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커니 서서 멋대로 자라나는 감정을 삭이는 나를 두고서, 일행들은 각자 제 차림을 확인했다.
"그럼 이제 들어가볼까요? 다들 낙오자라는 거 티 내지 마시고요."
"사람 비슷하게 생긴 놈들은 시선주지 말고."
벚꽃과 서리단풍을 선두로 다시 도로 위를 걷는다.
당초의 예정보다는 느린 속도, 서리단풍의 머릿속 실계획은 애초부터 여유가 있었을까.
햇빛에 달궈진 돌 위로 아지랑이가 아른거리고, 우리는 거대한 그늘 안에 들어선다.
제 존재감을 과시하던 태양이 손쉽게 가려져, 나는 한 번 더 위를 올려다보았다.
정성과 투박함이 함께 맞물려 있는 성벽이 눈에 한가득 들어찬다.
황량하다는 말이 그토록 어울림에도, 서리단풍은 쪽문 앞에서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몇 초를 기다리니 반대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내부의 사회를 어떤 형태로 유지한 걸까.
이런 곳에 배치할 인력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눈높이의 덮개가 열리고 푸른색 홍채가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작은 창으로 볼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있을 텐데, 그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마을에서 오셨습니까?"
"그렇네."
마을이라, 무덤의 사람들은 우리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걸까.
자연스러운 절차에 나는 곁눈질로 벚꽃의 안색을 살폈다.
나와는 다르게 변함없는 기색이다.
고개를 돌려 괜스레 쭈뼛대는 잿불과 겨울비를 보니 조금 안심이 된다.
찰나를 빌려본 단비야, 워낙 신경이 두꺼우니 괜찮을 터였다.
잠금쇠를 푸는 소리와 함께 별다른 확인절차 없이 문이 열렸다.
우리를 가장 먼저 반긴 건 짙은 커피 향이었다.
벚꽃의 어깨너머로 본 탁자 위엔 낡은 수첩과 랜턴이 올려져 있었고, 문을 열어준 청년은 금세 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스피어스, 요즘 상황은 어떻나?"
"큽, 쿨럭. 우선 방명록부터 적을게요."
이미 일면식이 있었는지, 서리단풍이 그에게 묻는다.
기침 덕에 침이 거나하게 들어간 잔을 탁자 위에 두고서, 수첩을 펼쳐 서리단풍을 적어낸 남자가 우리를 바라봤다.
"자, 나머지 분들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시든 벚꽃, 겨울비, 눈꽃, 잿불, 단비다."
"무슨 일로 단체로 오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선 알겠습니다. 목적은요?"
"계시 확인, 전이."
서리단풍의 말을 빠르게 받아 적던 스피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계시요?"
"그래."
"껍데기들인가요?"
"그렇네. 사후의 모습만 본 터라 확인하기 위해 왔네."
스피어스는 잠시 턱을 쓸더니, 건너편의 책장에서 가장 우측 상단에 있는 서류철을 꺼내왔다.
"우선 저희가 알고 있는 껍데기의 동향은 문제없었습니다. 확인해보시죠."
서리단풍이 서류철을 열어 절반을 벚꽃에게 건넸다.
그 모습에 스피어스가 눈썹을 움찔댔으나 별 다른 제지는 하지 않았다.
이내 입이 간지러웠는지, 그는 서리단풍에게 다가가 소곤거렸다.
물론, 다 들린다는 게 흠이었지만.
"혹시, 시든 벚꽃 씨도 연장자이십니까?"
"그럼, 나보다 연장자지. 다른 사람들은 아까 알려준 순서대로야."
그 대화에 시든 벚꽃이 입꼬리를 씰룩댔다.
나이에 관한 내용 때문이 아니라, 상황이 우스운 거겠지.
아직 내가 어수룩할 때 실수로 할머니라 불렀어도 그저 고개를 갸웃했을 뿐이었으니.
"흐으, 낙오자 분들은 나이를 알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실수했네요."
"모두 개의치 않으니 걱정하지 말게."
"알긴 알아도 제 마음이 말이에요."
뭐랄까... 스피어스는 굉장히 어색해보였다.
과장된 몸짓이나, 말의 내용에 따라 바뀌는 표정까지도.
자신이 무엇을 신경 쓰고 있는지 대체 왜 알려준다는 말인가.
그런 내 시선을 읽었는지, 벚꽃이 내 손등을 감쌌다.
"정상이에요. 따지자면 저희가 이상한 거고요."
"...그런가요?"
"그럼요. 다들 사회 물이 덜 빠졌을 때는 저랬어요. 푸른 꽃잎도, 눈꽃도 그랬으니까요."
조곤조곤 말해주는 그녀의 말투에 날이 서있던 내 태도도 서서히 가라앉는다.
지난 대화가 내 어딘가를 긁었는지는 몰라도, 부스럼을 만들었었나.
"그러니까 삐죽대지 마세요."
익숙한 잔소리를 끝으로, 서리단풍이 벚꽃에게 말해왔다.
"확실히 이상징후는 없습니다. 오르투헨이나 하네린은 보이지 않은지 꽤 되었고, 다른 잔챙이는 초원 너머까지 유인에 성공했다는 군요."
"흐음, 그런가요..."
벚꽃은 서류를 정리해 스피어스에게 넘겨주었다.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으며 어려워하는 폼이 어색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다수의 판단에서 이상한 건 내쪽일 테니까.
"잿불 씨?"
"...네? 아, 네."
시설의 상태를 확인하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었는지, 응답이 느린 잿불이다.
벚꽃은 살포시 미소지으며 그에게 질문한다.
"껍데기들, 마지막 장면에서 얼마나 있었죠?"
"어... 정원을 가득 채울 정도였으니 대략 40마리는 되어보였습니다."
서리단풍이 벚꽃의 생각을 뒷받침하려 바깥의 세계에 대한 정보를 준다.
출처는 단비였겠지.
"바깥의 징후는 없었답니다."
"아무래도 오르투헨이 초원에서 껍데기를 끌어온 거겠죠?"
벚꽃은 쉽게 정황을 파악했는지, 이마를 짚고 시선을 흐렸다.
해야할 일을 정하는 모양이었다.
"우선 꼬마를 찾아가기는 해야겠네요."
"네, 예정대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시든 벚꽃과 서리단풍의 합은 난생 처음보는 것이었지만, 겨울비의 흐뭇한 표정을 보아하니 예전에는 저런 일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뒷모습이 마치 부부 같아 보이는 건 나 뿐만의 생각이 아닐 거다.
아무렴, 단비의 소리 죽인 반응이 열렬한 게 증거가 되겠다.
이쯤 되니 확신이 들었다. 다들 소풍 온 기분이라도 되는지,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격양되어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침착하기를 다짐할 차에, 시야의 모퉁이에 잿불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잡혔다.
금세 이 장소에 흥미를 잃은 모양이었다.
오래된 냄새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건지, 그는 자꾸 불이나 쇠의 주변만을 맴돈다.
못내 이해하지 못해, 나도 모르게 책장의 자료들을 쓰다듬는다.
까끌한 촉감의 낡은 종이가 태반이다.
보관 상태로 유추하자면 이것들은 전부 사본이겠지.
일정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옛 도서관을 경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은 건지, 둘이 한참을 소근거리던 한 쌍의 낙오자 중 하나가 스피어스를 부른다.
그 주인공은 완숙한 듯 서투른 남자였다.
"스피어스, 아이들은 지금도 랜드릭이 가르치고 있나?"
"예, 아직 정정하십니다."
마음 편히 존칭을 유지하겠다고 결정한 건지, 한결 편해진 대답이었다.
넓지 못한 공간이지만 어떻게든 각자의 시간을 보낸 모양이었다.
겨울비의 표정은 좀처럼 읽히지 않았지만, 금방 제 모습을 찾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많은 낙오자들을 다듬어낸 지분이 있는데, 쉽게 흔들릴 리가 없었다.
이런 걱정은 기우일 뿐만 아니라, 그에게 실례되는 행동이겠지.
"참, 벚꽃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게 되죠?"
"네, 꼬마라는 말이 입에 붙어 버린지라 정작 앞에서 어떨지는 모르겠어요."
그들도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나는지, 서로를 대하는 말투가 편해져 있다.
좀 더 어려졌다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분위기가 반백은 훌쩍 넘어가 보여 애석할 따름이다.
그들의 나이를 수십 번은 귀에 때려 넣어준 푸른 꽃잎의 학습효과가 나타난 결과여도, 현재에 와서는 정말 그렇게 보였다.
충분한 정보를 얻은 서리단풍이 슬슬 자리를 떠나려는 기색이자, 스피어스가 급히 말을 덧붙인다.
“낙오자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원로분들이 본래의 정체성을 잃으면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하셨지만, 대부분의 원로가 교체된 후로 옛말이 된 지 오래니까요.
랜드릭 할아버지가 무리해서라도 껍데기들을 유도하도록 한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이 사회는 더 이상 조건 없는 호의를 유지하지 못할 거라고 하시더군요. 더불어, 경계에 선 아이들도 이제는 몇 명 남지 않았습니다.”
서리단풍은 여타의 말없이 등을 돌렸다.
이미 알고 있을 내용인지, 아니면 실황이 당연하다 여긴 건지는 모를 일이나 단지 다시 곱씹어볼 뿐이겠지.
고작 사람 한 명 지나갈만한 비좁은 통로를 통하였기에, 나는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해 추론한다.
우리는 짧은 만남을 너무도 쉽게 뒤로 한채, 재차 무덤으로 향한다.
아까 두드렸던 쪽문과 동일한 문, 다만 이번에는 직접 열어 안으로 들어선다.
삐걱이는 경첩이 이 사회에 낙오자를 환영할 장소는 없다는 걸 알려주는 듯했다.
최초의 상상처럼 무덤은 고요했다.
작열하는 태양빛은 차양막에 가려 우리에게 닿지 못했고, 그 덕에 기이한 정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구획 별로 달라지는 건축 양식과 관리되지 못한 낡음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그늘진 곳에 숨어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분명, 그들 중 몇은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무장을 확인하거라, 껍데기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말 속의 내용과는 다르게, 서리단풍은 곳곳의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품 속의 칼자루를 어루만지는 것이 사뭇 매섭다.
벚꽃은 미간을 살짝 찌푸릴 뿐이고, 단비는 일행 뒤로 숨은지 오래였다.
겨울비의 동공이 흔들리는 걸 보아하니, 나나 잿불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이고 있겠지.
대체로 몸은 마음 같지 못했으니까.
자연히 서둘러지는 발걸음이었다.
벚꽃의 걸음이 조금 더 급했으나, 서리단풍의 보폭 덕에 둘은 같은 선상으로 앞장서게 되었다.
삭막한 풍경이 이어졌다.
가로수는 아무렇게나 웃자라있어 흉물스럽다.
길바닥엔 오래된 토사물 자국이 선명하다.
골목길은 어김없이 거미줄이 쳐졌으며, 교차로의 분수는 전부 비쩍 말랐다.
심지어, 각 거리를 향해 뻗어 있는 조형물은 심각하게 파손되어 원 형상을 알아볼 수 없다.
찬란했던 이상이 쇠락했음을 불편할 정도로 직설적이게 표현하는 환경이었다.
벚꽃이 시선이 오가는 때마다, 그녀에게서 낯선 향기가 피어오른다.
이곳저곳 갈라진 바닥을 따라서 우리는 시장으로 보이는 곳을 지난다.
상품은 하나같이 신선하지 못했고, 호객행위는 일절없이 다들 침묵한 채다.
물건을 들고 화폐를 건네면, 포장하여 주기만 한다.
이들에게 삶이란 대체 무엇이 되어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을씨년스럽군."
겨울비의 혼잣말에 공감하지 않은 이는 없었다.
생명은 있으나, 생기는 없는 거리였다.
호기심 어린 눈길이 점차 탁해진다.
우리는 이내 골목길로 들어선다.
서리단풍의 손에는 어느새 기다란 나뭇조각이 들려 있었고, 그 끝엔 끈적한 실타래가 가득했다.
"으으..."
다리 여러 개 달린 생물을 끔찍히도 싫어하는지, 단비가 질색하며 몸을 잘게 떤다.
간만의 싱그러움에 나는 웃음기 가득한 말을 건넨다.
내가 의도하기에는, 인정을 넘치도록 가득 담은 말투였다.
"그렇게 싫어요?"
"그럼 좋겠어요?"
물론, 오는 말이 항상 가는 말 같지는 않았다.
나는 괜히 입술에 침을 묻혔다.
잠깐 입을 열었을 뿐인데, 텁텁한 맛이 느껴졌다.
사방에 내려앉은 먼지가 정도를 지나친다.
바람이 좀처럼 불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이때 만의 현상은 아닌 모양이었다.
대체 기압이 어떻게 되어 먹은건지.
팔이 닿지 않을 곳을 올려다보니 마치 하늘에 금이 간 듯했다.
빽빽하게 쳐진 거미줄에 비치는 햇빛이 무성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지만, 그럼에도 불쾌한 풍경이었다.
잠깐을 더 걸어, 다시금 대로변으로 나오니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옷을 털어댄다.
특히, 검은 옷을 입은 벚꽃과 닭살이 잔뜩 오른 단비 쪽이 극성이었다.
"여기가 연금술의 거리다."
이번 거리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건물들의 층계가 낮아 시계가 탁 트였으며, 동일한 구획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중구난방이었다.
도전 욕구가 기준을 아득히 초과하기라도 한 건지, 그리스 석조 기둥에 황토벽을 세우지를 않나.
목재 건물을 잘 지어놓고 뜬금없이 유리로 천장을 마감하지 않나.
"개판인데요?"
"이것저것 시도하는 걸 미덕으로 여긴 양반들이니까. 이들에게 관념은 단순한 사치였다."
서리단풍은 여상하게 말했으나, 가슴과 어깨가 유난히 도드라진 것을 보아 그가 살았던 곳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그것과는 별개로, 다행스럽게도 여기는 사람사는 느낌이 났다.
뭔가 터지는 굉음이나, 쇠가 가열차게 맞붙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니 공장지대를 보는 감상까지 들었다.
벚꽃 역시 감회가 새로운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단순히 쇠퇴하고 부식된 것이 아닌, 나름대로 나아가는 모습에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가장 신난 건 역시 잿불이었다.
구획을 지나칠 때마다 눈을 반짝였던 녀석인 터라, 지금은 콧구멍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는 듯 싶었다.
"후욱...후우욱..."
쉽게 말해 변태 같았다.
잿불의 꼬락서리를 보아하니, 여긴 마을의 공방과 비슷한 용도였지 않았을까.
언젠가부터 생활공간과 점점이 뒤섞여 이런 모습이 되었을 거다.
당장 바로 앞의 건물에 달려가 얼굴을 부비는 잿불을 제지하며 서리단풍에게 묻는다.
"어디로 가야할지 아시겠습니까?"
"굳이 찾을 필요없다."
그는 말과 동시에 어느 건물 앞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벚꽃은 이미 앞서 움직여 무언가를 찾는 눈치였다.
먼발치에서는 아무리 봐도 사람이 거주할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외벽하며, 내부를 가득 채운 복잡한 구조를 보면 건물 전체가 어떠한 용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었다.
잿불을 질질 끌고 가자, 그 역시 건물을 보았는지 눈을 희번덕거리며 외친다.
"골드버그 장치잖아요!"
허, 어떻게 한 번에 보고 아는 걸까.
그쪽 방면의 사람들은 뇌가 개조된 것이 분명했다.
서리단풍과 벚꽃 옆으로 다가가니 더욱 발광하는 잿불 덕에 손아귀 힘이 점차로 들어간다.
내적 부부는 여러 크기의 쇠구슬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구슬들은 각자 다른 색으로 빛났고, 저마다의 번호와 이름이 음각 되어있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지, 서리단풍은 여러번 헛물을 들이켠다.
그러면서 굳이 중얼대는 이유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건가? 흐음...이건가? 흐으음..."
"여기있잖아요."
잠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벚꽃이 단 번에 찾아내자, 서리단풍이 괜한 말을 한다.
"젊은 게 좋기는 좋아."
"그거 몇 살 차이난다고 그래요?"
"신체나이 30년이면 큰 차이 아닌가?"
가볍게 다투는 그들이 어색하다.
마을에서는 그토록 점잖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곁에 있던 겨울비는 질렸다는 듯 거리를 벌리고, 잿불은 어느새 도망가 건물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간다.
그 꼴을 보고 있으니 문득 아득해져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번잡함 사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껴있는 구슬을 살핀다.
짙은 고동색에 번호는 3, 이름은 랜드릭이었다.
완연해진 오후의 풍경 안에서, 벚꽃은 시답잖은 말싸움을 이어가며 자리를 옮겼다.
서리단풍은 그녀 곁에 딱붙어 따르고, 겨울비는 이젠 아무래도 좋은지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뒷짐 진 옆모습이 유난히 적적해보였다.
직후에 몸을 반쯤 돌리자 건물 뒤편으로 향하는 단비가 있었다.
이내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는 과반수에 찬동하여 입구를 통과한다.
가장 먼저 합성목재를 깔아 놓은 긴 복도가 나를 반겼다.
통일성 없는 간격으로 걸려진, 순차적인 번호가 적혀 있는 팻말 아래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눈썰미가 어찌나 예리하고 날랜지, 벌써 6번방으로 향하는 잿불이었다.
고개를 두어번 저으며 구슬에 적혀있던 3번방으로 향한다.
과연 엉덩이를 씰룩거릴 정도로 두근대는 일일까.
호기심에는 장사가 없어 1번방의 내부를 곁눈질한다.
첫 소감이랄 것도 없이, 한 눈에 담기에는 벅찬 장치였다.
구슬이 굴러갈 길은 참으로 다양해보였고, 저런 방식까지 써야 할까 싶은 방법도 있었다.
두꺼운 유리벽 너머로 본 감상은 그 정도에 불과했다.
순간에 이루어진 평가였지만, 적어도 내 상식 선에서 비데가 있어야 할 이유는 결단코 없었다.
걸음마다 삐꺽이는 소리가 들렸다.
용도를 벗어난 목적은 없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쇠구슬을 장치에 집어넣으면 제 주인에게 신호가 가는 듯하니, 손님이 기다리는 시간이 짧게 느껴지도록 배려한 게 아닐까 싶다.
참 영악하기 그지없는 생각이다.
곧이어 다시 만난 두 노부부, 지지부진한 대화가 어설피 끝났는지 정면을 바라보는 각도가 다소 틀어져있다.
체류지에서 칼로 물을 베는 걸 볼 줄은 몰랐는데,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찬찬히 눈동자를 움직여 쇠구슬을 찾으니, 마침 대차게 가열되는 중이었다.
구슬을 지탱하던 고리가 끊어지고 파편이 튀어 종을 때린다.
깔때기 위를 빙글빙글 돌던 구슬이 얼마가지 않아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관 안에서 가속도가 붙은 구슬이 증기기관을 때리고, 결과를 알 수 없는 운동들이 이어진다.
"그래서 랜드릭이라는 분은 누구죠?"
힐끗 쳐다본 벚꽃은 정면을 보지 않고 있었다.
살짝 내리깐 눈, 긴 속눈썹 위로 빛 한 줄기가 내려앉는다.
모처럼 평소와 같은 분위기다.
"낙오자 사이에서 생겨난 세대 중 한 명이에요. 예쁜 누나라면서 어찌나 쫓아다니던지. 그 철없던 꼬마가 이제는 노인이 되었다고 하니 기분이 좀 그렇네요. 둘 다, 너무 어색해하지는 않아야 할 텐데요."
오른팔로 제 몸을 감싸고 있던 벚꽃은 몇 마디 털어 놓고 말을 잃어버린다.
본래라면 서리단풍과 나누어야 할 경험이었다.
그녀에 비해 너무도 젊은 눈꽃은 노력할 뿐 나아가지 못할 테니까.
그 서슬에 자연히 서리단풍을 째려본다.
본인도 알기는 아는지 관자놀이를 벅벅 긁다, 한탄스럽게도 무거워진 입술을 연다.
잘게 떨리는 목소리를 들어, 그에겐 그리도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별 일 없을 겁니다."
둘 사이에 맴도는 기류에는 내가 낄 자리가 없을 것 같아, 소리 없이 자리를 비켜준다.
다시 정문으로 나오니 쪼그려앉은 잿불이 보였다.
두 손에 한 웅큼 쥐여진 쇠구슬을 보니, 곧바로 뇌를 거치지 않은 말이 나온다.
"아서라."
"...눈꽃이 생각하는 거, 그거 아닙니다."
흠칫 놀란 잿불이 쭈뼛대며 구슬을 제 위치로 돌려놓는다.
예상이 맞은 것 같지만, 설마 시도했을까 싶기는 하다.
우리 둘의 억양이 평시와 다르게 조금 거셌는지, 단비가 모퉁이에서 고개를 내민다.
"무슨 일 있어요?"
나와 잿불은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단비가 고개를 갸웃했으나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거리를 두고 생활했을 적에는 잘 몰랐지만,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혹여, 함께 있기에 행동에 변화가 온 걸까.
의심이 샘솟기 시작하는,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매우 경쾌한 색조의 타음이다.
가까운 삼거리 귀퉁이에서 지팡이 끝자락이 불쑥 튀어나오고, 반사된 햇빛이 얼굴 근처로 내리쬐어 눈살이 찌푸려진다.
급히 손을 들어 눈가를 막자, 중지와 검지 사이로 드러난 이는 전체적으로 인자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품이 다소 큰 상의는 움직임에 맞춰 흔들렸고, 허리띠를 맨 바지는 밑단이 짧아 발목의 일부분이 드러났다.
낮은 구두굽이 바닥을 차니 지팡이를 짚은 손에 음률이 파고든다.
잿불과 단비는 눈을 휘둥그레 뜰 뿐이지만, 나는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랜드릭이었다.
"자네가 날 불렀나?"
"...찾으시는 분은 안쪽에 계십니다."
나는 그와 할 수 있는 대화가 없었기에, 서슴없이 그를 인도했다.
의도하지 않게 좁아진 보폭, 지난 삶의 버릇이었다.
불완전하기에 버릴 수 있는 게 더욱 없을, 그런 사람이 어찌 정녕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건지.
나는 훗날에도 낙오자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리라. 짙푸른 막은 일찍이 걷어진 적 없으니.
등장 시점부터 지금까지, 랜드릭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잠자코 들으면 세상이 기울어지는 듯한 낡음 위를 걷는 와중에도 그랬다.
벚꽃 특유의 시들어버린 생기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얄궂은 세상의 각본이 늘 그렇듯, 유리창을 투과해 내리쬔 햇빛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내려앉아 더욱 환히 빛난다.
"...누나?"
여린 감각을 가감 없이 전하는 떨림, 얼굴 근육의 경련이 그가 노쇠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천천히 돌아선 벚꽃과 눈이 마주친다.
가벼운 인사에 그의 이상은 더욱 심해지다, 찾아온 순간보다 짧은 찰나에 가라앉는다.
"오랜만이에요, 랜드릭."
"네, 저도 그렇습니다."
중후하고 낮은 목소리, 살며시 굽은 등이 그의 나이에 비로소 맞물린다.
"단풍 씨도 오랜만입니다. 마지막으로부터 벌써 몇 년이 지났군요."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못내 느껴지는 답답함에 나는 잠시 이 광경과 거리를 둔다.
들끓고 있는 감정은 무얼까.
섣불리 개입하지 못하는 단풍일까, 태도를 정하지 못하는 벚꽃일까.
그도 아니면, 온전한 세월에 물든 랜드릭이 가진 괴리감일까.
제 삶이 이미 뒷전이 되어버린 애처로운 영감들이었다.
"할 말이 많으신 것 같으니, 집으로 가시죠."
"그래요, 랜드릭."
벚꽃은 기억 속의 문장을 꺼내 썼지만 이미 그와는 너무도 떨어진 현재다.
괜히 더 어색해지고 말아, 나는 무심코 크게 박수를 친다.
내 뒤를 졸래졸래 따라온 단비가 화들짝 놀라는 게 느껴졌다.
"하던 대로, 하고 싶은 만큼 하시죠."
벚꽃이 입을 가려 미소지었고, 단풍은 입꼬리를 슬쩍 올린다.
랜드릭은 끌끌 웃을 뿐이나, 나는 아직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아직도 얼이 빠져 있는 잿불을 챙기고, 단비를 내 곁에 둔다.
타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줬으니 이제 그들이 나아갈 차례였다.
옛 풍경이 그대로 녹아 있는 셋을 앞서 보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들이 두런거림은 명확하지 못했으나, 잘못 끼웠던 첫 단추를 다시 풀어내는 데에는 성공한 것 같았다.
약간의 불안감을 삭이며, 조금씩 내 세상으로 돌아온다.
서툴게 조경한 키 작은 수목, 손을 뻗어 만진 열매는 아직 설익어보였다.
귀를 쫑긋 세운 단비는 제 나름의 상상에 지루하지 않아 보였고, 마음은 이미 저 멀리 뛰어다닐 잿불은 주변을 경계하는 짐승 마냥 부산스럽다.
잿불은 언제쯤 정신을 차리는지, 내 동행의 상태가 온전치 못해 걱정이 된다.
일행은 붉은 벽돌집 앞에 다다랐다.
거리 초입의 기형적인 시도는 다 어디 가고, 주변은 얌전한 편이었다.
"끌끌, 거리의 이름이 이래도 발족한 시절 같지는 않답니다. 다 사람사는 곳이지요."
표정을 숨기지 못했나.
곰곰이 생각했으나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으니, 경험에 기반한 대사로 판단된다.
현관의 발판에는 자연히 생긴 흠이 아닌, 인위적으로 만든 듯 각져 있는 흔적이 있었다.
내 시선에 눈을 빛낸 랜드릭은 홈에 지팡이를 끼워 돌렸다.
태엽이 도는 소리와 함께 낡은 경첩이 비명을 지른다.
"누추하기는 하나, 부족하지는 않은 집입니다."
현관 안쪽에 걸음을 딛으니 조명들이 일제히 켜졌다.
천장 위를 가득 메운 유리장식이 시선을 앗아간다.
수없이 난반사되는 백열, 어느 구석 하나 누추함은 찾아볼 수 없다.
생경함에 파묻힌 일행에게 랜드릭이 말한다.
"환영합니다. 어서 들어오시죠."
뇌리에 한 가지 결론이 머문다.
그는 꼬마가 아니며, 곱게 늙지도 못했다고.
나는 벚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기대와는 다르게 자라난 걸 이미 확신했는지 예상외로 담담한 눈치였다.
우리는 집주인을 따라 거실로 옹기종기 들어섰다.
고풍스러운 원목가구들이 즐비하다.
한 켠을 차지한 당구대 위에 얼룩이 가득하고, 선반에 놓인 초는 다 타들고 녹아버려 잔여물만 남아있었다.
"그렇게 살피시면 부끄럽습니다."
집을 나오며 찻물을 올려놓았었는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주전자를 들고 다가온다.
집에 들어오고 난 뒤 지팡이는 온데간데없는 채였다.
그에게 격식이란 어떤 의미인지, 얼마 남지 않은 기대가 짙게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무덤은 우리에게 큰 자극을 주고 있었다.
고작 몇 시간 만에 각자의 평판을 바꿀 정도의 지나침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 영향은 내게도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
막연하게 옳다고 알고 있는, 반복된 학습으로 새긴 행동을 하는 편이 좋을까.
적당한 행동, 나는 자연스럽게 일어나 찻잔을 가져왔다.
먼지 한 톨 없는, 수없이 닦아낸 자기에 내 얼굴이 비쳤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피곤에 찌든 눈가와 살짝 내린 입꼬리, 변화는 찾아볼 수 없는 메마름이다.
탁자에 올려지는 잔 위로 옅은 적빛의 물이 떨어진다.
한 마디의 말없이, 점점 차오르며 일렁이는 표면을 바라본다.
최초의 홀짝임에 이어지는 목울대의 움직임, 그제야 랜드릭이 운을 띄운다.
"제가 잠시 생각을 해봤는데 말입니다. 회포를 풀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 게 아닌가 합니다. 해서, 용건이 있으신 분만 따라오시는 게 나을 것 같군요."
그는 망설임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층계를 오르는 발걸음엔 힘이 없었으나, 어찌 무게감이 느껴지는 걸까.
늙은 계단의 신음을 배경 삼아 느긋하게 차를 마시다 실눈을 뜬다.
잔잔해진 수면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던 벚꽃이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내, 랜드릭과는 확연히 다른 기척이 멀어져간다.
짧은 대화가 두어번 들리더니 방문이 닫히는 소리로 마감된다.
그와 동시에, 나와 단비의 시선이 맞닿는 지점이 있었다.
잿불은 제 몫을 이미 다 넘겼는지, 벚꽃의 앞에 놓인 잔을 든 참이었다.
"어째 어려워 보입니다?"
"서로 못 본 시간이 70년이다. 나름 하고 싶은 말은 있는 모양이다만, 괜찮은 화제가 되기에는 부족하겠지."
서리단풍은 남은 차를 한 번에 털어 넣고서 겨울비를 바라봤다.
벚꽃의 뒷모습이 아직도 남아있기라도 한 건지, 그는 아직도 위층으로 향하는 문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덤으로부터 마을이 분화된 이후부터,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게다."
"제가 낙오했던 해에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뭐기는 뭐겠나. 서로에게 앙금이 가득한 사람들을 모아 놨으니 뻔한 일이지. 체류지는 졸지에 바깥의 연장선이 되어버린 게야."
"그렇다해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곳에 온 이상 지난 일은 이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아닙니까?"
여기까지 오는 사이에 속에 쌓아둔 의문들이 어찌나 많은지, 겨울비의 말은 끊김 없이 쏟아져 나왔다.
정신이 반쯤 나간 줄 알았더니 단순한 기우였던가.
"자네도 처음에는 오락가락하지 않았는가. 꿈에서 아내가 나왔을 뿐인데 분명 나를 따라온 것이라고, 하루 종일 입구에서 죽치고 앉아있던 게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아나?"
"...그런 기억 없습니다."
겨울비의 불만은 폭행에 가까운 비수로 금세 잠재워졌으나, 그의 성정은 어디로 사라지지는 않아 대화가 이어진다.
"그 때는 서리단풍 씨도 불안한 구석이 많지 않았나요?"
"그랬지. 그림을 아예 관뒀었으니, 마음을 덜어내는 만큼 채울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까마득한 옛날 일이 눈 앞에 생동감 있게 펼쳐졌다.
그들의 이야기 속 서로의 모습이 지금과 변함없으니, 더욱 쉽게 상상이 간다.
단비 역시 관심이 동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두 남자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마침 내 입도 간지러워진 때였다.
"찻잔은 왜 감싸고 계십니까?"
"버릇이에요. 원래는 아침에 커피 한 잔 붙잡고 몇 분간 멍하니 있었거든요. 이러면 손이 좀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요. 눈꽃은 그런 습관 없나요?"
"버릇이라 해야할지, 예전에는 글을 썼었죠. 이룬 건 하나 없었지만 나름 직업이라 여겼는지, 지금도 눈 앞에 활자가 가득하면 안심이 되고는 합니다. 뭐, 그런 정도죠."
어느덧 만개한 이야기꽃은 내 머릿속의 지난한 걱정들을 지워갔다.
벽난로의 불씨나 남은 체온조차 식어버린 자리들은 신경에서 벗어난지 오래였다.
- - - - -
갑작스러움이 그렇게 문제가 될 수 있나?
이제 꼬마라고 부르기엔 난해해도 내 눈에는 아직도 어려 보이기만 했다.
제 할 일을 하며 살아갈 뿐인데, 심통이 난 듯 거리를 유지할 이유가 될 수는 없으니까.
무슨 역병이 창궐한 것도 아니고, 나를 꺼려하는 게 너무 선해 서운했다.
감정을 표하는 건 피곤한 일이지만 랜드릭에게는 그게 맞는 대응이겠지.
천장의 장식들은 꽤 낯설었지만, 이 계단은 예전과 같은 느낌을 준다.
비록 군데군데 세월이 묻기는 했지만 꼬마가 마지막까지 사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다들 모여 있는 곳에서 누나라 칭하기가 어색했겠지.
긍정적인 생각을 품고서 서재의 문을 연다.
예상과 사뭇 다른 향기, 꼬마의 체취는 어느새 진해지다 못해 칙칙해져 있었다.
광량이 적은 등 하나를 켜놓은 방, 난잡하게 어질러질 책자들이 답답하게만 보였다.
장 위의 먼지들은 훑어내기 힘들었는지 호흡마다 약간의 매캐함이 스민다.
주름이 자글자글해진 꼬마, 이젠 속절없이 영감이라 불러야 할까.
랜드릭은 앞서 있던 활동들이 버거웠는지 소파에 몸을 파묻어놓은 채였다.
"오셨습니까?"
"그래, 꼬마 영감님."
"스스로 말하기에 어색하지 않으신가 보군요. 정말 마냥 어려 보이시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랜드릭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쓸쓸함이 치밀어 올랐다.
"혹시 오르투헨이 어디있는지 알아?"
꼬마는 눈을 잠시 크게 뜨더니 슬며시 미소지었다.
살짝 말려들어간 입술에 그의 나이가 한층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슬슬 떠나시려는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계시가 있었어."
"껍데기들이 무슨 일을 벌이나요?"
"과정은 모르지만 결말은 알지."
랜드릭은 작은 침음성을 내더니 엉덩이를 들썩이며 일으키려 했다.
못내 안쓰러워 그를 제지한다.
"있어. 어떤 거 가져오면 돼?"
"탁상 위에 있는 서류철입니다."
두툼하니 많은 노력이 들어간 모습이었다.
몇 명 남지 않았다 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해낼 수 있었을까.
"애들 몇 명 없다더니?"
"허허,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참, 푸른 꽃잎이 여기에 있는 건 알고 계십니까?"
그녀의 이름이 왜 여기에서 나올까.
먼 미래에 보자며 쾌활한 모습으로 떠난 사람이었다.
온통 남자들 뿐인 마을인지라, 다들 그랬던 것처럼 나와 많은 교류가 있었다.
오래된 일이 아니라는 점 외에도, 전이를 맞으러 가는 것 치고는 유난히 밝았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눈꽃이 아직 어설플 때, 그녀에게 많이 의지하고는 했었는데.
"푸른 꽃잎이?"
"예, 시기가 좋지 않게 맞물려서 껍데기들에게 호되게 당했죠. 그 후에 저희에게 의탁했습니다. 다 죽여버리겠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작은 무리는 어느 정도 청소하는데 성공했고, 지금은 오르투헨에게 꽂힌 상태입니다. 그 서류를 보내온 것도 푸른 꽃잎이죠."
눈꽃에게 비밀로 하는 편이 좋을까?
내심 다시 그녀를 보길 원한 티가 났었지.
"껍데기 대부분을 초원 너머로 모아놨습니다만, 요즘 들어 오르투헨이 들쑤시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놈들의 기억이 휘발성인지라, 서열을 재각인 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르투헨의 주기는 어떻게 돼?"
"점점 길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기록된 것이 2년전이죠. 다만, 지금 아래층에 계시는 분들을 전부 기용하면 처리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놈도 예전에 비해 많이 늙어서요."
지성의 수위는 사람과 진배없고, 경험을 축적하기에 짧지 않은 시간이다.
계시가 재현되기에 충분한 조건들, 눈꽃이 현장에 있던 이유는 푸른 꽃잎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순식간에 맞춰지는 사건의 일련이었다.
"그럼 잡아야 하나?"
"납혼당을 걱정하시는 거라면 괜찮을 겁니다."
랜드릭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해왔다.
적임자가 없는데 뭐가 괜찮다는 걸까, 설마 건강에 적신호가 울리고 있나?
"노망 안 났습니다. 단지 오르투헨도 껍데기라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본신은 이미 전이를 마쳤더군요."
"...확실한 거야?"
"예, 저희도 안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기억 주기가 길어지면서 하네린의 이성이 돌아오는 순간에도 영향을 미쳤죠. 덕분에 짧게나마 대화가 가능했습니다. 하네린은 단순히 전이를 포기했을 뿐이었지만, 낙오의 사유가 오르투헨과 엮여 있어 정신이 나가버렸던 모양입니다. 여러 번 나눠 기록한 결과가 사실을 알려주더군요.
그에 따르면 껍데기의 생성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요인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는 게 됩니다.
특이개체는 하네린 하나 뿐이죠.
해서, 벚꽃 씨가 납혼당에 담아야 할 기억은 다른 일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랜드릭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까.
하네린의 증세에 대한 사실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꼬마의 말을 믿기가 어려웠다.
낙오자가 본인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만큼 우스운 일이 있을까.
체류 기간이 세자리를 넘었건만, 근간조차 부실했다는 것이.
"증명할 수 있어?"
아무래도 믿지 못할 말이었기에, 나는 굳이 다시 되묻는다.
"벚꽃 씨, 아쉽게도 저는 이제 낙오자를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거주민들의 안녕을 위해 사는 것이죠. 지금은 무덤이라는 명칭 역시 개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확인은 직접 하셔야 할 겁니다."
랜드릭은 고장난 몸을 이끌어 먼저 서재를 나선다.
힘없이 천천히 밀려나는 문, 곧이어 수없이 반사되는 조명에 그가 파묻혔다.
너무 앞서 자라버린 꼬마는 고개를 돌려 짧은 감흥을 덧붙였으나, 나는 명암으로 뒤덮인 표정을 꿰뚫어 볼 수 없다.
"당신의 바람대로 제가 아직 꼬마였다면 모를 일이지만, 이제 이곳이 현실이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이제 너무 늙었으니까요."
영원을 가진 나에 비하기가 무색할 정도로, 랜드릭에게 약속된 건 없었다.
시간은 그에게 더 많은 양분을 하사했고, 그의 지난 삶은 내 길고 긴 젊음보다 더욱 값진 것이었다.
나는 생의 끝자락에 선 꼬마를 보았으나, 여전히 낙오되어 헤매고 있는 나와 비견될 뿐이었다.
과연 누가 어린 건지, 해답은 우리 둘 누구에게도 찾을 수 없으리라.
...눈꽃이라면 모를까.
미약한 온기마저 자취를 감춘 서재를 한 바퀴 훑어본다.
랜드릭의 체취가 묻은 자료를 옆구리에 끼우며 일어섰다.
내게만 들릴 한숨으로 걸음을 옮긴다.
아직 죽지 못한 마음보다 먼저 지친 다리, 아직도 계단을 내려가는 영감이 보인다.
어린 영감님을 앞지를 용기는 없어, 문지방에 기대어 그를 지켜본다.
그의 본심은 어디에 있을까?
결심의 기반을 둔 옛날일까, 제 살갗을 허물어 세운 현재일까.
이런 고민은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흘러간 만큼만 아파해야 하겠지.
거실에서 단비와 잿불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간간히 들려오는 중년의 목소리 그리고 눈꽃은 예처럼 소리 내어 웃지 않는다.
되려 비웃음에 가까울, 짧게 튀어나오는 자조만이 그의 곁을 지킬 뿐이었다.
해진 슬픔이 어려 있던 랜드릭의 얼굴이 단계적으로 펴지며, 그 역시 거실로 모습을 감춘다.
나는 난간에 매달려 치렁치렁한 내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든 건 밝음 뿐인지, 활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은 무채색이다.
오르투헨은 이미 떠난 뒤라...
그럼 납혼당은 내가 무엇을 담길 원하는 걸까.
아니면, 나도 단비처럼 다시 찾아가야 할 것이 있는 걸까.
선임에게 들은 건 단순한 지식 밖에 없어 제 자신을 돌볼 지혜는 항상 부족함을 알았다.
아직도 난해하기만한 혼이라는 단어는 더욱 그랬다.
가장 젊은 연장자라는 호칭처럼, 시든 벚꽃이라는 이름을 건너뛰어 생긴 그림자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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