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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녹슨 저울 추들

한 걸음 (2)

by 연안 어귀 2021. 3. 20.

수고가 낮은 종으로 경계를 나눈 휴식처에서 한 걸음 멀어진다. 자연스럽게 다가왔던 고양이는 그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본래의 자리로 향한다. 사회에서 길러진 그들은 뒤를 보지 않으며, 몽환적인 빛에 흐려진 정면을 향한다.

 

네온, 방전관 속의 저항이 투명한 물줄기에 산산이 부서져 흩날린다. 한 순간의 명멸을 늘어뜨리며, 횡단보도 앞에 선다. 도로를 주행하던 차량이 나를 인식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옅게 펼쳐진 막을 따라 흘러내리는 빗물이 기어코 지하수로 떨어져내린다. 순식간에 생겨난 물의 항로, 그 위로 옅은 청색의 테두리가 인상적인 자가용이 다가와 코앞에 멈춘다. 안타깝게도, 이 모든 장면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안락한 좌석에서 음악을 들으며 우수에 젖어있을 누군가에게 간단한 목례를 하고, 시선을 높은 곳으로 쏘아 보낸다. 외벽 전면에 처리를 하여 조금의 오물도 묻지 않은 건물의 중상부에 달려있는 거대한 화면이 보인다.

 

[메이커 공개 시간까지 앞으로 001 : 29 : 17 남았습니다.]

 

제어가 가능한 모든 것들이 표현의 한 갈래가 되었다. 기법은 하루가 멀다며 새로 창안되었고, 정교한 조각은 어느 집에나 있던 빈 화분과도 같아졌다. 이렇게 아름다워진 세상에 하자가 있다면, 이제는 없다는 정도일까. 눈 앞으로 빗물이 지나는 감각이 싫어, 굳이 우산을 쓴 여인을 지나친다. 모든 것이 효율적인 세상, 우리는 우리로 남기만 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남은 골짜기는 그동안 보았던 것과는 비교가 불가능했지만, 하나만 남았다는 것이 어딘가.

 

개개인의 사고력은 이미 횡일(橫溢)하여, 우리에게는 퇴보할 여유가 필요하다. 내가 살아감에 확답을 받기는 요원하겠지만, 적어도 포괄적인 뜻은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너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내게 문제가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구태여 병적인 신념을 품을 이유는 없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보이는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고독은 쓴 물과 같아 도약을 위해 여력을 남겼었지만, 이 이상은 이미 필요 없다.

 

물안개가 자욱하다. 희미한 선만 남아, 모든 길을 선망한다. 모든 요소가 계획된 도시, 그 안에서도 가끔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막이 요동치고, 한기가 더욱 세밀하게 내 잔털들을 일으킨다. 그제야, 내가 거주하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휘감은 바람은 무엇이었나. 머리 위를 가리는 차폐막 아래에서, 아까처럼 빗물에 손을 내민다.

 

“해제.”

 

손톱 위에서 일그러진 물방울이 한 줄기가 되어 손가락을 타고 내려온다. 그 이질적인 감각, 하지만 잘못된 부분이 없는 현상이 또 다시 심중에 파문을 일으킨다.

 

[오셨습니까.]

 

잘 만들어진 발성과 말투 그리고 목소리, 그렇기에 거리감이 든다. 감정을 적용하지 않은 탓이 가장 크겠지만, 그리 생각하겠다. 혹시, 나는 이별이 무서운 걸까. 오류가 생겨 관계를 다시 쌓아가야할 때가 두려워, 같잖은 핑계를 대는 건가. 나는 남들보다 여유가 없었기에, 무지의 미덕을 중용하지 못한다. 이 불안함이 깊은 곳으로 들어가, 심해의 정경처럼 어둑해질 때까지는 말이다.

 

천천히 돌아선다. 우선, 새하얀 피부는 잡티 하나 없다. 부드러운 눈매는 큰 눈을 감싸고, 눈동자는 깊다 못해 초점이 잡히지 않는다. 두 시선이 겹치고, 그제야 앞에 있는 것이 나의 외견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걸음을 옮기니 거울은 사라지고, 적색 광선이 손목을 훑는다. 감지기가 작동을 멈추니 석재 재질의 통로가 갈라진다. 해당된 개인 소유의 전력을 사용하는 무빙워크가 발길을 기다림에도, 나는 기존의 길을 따라간다.

 

“확인 사항.”

 

[오늘 자에 확인하실 항목은 응용 프로그램 하나, 장문의 글 하나가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언제나와 같은 질문을 했다.

 

“설마 나만 헤메고 있는 걸까.”

 

[제가 생각하는 바로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십니다.]

 

그래, 그 말이 듣고 싶었다. 그 대사 하나 덕분에, 나는 네게 감정도 이름도 주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나는 그런 놈이니까. 넓고 얕은 바다에 또 다시 빗물이 떨어진다. 세상이 온통 젖어있다. 그 흐름에 나조차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서, 정문을 열어 성난 침묵에게서 도망을 친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쏟아지는 비 덕에 아주 작은 소음조차 묻혀버린다. 가볍게 내쉬는 숨만 이곳에 남아, 오직 하나의 형상만을 나타낸다. 따스한 색감의 불빛, 광이 나는 바닥에 내 모습이 비친다. 밝은 색조의 얼굴이지만, 여전히 어둡고 우울하다. 홀로 이 넓은 로비에 우두커니 서있다. 공간을 울리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고 생각하며, 다시금 보금자리로 향하는 길을 재촉한다.

 

의식의 수준이 높아진 만큼 사생활의 내면은 좀 더 긴밀해졌고, 타인의 현관에 다다르기 위해서 허가가 요구되었다. 어찌 본다면 삭막한 관계가 이어지겠으나, 예의가 없는 세상이 아니기에 드러나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존대의 의향은 개인적인 격차가 있지만, 시기와 경멸이라는 단어는 이제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 피할 수 없는 과정을 거치며 자극에 민감해질 우려도 있기에, 우리는 스스로 객체에 대한 명시를 확고히 했다.

 

그와는 별개로, 격한 감정에 갈증을 느끼고 있지만 말이다.

 

조작판을 제외한다면 불순물이 섞인 투명함이 전부일 사각형 승강기는 한 사용자마다 일관된 경로를 제시하여, 내가 가야하는 장소를 제한한다. 일차적으로 지문과 홍채를, 부수적으로는 정맥과 체형을 확인한다. 악용할 사람이 없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고, 대부분을 이뤘지만 이전과 다름없이 믿음은 없다. 떨림을 진정시키는 압박, 일렁이는 부유감과 함께 집으로 향한다.

 

굳게 닫혀있던 벽이 밀려나고, 겁없이 빨려들어간다. 미동조차 숨을 꺼트리며, 나를 뱉어낸다. 옥빛의 잎과 고동색의 줄기, 태양광을 한가로이 쐬는 수목이 눈에 들어온다. 그늘진 구석, 가지런히 정돈된 운동기구가 즐비하다. 떠오른 순간 몸을 일으킬 수 있도록, 그렇기에 가져다 놓았다. 옅은 녹색의 등빛에서 싱그러움이 아닌, 부패한 생명이 느껴진다. 쓰임새를 알지만, 쓰지 않는다.

 

내 집은 버젓이 남아있으니, 아무도 없음을 재확인하는 일이 반복된다. 잠시나마, 내가 있지 못한 옛을 그려본다. 현 체계에 적합하지 않은, 혹은 거부감을 느낀 이들은 지반 밑에 똬리를 틀어 자신의 꼬리를 먹는다. 한 때를 그리고 있기에, 소망하는 때로 돌아가지 못하는 비극이다. 어머니께서는 자연적인 햇빛을 볼 수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과거의 사회와 굉장히 유사하다고 하셨었지..

 

문명은 이지가 없었다. 갈림길을 자각하지 못했기에, 돌진하던 모습 그대로 양쪽으로 분리되었다. 종래에는 타인이 아닌 다른 종으로 정의된 거다. 진화의 과정에서 탈선한 이들이라니, 우리의 조상이 그들이라는 말인가. 누군가의 입술 사이로 흐른 말은 농밀한 의식이 되어, 내 한 편을 차지했다. 같은 것에게서 다름을 보았기에 나는 일부를 망각해간다.

 

거실바닥이 유난히 차갑다. 매 걸음이 피로했기에, 맞춤 의자에 앉은 몸이 늘어진다. 고개를 돌린 방향의 전등이 켜지고, 그 따스한 불빛에 외로움이 편안해진다. 언제나와 같은 익숙한 순간들이다. 매 초가 기울며, 굳은 몸을 뒤튼다. 시계 초침은 그렇게 나의 시간을 셈해갔다.

 

[식사를 하실 시간입니다. 직접 재료를 입력하시겠습니까?]

 

“아니, 부족한 영양만 채우면 된다.”

 

[크림 스튜로 괜찮으십니까?]

 

“그래.”

 

정적인 소란스러움이 나의 잔잔함에 궤적을 그리니, 들리지 않는 숨소리만이 자아를 얻어 나를 흔들어 놓는다. 움직일 필요가 없으나, 움직임을 강요당하며, 움직이지 않았으나, 움직임을 느꼈으니. 벨트 위에 멈춘 식재료는 본인의 모습을 그리는 일을 멈추었다. 얼굴을 덮은 손은 강직과는 거리가 멀어, 흘러내리는 세상을 내게 보인다. 아마도 나는, 비가 싫다.

 

“응용 프로그램 실행.”

 

빛이 쏟아져내린다. 머리에 닿은 뒤, 어깨마저 덮어내린 시각적 온기는 고개를 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선의는 언제나 원을 그려 본인에게로 돌아오니, 어느 곳에도 두 발을 붙이지 못하리라. 각각의 색상으로 흩어지니, 나는 다시 현실로 내던져진다.

 

채소가 다듬어지는, 도마에 부딪히는 소리가 일정했다. 하늘은 변함없이 요동치고 있었으며, 나는 몸을 일으키지 아니했다. 이리도 나는, 젖은 것들이 싫다. 열린 천장에서, 다른 세상이 나를 불렀다. 온통 백색으로 칠한 공간, 허공에 쓰여진 숫자가 눈에 밟힌다.

 

[Maker 000 : 43 : 27]

 

“기본 사항은 변함이 없나?”

 

[초기 반응은 개인마다 편차가 있을 수 있으므로, 접속 방식이 다운그레이드 되었습니다.]

 

“그 외에는?”

 

[새로운 스킨이 추가되었습니다. 현재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밋밋하게 여겨졌던 흰색 바닥이 열린다. 현재 내가 구입한 접속기에서 색상만 바꾼 외형이 정면에 자리하였고, 나머지는 회색상의 필터를 입혀 사용할 수 없음을 나타냈다. 지금까지의 상상이 쌓아온 것을 부정하지 않는 타원형의 디자인, 한 사람이 편히 몸을 뉘이기 좋은 크기다. 먼 곳에 자리한 접속기는 많은 개조를 거쳐야하는 건지, 이미 기본 상태를 떠올리기 힘든 형태였다.

 

"기능 상의 차이가 있나?"

 

[없습니다.]

 

“실행 종료.”

 

다시 집 내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탁자 위에는 김이 나는 스튜가 올려져있었다.

 

"글은?"

 

[메이커를 구매한 곳에서 보내온 글입니다.]

 

"첫 문장."

 

[배송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릇을 들고 창가에 다가섰다. 빗소리가 음악에 묻혀 들리지 않았기에,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그제야, 내 목울대가 온몸을 비트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입 안을 채우는 따스한 액체와 신선함을 담은 향에 얼굴 근육이 풀어져간다.

 

"오늘 내 상태는 어떻지?"

 

[기대와, 그에 대한 불안을 제외하면 평소와 다름 없습니다.]

 

"평소와 다름없다라, 정상은 아니겠군."

 

[자료가 부족합니다. 학습할까요?]

 

"아니."

 

안쪽에 가라앉아있던 건더기를 씹어 삼킨다. 눈 앞을 메운 도심의 풍광이 깊은 물 속처럼 흐릿하다. 이 풍경은 다시 먼 곳으로 돌아간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올 터다. 지금껏 계속, 새로운 자극이 내게 변화를 주리라고 믿어왔던 것처럼 말이다. 옛 사진의 나를 다시 닮아갈 수 있다고, 흔들리는 시야에 맞춰 나를 두드려 올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핑계의 아래에 몸을 숨기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규칙적인 소리는 오히려 끝을 알 수 없는 침묵보다 나를 더 차분하게 만든다. 빈그릇을 세척기에 집어넣기 위하여 걷는 걸음마저, 내 심금을 붙잡는다. 애초에 명확한 길을 제시하지 못할 것을 암에도, 나는 방향이라도 잡아보려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잠금장치를 풀고, 그릇을 집어넣자 다시 닫힌다. 잡티 하나없는 표면에 생동감을 잃은 얼굴이 비친다.

 

“남은 시간.”

 

탁자 표면 아래, 연청색의 빛이 들어찬다.

 

[Maker 000 : 19 : 34]

 

고개를 돌려 숫자를 읽는 와중에도 기다림은 짧아져간다.

 

“혹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나?”

 

기존의 문구는 오른쪽 상단으로 옮겨지고, 중앙에 새로운 문구가 생성된다.

 

[Maker 000 : 19 : 21]

[현재 열람할 수 있는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본 환경] [ ] [ ] [ ]

 

“열람하지.”

 

말을 마친 직후였다. 잠깐 사이에, 사방이 전혀 다른 곳으로 바뀐다.

 

초록이 만연하다. 여명이 두려워 잎사귀 밑으로 숨은 땅거미가 가득하고, 풀벌레가 숨을 죽여 생명의 소리가 더욱 선명하다. 자연스럽지 못한 세월, 낙엽조차 바스라지지 못한 시간동안 다시금 꽃이 피어난다. 한 순간에 모든 계절이 녹아있었다. 얼어붙었으며, 말라있었고, 썩어들고있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죽음과 탄생이 이 자리에 쌓여있었다. 실로 사실적인, 그리하여 더욱 이상에 가까운 자연이었다.

 

감상과는 별개로, 광경은 다른 시각으로 되풀이되었다. 행적을 묘사하는 일이 질린, 단단하게 다져진 땅은 씨앗이 파고들 수 없었다. 무언가가 지나는 통로는 토양이 드러나 있었고, 시점은 작은 길을 따라 빛살같이 움직였다.

 

수목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거대한 바위산 정상 주변에는 다양한 조류가 창공을 누비고, 각 무리를 나누는 수십 가닥의 물줄기 아래, 뭇 짐승들의 혓바닥이 호수 표면을 흔들었다. 주변의 풍광이 빠르게 스쳐지나가기 시작한다. 오로지 생에 대한 색감들이 주변을 휘감는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니, 숲에 모래먼지가 일었다. 황색 염료가 세상을 뒤덮는다.

 

모래알갱이가 눈 앞을 구른다. 사막의 한복판에 누워있는 시계,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열기를 담는다. 새 그림자가 앞을 지난다. 태양 주위를 도는 독수리의 울음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긴다. 죽은 듯 사막 한복판에 누워있던 도마뱀이 모래를 밀어내며 멀리 보이는 숲 쪽으로 빠르게 멀어져간다.

 

저 멀리, 모래폭풍이 다가왔다. 새의 날갯짓이 빨라짐에도 좀처럼 재해와 멀어지지 않자, 내가 되어있던 무언가를 놓는다. 빠르게 추락하나, 이내 다가온 폭풍에 다시 빨려들어간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부딪혀 오는 바람과 이물질들이 매섭다. 감각이 전혀 다른 것으로 치환된 느낌이다. 그도 잠시, 잠깐의 부유감을 느끼며 폭풍의 권내에서 벗어난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귀가 먹먹하다.

 

이게 무슨 해괴한 소개 영상일까, 그리 생각하며 짧으나 놀라운 영상미였다고 박수를 칠려는 찰나였다. 떨어져내리는 지점, 풍랑에 몸을 뉘인 식물들의 터전이었을 오아시스가 가까워진다. 기포가 눈 앞을 가린다. 먹먹함은 모든 음성을 먹어치웠으며, 물 속 깊은 곳에서 숨을 죽이던 어류가 화들짝 놀라 멀어진다. 수면 아래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었다. 예정되었다는 듯, 그곳으로 움직인다. 길고 긴 통로를 지나며, 곳곳에 박힌 수정과 암석의 색채에 감탄하기가 몇 분이었나.

 

다시 넓은 공간이 보였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기대하는 순간, 기다란 혓바닥이 나를 감쌌다. 수면 위로 튀어오르며, 나는 기이한 생물의 모습을 보았다. 매끈한 피부와 관절이 두 개인 길쭉한 사지, 왼손의 손톱이 유난히 길고 날카롭다. 놈은 나와 눈을 맞추었으나, 그것은 나를 보지 못했다. 손톱으로 나를 두어 번 찔러보더니, 김이 샜다는 듯 집어던진다.

 

바위에 여러 번 부딪히며, 다시금 작은 물줄기를 탔다. 빠른 유속 덕에 주변의 환경이 달라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드문드문 들어오는 햇빛, 이끼의 양이 많아져간다. 멀리서 들려오던,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추락한다. 이곳은 인공적인 듯한 모습이나, 규모가 거대하여 자연적으로 생성되었다고 믿을만한 수로였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로 두둥실 실려가는 줄 알았건만, 입이 비정상적으로 큰 생선이 나를 집어삼켰다. 녀석의 움직임에 맞춰 내부에서 이리저리 구르기를 몇 번, 날붙이의 첨단이 내 눈 앞까지 다가왔다.

 

거침없이 녀석의 배를 가르는 도, 비늘로 뒤덮인 손이 나를 꺼낸다. 파충류의 안구가 위아래로 움직이며 훑더니, 옆구리의 피막 주머니에 나를 담는다. 이후로, 모든 감각이 닫혔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실로, 정신없는 진행이다.

 

또 다시, 영상이 움직인다. 파충류의 손가락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분명 인간이 앞에 있었다. 익숙한 피부의 손바닥 위에 작은 주머니가 올려져있었으며, 안에는 녹청색의 보석을 가공한 동전이 있었다. 그와 함께, 나는 상대방으로 손으로 옮겨졌다. 나는 마차의 짐칸에 옮겨졌다. 흔들리는 시점은 여명과 황혼을 동시에 담아냈으며, 초원과 가지각색의 동식물을 보았다. 몇 배는 빠르게 감아지는 태엽 속에서, 몇 날을 지새웠을까.

 

거대한 성문이 보였다. 석재를 가공하여 수없이 쌓아올린 성벽 위를 사람들이 오간다. 상인으로 짐작되는 남성은 나를 들고 어느 건물로 들어섰다. 그들의 말은 들리지 않았으나, 흥정하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내, 나는 투명한 유리창 안에 전시되었다. 많은 차림새의 사람이 있었다. 정장과 드레스차림, 중갑과 경갑을 입은 두 사내, 가죽 옷을 입은 여성 활잡이와 특이함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을 눈에 담던 날들이었다.

 

정보를 전달하는 영상이 으레 그렇듯, 진행과 우연으로 뒤덮인 밤. 전시관에 도둑이 들었고, 소란스러움이 느껴지는 시가지와 골목을 수 차례 지나 성을 떠났다. 오솔길을 따라가니 말 하나가 나무에 묶여있었고, 영상은 보따리의 작은 구멍으로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었다.

 

숲의 아침은 활기찼으며, 저녁은 침잠했다. 그렇게 두 밤을 보내며 도착한 노을에 물든 평야에서, 거래는 또 한 번 이루어졌다. 상대방은 둘이었다. 두꺼운 천을 뒤집어쓴 두 인영은 하나는 체구가 작고, 다른 이는 컸다. 도둑은 자신의 머리만한 주머니를 받고서 실실 웃으며 또 다른 길을 갔으며, 체구가 작은 이는 동료의 어깨에 앉아 저 먼 곳의 고향으로 향했다.

 

그들은 거대한 산맥을 마주쳤으나, 그 아래의 통로로 향했으며, 설원이 눈 앞에 펼쳐져있었으나 그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려 빙 돌아갔다. 곧이어, 슾지에 다다른 이들은 작은 선착장을 지나쳐 무언가를 찾으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언가 중요한 정보로 취급되는 장면이었을까. 험하게 다뤄지면서도 끝없이 일하던 카메라는 결국 작동을 정지했으며, 영상은 끝이 났다.

 

아마,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제한적인 정보는 사람의 상상을 자극하였고, 나는 또 다시 막연한 기대에 빠져들었다. 창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 하나하나에 내 모습이 담겨있다. 시선은 알지 못하는 곳을 향하며, 그 너머에 있을 무언가를 동경함과 함께 두려움을 키웠다. 떨리는 동공은 과연 어느 것을 담았을까. 자문은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끝도 맺음도 없다. 그저, 다가올 뿐이다.

 

시간은 여전히 간다. 내 발자국을 남겨야 할 곳을 바라보고, 움직인다. 접속기 앞에 서서 양손의 손가락을 홈에 넣는다. 손 끝에서 미약한 진동을 느끼며 물러선다. 개폐 장치가 열렸다. 오래 머물기에는 좁으나, 안락한 공간이었다. 후일, 내 마지막 거처가 될 곳도 이런 모습일까.

 

옷가지를 벗었다. 좀 더 나은 감각을 위하여, 두 번째 삶은 좀 더 확연해지기를 원하며. 탄생의 순간이 보이지 않는 나체는 아름답지 않다. 그 기준은 언제나 모호하나, 나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니. 몸을 돌려 발 뒤꿈치를 넣고, 등을 마주댄다. 근육이 살짝 수축되는 정도의 서늘한 온도, 빈틈없이 맞닿는 촉감이 유난히 선명하다. 이내, 안면을 제외한 온 몸이 뒤덮인다. 희미한 광선이 얼굴을 덮고, 밀도 높은 액체가 내부를 채워간다.

 

이제 별다른 행동 없이 몸을 맡기면 그 뿐, 어느 것도 필요 없었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곁들이나 간결하게, 말은 언제나 치우침이 없게 하려 한다. 하지만 들킬 일이 없다며 등을 돌려 장문의 탁함을 토해내고, 진득한 기체는 유독하여 곳곳에 흔적을 남긴다. 과연, 나는 이번 삶에서 완벽해질 수 있을까. 기대치는 언제나 나와 동일한 곳에 있지 않겠지만, 그 체취라도 따라갔으면 했다.

 

공기방울이 얼굴을 삼키고, 그제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기화 완료, 접속 대기열 배치 완료.]

 

매우 짧은 기다림은 그렇게 지나간다.

 

[초기 위치 분배 완료.]

 

모두가 다른 삶을 살아간다라. 본인의 생과 비슷하더라도, 우리는 여유롭게 감내할 수 있을까. 내부의 불빛이 점차 느리게 점등함에 따라, 의식 또한 멀어져 간다.

 

[부디, 원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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