨채, 부피가 작고 값나가는 물건을 모조리 쓸어넣는다. 종업원이 있는 전시대는 제외한다. 층을 절반도 돌지 않았지만 백팩은 금세 대부분 찼다. 소요된 시간은 고작 5분 남짓, 다른 가방이 필요하다. 익숙한 패턴의 매장 안쪽, 케이스 안에 들어있는 가방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두드려본다.

 

강화 유리인 것 같은데…

 

됐다. 여기까지 와서 망설일 것 없다. 아버지나 세화가 나를 깨울지도 모르고, 이곳의 현실감은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나는 마네킹의 손을 뽑아 휘두르기 시작했다. 마네킹의 파편이 사방에 날리고, 요란스러운 경보가 울려댄다. 역시나 손님들과 종업원들의 반응은 없었다. 풍요를 구가하는 건물 속에서 발악하는 건 오직 나 밖에 없다.

 

어깨만 사용하던 휘두름이 허리와 다리까지 퍼진다. 거친 숨에 동조한 울분이 그를 자연스레 이끌었다. 미세한 흠집만 생기던 케이스가 일제히 깨져나간다.

 

완전히 으깨진 마네킹 팔을 집어던지고 숨을 고른다. 얼마나 악을 썼는지 몸이 절로 후끈거린다. 나는 젖은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올리며 읊조렸다.

 

“좇같네...”

 

군대에서야 입에 붙기 시작한 상스러운 말이었다. 책임을 이해한 나는 절박함을 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의 문제를 안다. 결국 쓸데없는 부스럼을 만든 건 나였다. 보잘 것 없는 신념 때문에, 나는 세화의 가치관을 건드렸다. 오른 체온과 배어나오는 땀, 혈관을 따라 솟구치는 피. 나는 본질에 가까운 추레함을 뒤집어 쓴 채 명품들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고작 이 따위 일이 내 최선이라니. 역시 나는 백씨 집안과 어울리지 않았다. 깨진 유리 파편에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비루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더욱 못나져도 괜찮겠지.

 

백팩을 뒤로 매고, 새로운 가방을 앞으로 맨 나는 또다시 주변을 탐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3분쯤 걸렸다. 이따위 짓거리도 요령이 생기니 속도가 붙는구나. 더이상 짊어질 어깨는 없지만 다음 층으로 가볼까. 시계를 찰 팔은 남아있으니. 수확이 좋으니 당당하지 못해도 웃음이 나온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던, 위쪽 식당가로 가서 요기를 하던 할까. 그렇게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저절로 고개가 돌아간다. 멀끔한 차림의 신사, 스타일이 좀 옛스럽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고급지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건 거대한 캐리어. 향기는 그곳에서 났다. 여인들의 화장품 분 냄새에 뒤섞인 비릿한 향…

 

피 냄새였다.

 

얼핏 보아도 어려운 죽음이다. 현실에서 이미 죽은 사람이니, 과한 노력을 해봤자 이득도 없다. 그냥 갈 길을 가는 편이 좋겠지. 마음을 정돈하니 그저 홀가분하다. 누가 죽었던 그냥 남이니까. 하지만, 발길을 돌린 나를 운명이 붙잡는다.

 

[미제 사건 발견 – 해결 시 추가 보상]

 

…보상?

 

“어떤 보상이지?”

 

답변은 없었다. 나는 아직 가치를 증명한 일이 없으니, 언질이라도 주는 정도의 대우라도 괜찮은 편이기는 하다. 추가 보상은 어떤 걸까. 위험을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은 이름부터 초라하니, 앞으로의 악몽에서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했다. 나를 지키는 건 허리춤에 달려있는 총기지, 어렴풋하기 짝이 없는 기회가 아니다. 하지만 몇 발의 탄환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보상이라면 가치가 있다.

 

이건 시도하는 편이 좋겠지. 나는 사람들 사이에 남은 향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쓸모없는 시간과 부딪히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존중없는 신사의 뒤를 밟는다. 걸음이 늘어나면서, 점차 미제 사건을 해결하려는 열의가 선명해질 때였다.

 

주변 사람이 나를 보고 웃기 시작했다. 그들이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린다. 전투화에 가벼운 복장, 앞뒤로 맨 가방이나 땀에 젖은 머리카락… 시간이 나를 받아들였다. 약간의 소란스러움에 신사도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살인의 열기가 식지 않아 번들거리는 눈빛, 나는 그와 익숙한 분류의 감정을 겪은 적이 있었다.

 

목덜미로 짓쳐들어오던 대검, 핏물이 말라붙은 날을 따라 올라가는 시선 끝에서 마주한 핏발선 외눈. 그 순간의 기억이 다시금 재생되자, 코끝을 간지럽히던 혈향이 더욱 짙어진다. 죽음의 호흡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차가운 숨결에 또다시 몸이 굳어진다. 수많은 감각이 돌이켜지던 와중, 내 우스꽝스러운 행색을 본 신사가 나를 보고 비웃는다. 나 역시 그를 따라 웃는다.

 

좋은 때다. 나는 홀스터에서 K-5를 꺼내며 안전장치를 풀었다. 마침 영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트라우마까지 함께 물리칠 상황이라니, 이보다 좋을 때가.

 

총구 끝에서 섬광이 번쩍인다.

 

건물 안에서 터진 우렁찬 소리는 수많은 비명소리를 만들었다. 태반의 여성들은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기에 달아나다 넘어지기 일쑤였고, 매니저들은 신고를 했으며 가드들은 나를 포위하는 동시에 겁에 떨었다. 나는 그들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는 자신을 산 사람이라 생각할 테니, 나를 저지할 리가 없었다.

 

나는 가슴에 총을 맞은 신사에게 다가갔다. 딱히 급소를 맞추지는 않았는데, 바닥을 보고 엎어진 범인은 쇼크 상태에 빠져있었다. 캐리어는 자물쇠로 잠겨있다. 열쇠를 뒤져볼까? 신사의 전면부는 이미 핏물로 덮여있다.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다. 전투화 밑창은 꽤 단단하니까… 자물쇠를 발뒤꿈치로 여러 번 내려찍자 작은 자물쇠가 뜯겨나간다.

 

그 앞에서 나는 잠시 고심했다. 신사보다 이 안에서 풍기는 혈향이 짙다. 목격의 충격을 대신 받을 사람이 필요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침 가까운 곳에 다리가 풀려 일어나지 못하는 여자 매니저가 보였다.

 

“어이, 거기 당신.”

 

그녀는 좀처럼 대답하지 못했다. 쉼없이 떨리는 동공과 목울대, 하지만 목소리를 만들지 못한다.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음을 처음 대면한 사람은 얼어붙는다. K-5 를 든 손을 위아래로 까딱이며 부르자, 그녀가 덜덜 떨며 기어왔다. 내 눈도 무언가에 잠식되었을까. 그녀는 내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

 

“이거 열어봐.”

 

악몽의 원귀가 있다면 내가 아닐까? 실없는 생각에 실소가 나오자, 그녀는 더욱 기겁했다. 매니저가 천천히 캐리어를 연다. 끈적한 피냄새… 편안하게 감긴 눈, 피에 절여진 머리카락, 완전히 구겨져 들어간 몸. 캐리어를 열어준 여자는 거품을 물고서 뒤로 넘어간다. 뒤집힌 눈이 나와 마주친다.

 

인재들이 으레 그렇듯, 너무나 적나라한 참상이었다.

 

머리를 둔기로 가격한 흔적이 있다. 움푹 파인 전두부, 터진 두피에 혈흔이 엉겨붙었다. 다만, 이곳의 상흔은 출혈량이 많지 않아 비닐로 감싸놓은 시신이 피로 범벅된 모습을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여성의 상태를 좀 더 따져보기 시작했다.

 

전라의 시신… 성범죄에서 시작된 범행일까? 아니, 신사에게는 살인의 고양감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살인 자체를 목적으로 둔 인물이 번화가를 지날 필요가 없으니, 동선을 감추어야했다면 공범이 있을 확률이 높다. 계획적인 살인, 마치 업무처럼 이루어지는 과정. 나는 시신의 복부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팔다리의 건강상태에 비해 지나치게 홀쭉하다.

 

주변에 은폐해있던 경비들이 천천히 일어선다. 총격을 보고 했던 팀장이 말을 더듬으며 상황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총을 맞은 남성의 캐리어에 여성의 시신이 들어있다… 라는 보고가 끝나자 무전기에서 마이크의 한계점을 넘은 고성이 들려왔다. 팀장은 찢어지는 고함을 흘려 들으며 나와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 마침 신사의 경련이 점점 잦아들고 있던 참이었다. 그가 흘린 피가 큰 웅덩이를 만들고 있다.

[25%]

 

빨간 배경에 글자가 적힌다.

 

“경찰이십니까?”

 

경비팀장은 엄폐물을 낀 상태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에 홀연히 떠오른 문장을 무시하며 답한다.

 

“경찰이 총부터 쏘는 경우도 있나요?”

“없죠. 그럼 목적이 뭡니까?”

“글쎄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라.”

 

영문 모를 대답을 들은 팀장은 더 이상의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잔뜩 죽인 목소리로 지원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하달할 뿐이었다.

 

책정 결과는 고작 25% 이다. 꿈이 바라는 결과가 뭘까. 사실, 피해자는 이미 사망했으니 남자를 죽이면 악몽이 종료될 것이라 생각했다. 버스에서 경험한 사실이 그랬으니까. 꿈의 투정을 들어주면 끝난다. 그리 가볍게 생각했다. 이미 끝난 일을 되짚어 자위하는 일을 의미있는 의지의 표상이라 포장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가?

 

나는 한숨을 쉬며 신사의 옆에 쪼그려앉았다. 전투화가 피로 젖어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경비들과 정면으로 마주한 뒤, 벽을 등지고 권총을 홀스터에 넣는다. 그 뒤에 신사의 정장 어깨 부분을 잡아 피웅덩이에서 끌어낸다. 반짝이던 대리석 바닥에 기다란 핏자국이 남았다.

 

정장을 벗겨 주머니를 뒤지니 지갑 두 개가 나온다. 그 탓에 손에 피가 묻었다. 하나는 밋밋한 디자인의 검정색 반지갑, 또 하나는 피해자의 물품으로 보이는 장지갑이었다. 남자의 지갑을 열어보자 다섯 개의 신분증이 보였다. 꺼내어 확인하니 사진을 제외한 모든 사항이 각기 다르다. 이 중 진짜가 있기는 할까. 카드는 없이 현금만 두둑하고 명함은 없다. 정말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없나?

 

별다른 기대없이 장지갑을 연다. 한가득 꽃혀있는 신용카드와 몇 푼 되지 않는 현금. 주민등록증과 증명사진… 어린 시절에 찍어놓은 가족사진. 신분은 확실히 증명할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와 이름 석자를 외워둔다. 이제 이것들은 내게 필요없다. 가장 가까운 경비에게 지갑 두 개를 던진다. 직후, 권총을 파지하고 앞으로 걷는다. 움직이기 위해선 인질이 필요했다.

 

무릎 꿇은 채 뒤로 넘어가 기괴한 자세, 매니저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의 앞섬을 한손으로 잡아채 일으킨다. 단추 하나가 뜯겨나가 바닥을 구르고, 하얀색 셔츠에는 붉은 손자국이 남았다. 당초에 예상했던 무게보다 가볍다. 키는 170cm 언저리, 눈으로 어림잡히는 체중은 대략 60kg 초반… 내 힘이 강해졌다?

 

팔에 의도적으로 힘을 가하니 분명히 남은 여력이 체감된다. 악몽이 신체에 변화를 가했다. 그러고보니… 시야가 깨끗해진 느낌도 있었다. 바깥에 나가면 제대로 확인해볼까. 내 손에 붙잡힌 여자를 앞뒤로 흔든다. 힘이 빠진 모습 그대로 몇 번 덜렁거리자, 그녀의 정신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흐릿한 동공에 내 모습이 담긴다. 이윽고 그녀와 내 시선이 겹친다.

 

“…무슨 일이시죠?”

 

충격을 받아 기억을 못하나.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 상황을 한 번에 전달할만한 문장을 떠올려본다. 적당한 말이 없다. 그러니 그냥 내 입장만을 말하자.

 

“그쪽은 이제부터 인질입니다.”

 

내 말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아래에 방치된 시신을 발견한다. 그러자 바닥에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자욱한 혈향에 지린내가 섞인다. 점점 크게 젖어드는 스커트, 스타킹을 타고 흐르는 줄기가 늘어난다. 나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의 주위에 노란색 웅덩이가 만들어진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느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다급한 소음, 사이렌이었다.

 

사건이 확장되고 있다. 골치가 아파진 나는 K-5 의 총구를 관자놀이에 가져다댔다. 내 행동에 경비들이 움찔거렸다. 차가운 금속이 닿으니 해야할 일이 다시 명확해진다. 그래, 아무리 몰려와봐야 바뀌는 건 없다.

 

“일어날래요? 끌려갈래요?”

 

내 말을 들은 그녀가 다급히 일어나다 제 소변에 미끄러져 넘어진다. 이것도 참, 쉽지 않은 경험이다.

 

매니저의 안내를 받아 관리실로 향한다. 수틀리면 모두 죽여버릴듯한 악인을 연기해야하니 그녀의 뒷목을 거칠게 붙잡은 상태였다. 가는 길에 수많은 경비들을 마주쳤으나, 총구를 한 번 휘저어주니 다들 엎드렸다. 무모한 기개를 보여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관리실의 문은 잠겨있었다. 내부에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지기는 했다. 과도한 긴장에 짧아진 호흡, 누군가의 땀방울이 바닥에 떨어진다. 감각이 필요 이상으로 민감했다. 문고리를 몇 번 돌려본 뒤, 체중까지 실어 발로 걷어찬다. 문이 우그러지며 열린다.

 

[37.5%]

 

갱신된 진행도를 손으로 휘젓는다. 떠오른 문장은 곧바로 사라진다. 관리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리창을 부순뒤, 난간을 통해 도망친 모양이었다. 창가로 다가가니 아직 건물 외곽에 매달려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다급함이 남아있는 황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총구를 들이밀며 말한다.

 

“그쪽은 이리와요.”

 

주변의 색이 바래진다고 느낀 건 그때였다. 그 즉시 매니저를 앞쪽으로 당겨 몸을 가린다. 곁눈질해 거리 아래쪽을 보니, 수많은 병력들이 도열해있는 게 보였다. 저 사람들은 아니다. 곧이어 건너편 건물 옥상에 저격수가 보인다. 꽤 적극적인 대처다. 경직된 상태로 매달려있는 남자의 발 근처에 총을 한 발 갈기자, 저격수가 위치를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오라니까?”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이것들은 너무나 현실처럼 반응했다. 나를 통해 보여질 뿐인 단기적인 목숨조차 값진 것처럼 굴었다. 그제야 남자가 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가 죽인 남성 기준으로 CCTV 좀 봅시다.”

 

남자는 총격 당시의 영상부터 신사의 경로를 추적했다. 그는 주차장으로 들어와 캐리어를 끌며 이층으로 향했다. 시계 매장을 둘러보던 그는 정각이 되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정문 쪽으로 사라지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 뒤, 우리는 외곽 카메라로 시선을 돌렸다. 차량이 모습을 드러낸 방향은 병원이 밀집된 거리였다.

 

나는 그 뒤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매니저와 남자를 정면에 앉혀둔 채, 저격이 불가능한 각도에 앉아 시간을 축냈다. 저 많은 병력들을 뚫고 나갈 자신은 없었다. 당장 관리실 문 너머에도 병력들이 배치되어있다. 간혹 문 너머에서 내게 원하는 것이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하시는 분이십니까?”

 

그런 상황이 유지되자 급기야 인질로 잡아둔 남성이 내게 묻는다.

 

“퇴근하고 싶은 사람이죠.”

 

슬슬 앞뒤로 매고 있는 가방이 무겁게 느껴지던 차였다.

 

 

 

“유동인원도 많은 퇴근시간에 백화점 한복판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흉기는 군용K-5 에… 사망자는 가지고 있는 신분증으로는 신원파악이 되지 않는 남성, 또 그 남자가 끌고 다니던 캐리어에는 여성의 시신이 들어있었고… 나는 모르겠다. 이게 뭔 개판이지?”

“그래서 대응도 지지부진하지 않습니까. 사용된 흉기도 문제고, 사망자도 문제고, 범행동기도 모르고, 심지어 농성 중인 범인의 신분도 오리무중입니다. 그나마 인근 부대에 분실된 K-5가 있는지 확인 요청을 해달라고는 했는데, 뒤집어 깔 필요도 없이 전부 멀쩡히 있답니다.”

 

옹기종기 모여있던 형사들은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계속해서 뻐금거렸다. 당장이라도 들어갈 듯 도열했던 병력들도 아무런 진척이 없자 점점 늘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두 시신의 부검결과가 전해진다. 남자는 심장과 폐를 동시에 관통해 현장에서 사망, 여성은 모든 장기가 적출된 상태로 근육과 피부만 남아있었다. 사망 예상 시각은 약 2시간 전… 장기 수송 차량들의 이동과 갑자기 잡힌 수술 일정 전부 확인 중.

 

“…씨발, 이게 뭘까?”

“그러게요.”

 

그들은 막내를 시켜 담배 심부름을 시킬 뿐이었다. 살짝 열려있는 본부 천막, 숨가쁘게 달려온 협상가가 상황 브리핑을 들으며 인상을 잔뜩 찌푸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입모양도 쌍시옷을 그리고 있었다.

 

“퇴근하고 싶다.”

 

재빨리 대령된 담뱃갑을 뜯으며 푸념한다. 상황을 역추적하는 곳은 바쁘다던데, 사건이 발생한 곳은 진전없는 감옥이었다.

 

 

 

시간이 꽤 흘렀다. 자정에 가까워진 시간, 긴장을 유지하던 매니저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남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나는 끝내 대화마저 귀찮아지고 말았다. 요즘보다 맑은 하늘, 더 밝게 빛나는 달을 구경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문 너머에서 협상가라 자칭하는 인물이 말을 걸어온다. 내 의도를 파악하려는 질문들이 이어졌으나, 답변을 들은 그는 계속해서 말문이 막히고 만다. 그런가하면, 진척도는 끊임없이 올라가고 있다. 바깥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가산 - 연루된 미제 사건의 실마리 발견]

[117%]

 

단적으로 말하자면, 협상가는 포기했다. 준비한 모든 대화를 소모한 뒤에도 임기응변으로 정보를 얻고자 했으나, 다른 팀의 성과가 유난히 두드러지자 대기 명령이 떨어진 탓이 컸다. 심지어, 의사 면허가 정지된 사람들을 모아 장기를 적출한 조직을 추적 중이라는 내용을 전달받은 그는 내게 넋두리를 시작했다.

 

“사건을 키우려고 총기를 사용하셨군요… 캐리어를 탈취해 여는 방법을 썼다면 실형은 안사셨을 텐데… 아, 그 남자에게 원한이 있었던 걸까요… 그렇다면 마음으로는 이해가 됩니다만… 그쪽은 제가 공감하던 안하던 신경쓰지 않으시겠지요…”

 

문너머에 기대어 앉은 협상가는 입을 쉬지 않았다. 인질로 데려온 두 사람은 이미 꿈나라로 떠났기에, 그의 목소리는 쌓여가는 지루함을 덜어내는 유일한 오락이었다. 새벽이 되자 진행도의 오름세도 점차 줄어가는 마당이다. 사건 초기에는 경찰 헬기가 기웃거렸는데, 지금은 방송국 헬기들이 더 많이보였다. 총을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걸까?

 

[가산 – 불법 수술실 폐쇄]

[134%]

 

“이렇게나 오래 이야기를 했으면서 얼굴도 방송 화면으로만 비춰주고… 이정도 노력했으면 최소한의 반응이라도 해주셨으면…”

 

넋두리가 점점 개인적인 푸념으로 변해간다. 당초의 발성은 단단하고 날카로웠는데, 이제는 사석에서 만나는 듯한 가벼움이 느껴졌다.

 

“오오… 장기를 적출했던 수술실을 확인했답니다. 현장에서 작업자들을 체포했다는데, 이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지… 당연히 알고 계셨을 테죠. 당신의 행동들이 슬슬 머리로도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의 소설을 듣던 나는 그에게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 복도의 기척도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어 만약을 대비한 한 개 분대만이 상주하고 있었기에, 관리실을 돌파할 정도의 병력이 되지 못했다.

 

“협상가 씨.”

“너무 혼자 말했는지 이제 환청이 들리기 시작하는군요. 본부에서도 제게 신경을 꺼버린지라, 슬슬 외로운가봅니다.”

“환청 아닙니다.”

 

내 말을 들은 그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지금껏 협조하지 않던 내가 이제와서 말을 꺼내니 야속한 모양이었다. 그가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들려온다. 코너에서 이쪽을 지향하던 사수가 고개를 흔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협상가는 개의치 않았다.

 

“아직 제가 당신에게 하지 않은 질문이 남아있습니다.”

“어떤 거죠?”

“죽은 남성과 여성의 동선은 조사가 끝났지만, 당신은 시작조차 못하고 있어요. 그도 그럴게… 당신은 이 거리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이름 석자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며, 하다못해 국적도 모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서 다들 손을 놓은 상태죠. 백화점에서 솟아난 사람이라고 수근대면서요.”

“제가 누구인지 알고 싶습니까?”

“…네. 솔직히 그렇습니다.”

 

나는 관리실의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새벽 두 시에 가까워지는 시각, 잠에 든지 벌써 일곱시간이 되었다. 본래라면 스스로 깨어날 때가 되었으나 맘을 놓을 수 없었다. 약을 먹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 꿈은 자연스럽지 않으니까.

 

“배가 고프군요. 답변도 드릴겸, 함께 드시겠습니까?”

 

내 말에 협상가의 이어폰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부분의 단어가 희미했지만, 주고받는 모양새가 그에게 판단을 맡기는 듯했다.

 

“…통닭이면 되겠습니까?”

“으음, 맥주는 빼고요.”

“알겠습니다.”

 

본래라면 긴장되어야할 독대다. 분명 그렇지만, 협상가의 숨소리는 되려 편안해져있었다. 끝을 모르고 움직이던 입도 그제야 쉼을 찾았다. 그렇게 고작 10분쯤 되었나?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발소리는 가벼운 편이다. 이윽고 비닐봉지가 바스락대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튀김 냄새가 풍기기 시작한다. 한참을 앉아있던 협상가도 몸을 일으켰다.

 

“여기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너는 이렇게 조용한 인질극 봤냐? 나는 못 봤다. 그러니까 다르게 접근해야지.”

 

까마득한 후배를 교육하는 어투다. 내 인간성을 자극하기 위한 사전에 계획된 행위일까. 이 시절의 범죄심리학은 현대와 다르기에, 그 순간의 판단을 믿는 편이 좋아보였다.

 

“비닐봉투를 목에 걸고, 양손은 하늘로 치켜든 채 등을 보이면서 들어오시면 됩니다.”

 

나는 K-5 의 총구를 문쪽으로 돌렸다. 방송국 헬기가 쏘던 조명이 총신에 부딪혀 산란되었다. 협상가가 옆걸음질 쳐 들어온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검은색 블레이저, 체격은 살집이 있다.

 

“발로 밀어서 문을 닫고, 손들고 있는 상태로 한바퀴 돌아봐요.”

 

문을 닫은 그가 천천히 한바퀴 돈다. 거뭇한 수염자국과 정리하지 않은 눈썹, 뿔테안경에 살짝 구겨진 셔츠.  협상가에서 연상되는 용모는 아니었다. 비닐봉투에 눌리고 있는 목부분이 붉게 달아올라있다. 주머니는 전부 홀쭉하다. 블레이저 안에 테이저건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정도 거리라면 조준 당하기 전에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뭐 없네요. 이리 오시죠.”

 

그가 조명 아래로 들어온다. 홍채가 수축하는 게 확연하게 보인다. 그렇듯, 몸이 전례없이 민감한 상태였다. 기름냄새가 너무 진해 침이 고였다. 협상가가 내 앞에 엉덩이를 붙이며 앉았다. 치킨을 세팅하면서 내 손에 들린 권총을 흘겨본다. 당연하지만, 나를 믿고 있는 건 아니었다.

 

물결무늬를 이루는 황금색 튀김옷, 형사가 배달한 치킨은 꽤나 익숙한 브랜드였다. 가격 인상에 재능을 보이는 프랜차이즈로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입니까?”

“만원쯤 할 겁니다.”

“싸네요.”

 

내 말에 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맘때에도 비싼 편이었나. 뭐, 괜찮다. 꿈에 대한 호기심을 풀기 위해 그를 데려온 거니까. 다리 하나를 집어 크게 물어뜯는다. 갇혀있던 육즙이 입안에서 터지고, 고소한 튀김은 백후추향과 함께 부숴진다. 입천장을 따라 느껴지던 다소 강한 염도는 맛을 느낀 뒤 쏟아지는 침에 뒤섞여 사그라들었다.

 

감각에 날이 서서 그런 건지, 이때의 재료가 더 좋았던 건지. 꿈의 순기능을 한 가지 더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많이 시장하셨나봅니다.”

“그렇죠. 벌써 일곱 시간 째인데요.”

“왜 농성을 택하신 겁니까? 이러면 형량이 늘어날 텐데요.”

“금방 돌아갈 줄 알았거든요.”

“…돌아가요?”

 

나는 그를 보며 귀 뒤쪽을 두드렸다. 통신을 끊지 않으면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신호였다. 협상가는 잠시 망설이더니, 본부에 마지막 말을 전한다.

 

“10분 후에 나가겠습니다.”

 

그가 블레이저 안에 숨겨둔 통신기를 탈착해 내 앞에 올려둔다. 귀 뒤쪽에 붙여둔 스피커도 떼어 그 위에 쌓는다. 그곳에서 당혹스러운 음성이 들려왔으나, 나는 스피커를 손가락으로 눌러 으깼다. 협상가가 침을 삼킨다. 어떻게 말해야 이해가 될까. 통신기의 안테나를 힘으로 뽑아버리며 고민하자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실물이 있으면 편하겠지.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접히는 데다가 손가락으로 눌러서 반응하는 디스플레이에 엄청나게 빽빽한 화소, 수많은 어플리케이션을 눌러 보여준다. 해괴한 물건에 눈을 깜박이던 그가 시연이 길어질수록 점점 표정이 굳어진다.

 

“호접지몽 아시죠?”

“…장자의 깨달음에 관한 말이죠.”

“저도 그와 비슷합니다.”

 

그가 이해한 말과 달리, 나는 장자의 깨달음에 관해 논하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그가 겪은 상황이 어찌보면 나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뜻이었다. 휴대폰을 접어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가 브랜드 명을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이 순간의 기억이 오래도록 남으면 그의 미래는 심히 풍요로워질 터다. 협상가의 목울대가 출렁이고, 시선이 정처없이 흔들렸다.

 

“당신들이 못 찾은 게 아닙니다.”

 

[피해자 신체 복원 완료]

[추가 진행 불가]

[최종 174%]

 

“애초에 없던 거지.”

 

공기의 흐름이 멈춘다. 우그러진 문과 깨진 유리 파편들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고 있다. 내 입술을 바라보던 협상가의 시선은 너머의 창문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헬기의 조명은 갈피를 못잡고 주변을 오간다. 그렇게 관리실의 사건도 보이기 시작했다. 야간 경비가 가슴을 부여잡고 계기판 위에 엎드려있었다. 이미 창백해진 피부, 빛을 잃은 동공이 눈에 밟혔다.

 

이제야 하나의 사건에서 벗어났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협상가는 머리를 부여잡더니, 이내 미친듯 웃다가 휴대전화를 꺼내어 누군가에게 여섯 자리의 숫자를 읊었다. K-5의 총기 번호였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닭다리를 바라보았고, 내가 물어뜯은 흔적이 선명했다. 얼마가지않아 전화가 걸려온다.

 

“아직 부여하지 않은 번호라고…”

 

그는 내가 앉아있던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보상 책정 중…]

 

나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벽지가 보인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문장들이 보였다.

 

[초과 달성 – 특성 부여 : 예민한 감각 (On/Off)]

[연쇄 완료 – 특성 부여 : 자동 조정

[업적 - 특성 진화 : 아둔한 자를 위한 기회 > 너머의 기회]

 

만선의 꿈을 이루고, 드디어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은 평온했다. 고요를 찾아 잠에 들었건만, 최근의 꿈속은 잔잔할 때가 없었다. 악몽은 얼마나 지속될까. 혹여,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건 아닐까. 열번의 구원을 마무리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적어도 끝을 만나지는 않을 테지. 다만, 지금은 그를 기회로 삼고 있어도 언젠가 예전을 바라게 될 나를 알고 있다. 그때가 되면, 꿈으로 이룩한 결과들을 잃어버리게 될까.

 

묵직한 가방에게서 기회에 대한 책임을 느끼며 뒤늦은 고민에 휩싸인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보상 목록을 보며, 기름묻은 입술을 깨문다. 특성의 성향에 따라 앞으로의 미래를 예상할 수 있겠지. 예민한 감각, 자동 조정, 너머의 기회… 나는 앞으로도 죽음에 가까워한다.

 

“예민한 감각.”

 

[예민한 감각 (Off)]

오감을 예민하게 한다. 정도를 조절할 수 있으나, 그로인한 피로도는 감쇄되지 않는다.

 

조절되나 감쇄되지 않는다. 개인의 능력에 대한 편차나 특성의 보조에 따라 피로도를 줄일 수 있지만,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라… 온오프 기능이 달려있는 이유가 있었다.

 

“자동 조정.”

 

[자동 조정]

조준과 발사를 거치는 모든 무기에 대하여 영점을 자동 조정한다.

 

 

…완전한 전투 특성이다. 본래 자신의 무기는 조정을 거칠 수 있으니, 무기를 탈취하여 사용하는 것에 특화된 특성이다. 보급이 없는 게릴라전이나 진형이 무너진 난전에서 빛날만하다. 하지만 사용될 일이 없어야할 특성이기도 했다. 그런 곳은 천운이 있어야만 살 수 있을 테니.

 

“너머의 기회.”

 

[너머의 기회]

인지와 판단의 과정을 무시하고, 일 초 뒤의 위험을 시각적으로 표시한다. 색상에 따라 위험도에 차이가 있다.

 

…조건이 사라졌다. 다만 확인이 필요한 능력이다. 위험도에 따라 차등된 색상으로 표시된다면 경우에 따라 받아내도 괜찮을 공격을 골라낼 수 있으니까. 나는 조심스레 방문을 연뒤 주방에서 양식기와 식칼을 챙겼다. 미처 벗지 못한 전투화에서 둔탁한 걸음소리가 났다.

 

직후, 방으로 돌아와 바닥에 베개를 둔다. 위에 발을 올려둔 채 포크를 떨어뜨린다. 포크는 두꺼운 가죽을 뚫지 못했고 위험은 표시되지 않았다. 그에 식칼을 거꾸로 떨어트리자 녹색 위험도가 표시된다. 칼날은 비록 튕겨나갔으나, 전투화 표면에 작은 칼자국이 생겼다.

 

방어구를 뚫지 못하는 공격은 녹색.

 

이번에는 전투화를 벗은 뒤 포크를 떨어트린다.

청색, 살갖이 긁혀 생채기가 났다.

다음은 포크나이프… 주황색이다.

나는 즉시 발을 뺐다. 베개가 거칠게 찢어진다.

다음은… 식칼. 빨갛게 물든 위험도에 서둘러 발을 피한다. 이번에는 궤적이 보였다. 베개에 튕긴 뒤 날이 가르고 지나갈 지점이다. 경로에 있던 다리를 재빨리 물리자, 근소한 차이로 그곳을 지나는 칼날이 번뜩였다.

 

이건 여분의 목숨이 될 능력이다. 확실하다. 그러니, 앞으로의 악몽은 더욱 큰 위협을 지니고 있을 거다. 대가 없는 보상은 없다. 가방에 챙겨온 현물은 이 시스템에게 가치가 없을 터였다. 그러니 나는 준비해야했다. 다음 꿈에서는 더욱 다양한 총기를 탈취할 필요가 있다. 진척도가 오르는 중간에 목숨도 갱신되었었다. 지금은 몇 번의 꿈이 남았을까.

 

“남은 목숨… 이런.”

 

[9/10]

 

준비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오늘 밤에 결과가 나온다.

 

나는 안쓰던 붙박이장에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치가 떨어진 브랜드나 촌스러운 디자인 등, 처리가 비교적 쉬운 금은 꿈에서 가져온 가방에 몰아넣는다. 남은 건 재질 자체가 가진 가치가 적은 액세서리나 한정판. 이것들은 고등학교 동창들을 통해 팔아볼까? 군대를 다녀오니 필요 없어진 물건이라 하면 이야기가 쉬울 터였다. 믿지 않는 눈치라면, 사고 싶은 물건들이 생겼다고 둘러대도 좋겠지.

 

하나의 브랜드에 환장한 놈들도 있으니, 연락만 닿는다면 판매가 어렵지는 않을 거다.

 

좋아, 이제 마무리할까. 아버지와 여동생의 방에서 가장 먼 화장실에 들어가 꿈의 흔적을 지운다. 화약 냄새가 배어버린 옷은 물에 담궈놓고 세제를 풀어놓고, 전투화는 온수로 굳은 핏물을 닦는다. 물기를 제거한 전투화는 안보이는 구석에, 여러 번 짜낸 옷은 방의 행거에 걸어둔다. 끝으로 창고에서 방청유를 가져와 총기를 닦는다. K-5 의 분해는 교육받지 못해 어설펐으나, 요령으로 어떻게든 마무리했다.

 

정리가 끝난 시각은 새벽 네시. 방의 침대에 누워 숨을 돌린 나는 물을 마시려 주방을 찾았다. 겸사겸사 능력을 테스트한 식기도 제자리에 두고 돌아서는데, 세화의 방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알아차렸다. 보조 조명인듯, 얼핏 보면 지나칠만한 희미한 불빛이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나는 그녀의 방문 앞에서 특성을 활성화했다.

 

‘예민한 감각.’

 

향수에 파묻힌 체취가 난다. 모든 향이 구분된다. 방향제, 향수, 화장품, 체취. 기이하게도, 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하는 건 그녀의 살냄새였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도 들린다. 손가락에 스치는 소리의 질감이 다르다. 빳빳한 새 종이와 약간의 습기를 머금은 섬유의 차이다. 그 사이에 용지 위를 노니는 만년필이 끼어든다. 평소에도 자주 사용하는 필기구일까. 전체적으로 강성을 띈 촉임에도 길들어 부드러운 촉감이 전해진다.

 

밤이 긴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예민한 감각.’

 

천천히 물러난 나는 침대에 누워 한참동안 휴대폰을 뒤적였다. 비싼 값을 치룰 사람을 찾아, 평생동안 담을 쌓고 살던 SNS 를 켜둔 상태였다. 노력과 향략, 외로움과 어울림이 공존하는 세계를 유영한다. 해가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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