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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녹슨 저울 추들

한 걸음 (1)

by 연안 어귀 2021. 3. 20.

적색 한기, 불꽃이 아무리 탄식을 쏟아내도 우울하게 내려앉은 기색들은 변화의 조짐이 없으니. 스미는 바람은 낮게 불어와, 웅크린 몸을 더욱 작게 만든다. 숙여진 고개는 지나온 길에 새긴 경험이나, 이로움이 없으며. 숨을 내쉴 때마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김이 마치 본인의 혼 같았기에, 그는 장작을 더 집어넣었다. 기세를 키우는 화염, 시야는 좀 더 화사해졌으나 주변은 여전히 어두움에 옷깃을 여민다.

 

일렁이는 화마를 담은 두 눈동자에는 색이 깃들지 못했으니, 건물을 휘감는 풍랑조차 활기가 없다. 무너져내린 활로, 두터운 벽 하나를 남기고 내실을 부수어 생을 보전하는 날이 길게 늘어진다. 먼지가 일어날 생동감 조차 없는 지독한 날이 이어짐에, 작은 불씨가 숯더미 안으로 더욱 숨어드나 타오를 것이 없다.

 

온기를 간직한 주검이라도 된 듯, 미동도 없던 이가 고개를 들었다. 테두리가 희뿌옇게 물들기 시작한 동공이 허공을 그려넣는다. 그가 몸을 일으키는 건, 이끼가 가득 낀 바위가 구르는 모습을 닮아있었다. 단단하나,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다. 그가 손길 한 번에 창가를 덮고 있던 천을 걷어냈다. 자신의 본래 형태를 찾은 듯, 눈꽃 결정이 가득한 유리가 낯설지 않다. 마지막으로 그는 다시 화로 앞에 앉았다. 녹이 슨 집게가 숯을 집어들어, 겹겹이 껴입은 옷 사이를 채운다.

 

그는 자신을 잔불로 삼았다. 눈이 쏟아지는 광경이 세상의 전부 같았으나, 서서히 썩어가는 목재 건물을 나섰다. 자신의 육신보다 부피가 큰 천으로 몸을 감싸고, 깊은 눈길 위를 지난다. 다리는 어깨보다 넓게 벌리고, 한 걸음을 크게 걷는다. 타오를 것도, 태울 것도 없어 한 치 앞을 모르는 흰색 정글에 불을 짊어진 채로, 없는 길을 따라간다.

 

결정이 형태를 잃었다. 힘겹게 내딛은 걸음처럼, 꽃봉우리의 저항 또한 너무도 애처롭다. 그럼에도, 고요한 적막을 깨트리는 소리는 차분하게 내려앉은 심야의 울적함에 파묻혔다.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흰 눈밭, 그는 둘러맨 모포자락이 휘날려도 막지 않는다. 그저, 거품이 일어난 대지에 몇 차례 더 족적을 새긴다. 그는 문득 어떤 순간이 떠올랐는지, 홀연히 멈춰서 저 편 어딘가를 응시했다.

 

오직 하나만 멈춘 순간, 빈틈없이 눌러 쓴 두건에 눌린 머리카락 끝에 눈이 쌓인다. 남자는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이미 지워져가기 시작한 발자국을 본 그는 한 덩이 한숨을 뿜어냈다.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잿빛하늘처럼, 만질 수 없음에도 선명하다.

 

백발이 성성한 전라의 나무들은 유려하게 스친 바람 한 줄기에 새치를 털어냈고, 떨어진 눈덩이는 사내가 남긴 흔적을 지운다. 그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다. 누군가를 막연히 기다리는 행색은 아니다. 오지 않을 것을 암에도, 그저 심상이 평온하게 멎질 못해 물끄러미 시선을 던졌을 뿐이었다.

 

짐승이 물기를 털어내듯, 두어 번 몸을 비튼 그는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미 땅 밑으로 꺼져버린 한숨과는 다르게 높이 뜬 달은 그 심정을 모르는지, 흔한 추억 중의 한 장면처럼 빛나고 있었다.

 

잠시 잠잠했던 날씨가 다시 예기를 품고 눈보라를 불어낸다. 남자는 자신의 눈망울로도 본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향후에도 거세게 몰아친 풍랑은 그의 생각도 속절없이 앗아가버리려는 건지,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날이 지새도록 곁에 머무른다. 녹슨 경첩을 떠올리게 하는, 비명을 지르는 무릎이 목청을 잃을 때까지 떠나지 않는다.

 

이내 시선은 날카로운 돌풍 속에서 눈꽃과 함께 떠오른다. 걸어온 길도, 앞으로 향해야 할 방향조차 보이지 않는 세상 또한, 여전히 그와 함께 걸어간다. 암담한 후일은 나를 내딛는 만큼 다가오니, 점차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리라며. 이후, 온통 무색으로 물든 화폭은 천천히 잠식되었다.

 

녹아내린 세상은 비가 되어 내리기 시작했고, 사방을 가득 채운 느린 기운이 피부의 잔털에 영겨붙었다. 걸쇠가 엇갈리는 청명과 함께, 더 낯익은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세상에 매료되기 전까지, 내가 있었던 공간이었다.

 

투명한 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에 내 모습이 담겨있으니, 무엇을 해야할지 더욱 선명하다. 앉은 몸을 더욱 기대어, 짙은 숨을 내뱉었다. 쌓아올린 감각들이 모조리 빠져나가니, 사방이 색감을 잃어 어색하기만 하다. 그의 일부를 빌렸을 뿐이지만, 몸이 차가웠다. 다시 들이쉰 심상이 파문을 일으킨다.

 

“갈까.”

 

누구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화답하는 이가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광채로 보았으며, 낮은 울림으로 대답을 들었다. 쏟아지는 세상 아래, 만물이 차분하게 늘어졌다. 마른 눈물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나, 결국 본인에게로 다시 되돌아갔다. 그렇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벼락이 쳤고, 천둥이 울렸으나 이미 내게는 익숙한 광경으로 남았다. 그래, 눈 뜬 그대로 잠든 이들을 깨우는 것이 일이던가. 어느 하나, 그 나름대로 열정적이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의자를 끌며 일어섰다. 날카로운 마찰음이 본래의 곳으로 돌아오는 동안, 굼뜬 마음도 몸을 바로잡았다. 간신히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움울하고 어두운 기후는 머리를 좀 더 차갑게 만들었다. 또 한 번의 광명에 윤곽이 뚜렷해진 계단을 내려가 현관에 다다르자, 빗소리가 한 층 웅장해진다. 눅눅함에 물든 고동이 넓은 파장에 삼켜져, 다시금 튀어오르기 시작한다. 바람에 실려 조금씩 안으로 밀려드는 빗물 위를 걸어, 한껏 얼굴을 찡그린 구름의 행진을 바라보았다.

 

소매를 걷어 피부 아래에 이식된 기기를 가동시킨다. 미약한 기동음이 불쾌하여 문명에서 멀어졌으나, 편의가 내게서 떠나가기를 원치는 않았었다. 애가 탈 정도로 느리게 결론으로 향한다. 난, 쌓아올린 과정으로 손가락질을 하기 쉬운 사람이다.

 

찰박, 듣기 좋은 소리가 더는 나지 않았다. 미약한 자기장이 몸 전체를 감쌌다. 마치 개인을 위한 유리상자에 갇히는 듯한, 그 모습이 처음에는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코 앞으로 떨어지는 비에 손을 내밀어봤다. 피부에 닿고 싶은 듯, 투명하고 둥근 표면이 파르르 떨린다. 넓은 땅을 가린 잔디의 끝에 물방울이 떨어지고, 잎은 휘어져 짐을 덜어내기를 멈추지 못한다. 그 풍경 속에 남겨진 상태로, 나를 제하면 인위적인 생명 몇 개체 밖에 없을 장소를 천천히 벗어난다.

 

질척거리는 흙을 밑창에 가득 묻힌 채로 정문 앞에 멈추니, 양 옆에 있는 석상에서 소독제가 분사된다. 신발을 벗고, 두꺼운 담벽에 달린 기판을 조작해 내부를 드러낸다. 부드럽게 열린 신발장에 신을 넣고, 세척을 한 뒤에 보관함으로 돌려보낸다. 이 긴 벽은 모든 공공기관과 연결되어있어,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내 것이 마치 내 것이 아닌 듯하다. 아니, 이곳에 내가 있기나 할까.

 

이미 버릇이 되어버린 독백이 힘을 잃기 전에, 자리를 옮긴다. 오늘이 무슨 날이었나. 비의 정취에 감화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정교하게 꾸며진, 오히려 인위적이기에 나름의 극에 달할 수 있었던 정원을 거닐던 이들이 없어졌다. 다시 사색에 잠기려 했지만,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말동무를 해드릴까요?]

 

나의 발치에서 속도를 맞추어 걷던 고양이가 말을 걸어왔다. 털갈이도 없고, 배변활동도 없다. 영원히 어리고 귀여운 한 때로 남아, 사람이 필요로 할 때까지는 빈자리에 머무른다. 내 옆을 차지한 아이를 인식한 녀석들은 기존의 위치에 배를 대고 눕는다. 다른 이들의 소감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 배려가 즐겁지 않다.

 

이 정도로 민감해질 만큼, 작금의 거리는 한산했다. 기껏해야 정자에 앉아 차를 홀짝이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기아도, 자연사도 없는 세상이 보인다. 하나, 그건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이 아닐 터다. 감정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 저항할 필요가 없는 삶은 점차 퇴색한다.

 

이 시대의 경쟁은 보상을 주지 않는다. 다만 그에 대한 관념을 인식하지 못하여, 잠시나마 선을 넘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공공연한 비밀을 알아버린, 사고의 수준이 높아진 지금이 더 좋다고 확신하지는 못한다.

 

[오늘은 메이커의 서비스가 시작됩니다. 거리에 사람이 없는 건 그 때문이죠.]

 

그래, 이제 우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마음껏 주무를 수 있던 때가 너무도 달콤해서, 닳아가고 있던 걸 몰랐다. 그래서 수단이 필요했고, 만들어내었다. 우리가 제어하지 못하는 세상이 요구되었고, 모두에게 공동의 목적이 생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선 지켜보실 생각이신가요?]

 

“그래, 직접 볼 거다.”

 

창조주라는 직책으로 절대자가 될 수 없는 곳, 그건 자극이라는 확답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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