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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13

한 걸음 (3)
심연, 미약한 광택조차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나지막하게 울리는 심장의 고동이 유난히 크게 들리는, 빈틈없이 밀폐된 공간이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유난히 시리다. 손을 뻗어 앞을 더듬자, 무언가 뭉개져 피부를 덮어온다. 이 역시, 내 몸을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나는 눈 속에 파묻혀있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자의 묘비 위를 덮는 울음 덕에, 무뎌진 일부의 감각이라도 가야할 방향은 알고 있었다. 손과 발을 휘저으니, 체온은 높아지나 주위는 여전히 춥다. 결정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빛 줄기 역시, 서늘함을 이겨내진 못했다. 곧이어, 눈덩이가 쏟아져내렸다. 창백하게 질린 대지, 단 한 줌의 푸름을 쥐지 못한 땅이 내 눈앞을 메웠다. 내리쬐는 햇살은 반사되어 내 눈을 찔러왔으나, 이미 세상은 온통 백.. 2021. 3. 20.
한 걸음 (2)
수고가 낮은 종으로 경계를 나눈 휴식처에서 한 걸음 멀어진다. 자연스럽게 다가왔던 고양이는 그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본래의 자리로 향한다. 사회에서 길러진 그들은 뒤를 보지 않으며, 몽환적인 빛에 흐려진 정면을 향한다. 네온, 방전관 속의 저항이 투명한 물줄기에 산산이 부서져 흩날린다. 한 순간의 명멸을 늘어뜨리며, 횡단보도 앞에 선다. 도로를 주행하던 차량이 나를 인식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옅게 펼쳐진 막을 따라 흘러내리는 빗물이 기어코 지하수로 떨어져내린다. 순식간에 생겨난 물의 항로, 그 위로 옅은 청색의 테두리가 인상적인 자가용이 다가와 코앞에 멈춘다. 안타깝게도, 이 모든 장면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안락한 좌석에서 음악을 들으며 우수에 젖어있을 누군가에게 간단한 목례를 하고, 시선을 높은 .. 2021. 3. 20.
한 걸음 (1)
적색 한기, 불꽃이 아무리 탄식을 쏟아내도 우울하게 내려앉은 기색들은 변화의 조짐이 없으니. 스미는 바람은 낮게 불어와, 웅크린 몸을 더욱 작게 만든다. 숙여진 고개는 지나온 길에 새긴 경험이나, 이로움이 없으며. 숨을 내쉴 때마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김이 마치 본인의 혼 같았기에, 그는 장작을 더 집어넣었다. 기세를 키우는 화염, 시야는 좀 더 화사해졌으나 주변은 여전히 어두움에 옷깃을 여민다. 일렁이는 화마를 담은 두 눈동자에는 색이 깃들지 못했으니, 건물을 휘감는 풍랑조차 활기가 없다. 무너져내린 활로, 두터운 벽 하나를 남기고 내실을 부수어 생을 보전하는 날이 길게 늘어진다. 먼지가 일어날 생동감 조차 없는 지독한 날이 이어짐에, 작은 불씨가 숯더미 안으로 더욱 숨어드나 타오를 것이 없다. 온기를.. 2021.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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