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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녹슨 저울 추들

한 걸음 (3)

by 연안 어귀 2021. 3. 20.

심연, 미약한 광택조차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나지막하게 울리는 심장의 고동이 유난히 크게 들리는, 빈틈없이 밀폐된 공간이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유난히 시리다. 손을 뻗어 앞을 더듬자, 무언가 뭉개져 피부를 덮어온다. 이 역시, 내 몸을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나는 눈 속에 파묻혀있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자의 묘비 위를 덮는 울음 덕에, 무뎌진 일부의 감각이라도 가야할 방향은 알고 있었다.

 

손과 발을 휘저으니, 체온은 높아지나 주위는 여전히 춥다. 결정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빛 줄기 역시, 서늘함을 이겨내진 못했다. 곧이어, 눈덩이가 쏟아져내렸다.

 

창백하게 질린 대지, 단 한 줌의 푸름을 쥐지 못한 땅이 내 눈앞을 메웠다. 내리쬐는 햇살은 반사되어 내 눈을 찔러왔으나, 이미 세상은 온통 백색으로 물들어 경황은 여전히 같은 곳만을 헤맨다. 생을 유지하기 위해 잠정적인 죽음을 택한 고목의 가지에 태양이 걸려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저 너머부터 이어져온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효과음이 들리며, 내 눈 앞에 반투명한 양피지가 펼쳐졌다. 이곳저곳에 때가 탔고, 세월을 따라가며 변색된 누런 종이였다.

 

[T. 어느 고목 아래에서 기본 장비를 찾으세요.]

 

나는 그제야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발등이 보였다. 전라의 행색으로, 나는 설원 어딘가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한 걸음마다, 발자국이 찍혔다. 시린 발바닥, 엄습하는 한기에 몸이 움츠러든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조타기는 길이 들어있지 않았으나, 적어도 부서지는 일은 없으리라고 되뇌인다. 그리, 몇몇 고목이 뭉쳐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으레 대부분의 시작이 그렇듯, 처음에는 동행해주는 이가 있다. 다만, 이번에는 좀 더 냉막하게 나를 불러왔을 뿐이다. 나는 발자국이 끊긴 곳으로 향했고, 그 앞에 자리한 가장 어린 듯한 아이는 사람의 형상을 닮아있었다. 그 아래에 기대어 놓은 짐꾸러미에서 옷가지 몇 개를 끄집어냈다. 지난 밤에 눈이 꽤나 내렸는지, 약간 눅눅하다. 어찌 분별하여 입은 속옷은 나름 양호했으나, 겉옷은 약간 거친 감이 있었다.

 

마저 차림새를 정돈하고, 배낭을 들어보니 무게가 상당했다. 내용물을 살펴보니 말린 과일과 육포가 한 쪽에 모아져 있었으며, 투박하게 엮은 책자가 있었다. 첫 장에는 여러 번 접혀있는 지도가 끼워져 있었고, 다른 무언가가 가득 적혀있었으나 읽을 수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뒤, 본래대로 짐을 정리하고 고개를 들자 다른 명령이 하달되었다.

 

[T. 언덕에 올라 주변을 살피세요.]

 

배낭을 둘러메고 발을 옮긴다. 어깨에 압박이 느껴졌다. 가죽신에는 어떤 처리를 했는지 표면이 젖지 않았고, 미끄러지지도 않았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지금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가까운 언덕을 오르며 뒤를 돌아보니, 이어지는 걸음이 이전에 고목까지 찍혀있던 것과 같았기에, 내가 불청객임이 더욱 확실해졌다. 이곳은 내가 있던 세상이 아님을, 모든 상황이 계속해서 속삭여온다.

 

설렘을 다독이며 걸음을 재촉하자, 너머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눈밭, 작은 바람 한줄기가 노니는 공간에 작은 오두막 한 채가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T. 오두막으로 향하세요.]

 

소복이 쌓인 눈 위를 걷는 소리가 생생했다. 밑창에 붙는 눈덩이, 체중을 실을 때마다 파묻히는 발이 무겁다. 내리막을 내려가니 점차 속도가 붙었다. 조심스럽게 딛던 발은 어느새 내달리고 있었고, 지나온 길은 아무렇게나 파헤쳐졌다. 이내, 몸이 앞으로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균형을 잃는 건 한 순간이었다. 넘어진 몸은 내리막을 구르기 시작했고, 나는 금세 언덕을 내려올 수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낸다. 오두막은 처음보았을 때 가늠한 거리보다 지척에 있었다. 눈밭을 헤치고 나아간 게 아니라, 굴렀으니 그리 느끼는 것이리라. 군데군데 썩어들기 시작한 외부를 훑어보고는, 문을 열었다. 버려진 곳인 듯, 곳곳에 먼지가 쌓여있었다. 탁자 위와 창틀부터 시작해서 침상과 바닥까지, 손길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 낡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마치, 사용하던 그대로 이곳을 남겨두고 싶던 것처럼 말이다.

 

눈에 띄는 물체라고는 뒤집힌 작은 액자 하나 밖에 없었다. 오직 이것 하나만이 본연의 색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나는 액자를 살펴보았다. 전면은 투명한 무언가로 덮여있었다. 촉감은 우리가 알던 유리가 아니나, 그 너머가 선명히 보였다. 옅은 회색 머리를 가진 남자아이는 흑갈색 머리의 남성의 어깨 위에 앉아있었고, 그 옆에는 흰색 머리의 여성이 서있었다. 상투적이게도, 모두가 밝게 웃고 있다.

 

무언가 있을까, 옆으로 기울이니 액자표면에 내 모습이 비친다. 뺨은 붉게 달아올랐고, 눈동자는 생기있게 반짝였다. 흡사, 어릴 적에 찍었던 가족사진의 내 모습 같다. 전혀 다르나 어쩌면 비슷할 곳에서, 나는 나를 보았다. 다분히 감성적인 생각이라며, 나는 괜스레 난로의 재를 헤집었다. 잿가루가 가라앉으며, 파문 또한 흔들림을 잊는다. 다시 시선을 옮기니, 창에 걸려있는 작은 쪽지와 설신이 눈에 들어왔다.

 

절반이 조금 안되게 젖은 누런 종이, 안쪽의 염료가 번져있다.

 

[최종 행적, 피타느 프란 군도 남측.]

 

짧은 문장을 읽으니 임무가 갱신되었다.

 

[T. 장비를 찾은 고목으로 돌아가세요.]

 

쪽지를 배낭 옆에 찔러넣고, 본인의 발자국을 되짚어간다. 한결 편해진 발걸음은 언덕을 쉽게 올라갔다. 이 일련의 상황은 저마다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기대는 실수를 두렵게 하니. 사람 형상의 고목, 그 아래의 물품과 근방의 오두막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얇아진 발자국처럼, 실타래는 점차 풀어져 작아져간다. 내가 이번 생을 시작한 곳이 한 눈에 들어왔다. 작열하나 추위를 내몰지는 못하는 태양과, 굽이치는 백색 파도는 포말을 만드는 법을 잊었다. 검게 죽은 나무는 끝에서 다른 시작을 찾았으며, 그 첫 마디에 매달린 작은 잎은 여림에도 강인했다. 이곳의 시간은 일초가 지나는 그 간격, 단 한 마디에 멈춰있었다.

 

“우선 따라갈까.”

 

은연 중, 목소리가 맑아짐을 느낀다. 눈동자 위에 먼지가 내려 앉은 듯, 자신만이 색을 품고 있다고 착각했던가. 호기심 따위 없는 세상은 분명 좁으나, 사람 하나가 더 작음을 알지 못했던가. 배웠으나, 배움을 청한 적이 없다며. 나는, 뒷짐을 진 채로 악수를 했었다. 돌아가는 길이 이리도 편안할 수가 없다.

 

순간이다. 울적해지는 것도, 들뜨는 것도 한 순간에 불과하다. 금새 아까의 위치로 돌아온 나는 다음 지령을 기다렸다. 그렇게, 두 인연의 발자국은 겹쳤다. 헐벗은 수목들이 늘어선 곳을 따라온 흔적, 그 의지를 받든 듯한 나의 걸음이 이어진다.

 

[M. 그의 삶을 되짚다.]

 

은은한 성광이 감도는 종이 위로 먹이 뿌려져 한 순간에 문장을 만들고, 조금 전의 오두막이 눈에 들어왔다. 작고 볼품없어 보이던 거처는 은은한 불빛에 휘감겨있었으며, 생활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넓은 공간같았다. 찰나에, 내 시야는 어려진다. 한 줄기 돌풍에 베인 뺨은 일생에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할 정도로 붉게 달라올라 안면이 따끔거렸으며, 누런 콧물은 입가까지 늘어져 바람에 따라 일렁임을 달리했다.

 

“라텐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방향을 보자, 유난히 머리색이 흰 여인이 뒷짐을 지고서 상체를 숙여 그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창백하다는 느낌을 한 차례 뛰어넘은 투명한 피부는 혈관마저 소상히 비추었다. 오두막 안, 가족사진의 여인이었다.

 

“추위를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히, 엄마아.”

 

엄마, 어색한 단어가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다. 새로운 삶이라 기대했으며, 그를 믿고 설렘을 안았다. 그렇기에, 나는 스스로 어머니에게 두려했던 거리감을 여실히 느꼈다. 그 뿐이라면 단지 그만이겠으나, 단순히 낯설다는 감정이 아닌지 심장이 아릿했다.

 

“좀 더 자라면 이곳을 떠나게 될 거란다.”

 

“난 엄마랑 있고 싶은데…”

 

그녀의 눈동자는 붉었고, 그 밑으로 새어 나오는 눈물은 한 없이 투명했다.

 

"우리를 위한 것이란다."

 

그 말이 끝난 이후, 다채롭던 만물이 무참히 찌그러졌다. 감각이 무뎌져 어설프게 웃는 아이의 모습과 그런 모습마저 사랑하는 여인의 미소가 한낱 영상으로 치부되어 사라졌다.

 

뭘까, 이건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잠시 내린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보이는 건 어느 색채도 띠지 못한 빛이었다. 백야의 한 점을 확대한 듯, 어느 사물도 없는 장소에 창백한 피부의 남성이 서있었다. 흡사 그 자체로 전부인 모습인지라, 기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껏 혼자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것이 벼슬이라도 되는 양, 부둥켜 잡고 불행을 무기로 세워 질렀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고독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느끼니, 오롯이 나만 남아있는 것이 그리도 애처로울 수 없었다.

 

손바닥에서 새어 나오는 땀이 보이지 않게 주먹을 쥐고, 고개를 떨궈 비상을 열망하는 발의 콧잔등 위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고작, 정말 하나 때문에 감정이 이리도 용솟음치는 것이라면.

 

나는 두 번째 삶에서 닥쳐올 불행을 진심으로 가벼이 생각할 수 있을까.

 

푹 꺼져 들어가 그늘이 진 눈의 끄트머리에서 차가운 불씨가 스며 나왔다. 태초의 심성만큼이나 모질지 못한 눈매를 타고 흐른 눈물은 결국 방울져 떨어진다.

 

나는,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맞이해버렸다.

 

흰 공간을 양단하듯, 망설이는 기색 없이 떨어진 물방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어떤 예고도 없이 바람이 몰아쳤다. 들려진 고개는 고인 물을 흩뿌렸고, 일렁이는 심정을 대변하는 충혈된 눈자위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의도는 필요가 아니었을까."

 

이후에도 내가 도달한 결론에서 논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몸 깊은 곳 어느 어귀에서 파도는 호수를 만나 잠잠해졌기 때문이다. 그저 그렇게 마무리 지어도 문제될 것이 없었기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파장은 넓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작은 굴곡들은 서로 만나 더 큰 흔들림을 잉태했고, 어느새 내가 보는 모든 풍경들을 흩어놓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 푸름이 생겼고, 발 밑에서 솟아난 암석들이 그와 맞닿으려 치솟기 시작했다. 열기가 가득한 대지는 한기가 감싸여 식는 듯 했으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덥힌 대기는 구름이 되었고, 이내 다시금 차분함을 갈망했다. 우렁찬 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장대비는 높은 곳에서부터 흘러내렸고, 상대적으로 풍채가 작은 바위들이 깎여나가 토양이 되었다.

 

그럼에도 내가 자리잡은 이 높은 산은 낮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고개만 숙이면 보였던 맞은 편의 봉우리가 구름 속에 숨어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래의 풍경이 보이지 않으니, 내가 얼마나 이곳에 있었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이제 아래로 내려가 볼까라며 걸음을 옮기려 하는 순간, 그제야 알아차렸다. 내 몸은 이미 차디차게 얼어붙어 하나의 고목과 다름이 없게 되어버렸다. 피부는 말라비틀어졌고, 성한 데가 없어 색을 잃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아스라이 느껴지는 햇빛을 탐하고 있었다. 비교적 평평해진 땅, 부모 없이 자라난 내 자식들이 나보다 더 큰 몸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 자리에는 그늘이 없었다. 시간이 시간이라고 불리지 않는 시절이었음에, 나 역시 그 흐름을 읽지 못했다. 어두움과 밝음이 나를 수없이 지나쳤음을 알 뿐이었다.

 

움직이는 것들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을 보는 것들은 세상처럼, 더 연약한 이들을 보는 것들은 그들이 익숙한 형태를 따라간다. 다양성이 더 이상 다채로워 보이지 않을 때가 와서야, 나는 의미가 있는 소리를 들었다.

 

“아직, 하나.”

 

여러 생물의 가죽을 온 몸에 뒤집어 쓴 누군가가 옆을 지나갔으나, 나와의 인연은 없었다. 단지, 내가 사람이 아니기에. 또한, 나는 바람에 휘날리지도 않았기에. 인연은 없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 당연했기에. 나는 인연은 없다고 단념했다.

 

가족이 점차 늘어갔다. 군락이라고 부를 정도로 성장한 아이들 사이에 파묻힌 나는 노쇠한 부모에 불과했으며, 온기 역시 없었다. 추위, 이 추위가 언젠가 가실 즈음에야 나는 따스해질까. 얼음이 녹을, 이 생에서 가장 밝은 날에는 눈사태가 일어났다.

 

왜소한 나는 휘어진 채로 꺾이지 않는 노년이었으나, 내 아이들은 너무 단단한 탓에. 나는 그들을 거름으로 써 영양을 유지했다. 낮과 밤의 구분도 없이,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감각이 죽지는 않았으리라 짐작하게 한다.

 

황혼조차 저물어갈 때, 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달뜬 숨소리 사이를 채운 그것은 따스하나 곁에 있지는 않은, 그런 아련한 음성이었다.

 

“소식이 있으면 좋으련만, 늙음도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걸 왜 모르는지.”

 

긴 한숨 소리가 거센 풍랑조차 먹어치우고, 그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무언가 알아냈다고 해서 움직일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지.”

 

그는 잠자리를 준비하는 듯, 작은 소리들을 만들었다. 하나, 그도 잠시였다.

 

“저울 위에 올랐나…?”

 

그는 허탈하게 한 마디를 마친 후,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의 마지막 숨은, 점차 둔탁해진다.

 

눈을 깜빡였다. 그 사이에 꿈을 꿨던가. 내 발자국과 겹친 걸음이 저 멀리까지 펼쳐져 있었다. 한 순간 지나간 고목의 생이었으나, 그것이 나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 군락의 사연은, 나와는 인연이 없다. 나는 잘 만들어진 세상에게서 얻을 것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 말하며, 이어지는 걸음을 뗀다.

 

점차 익숙해지는 풍광을 지나쳐, 하늘보다 맑은 땅을 걸어 발걸음이 내려왔던 길을 오른다. 이 너머에는 또 어떤 사연이 있을까. 막연한 기대감을 다리에 불어넣어, 걸음을 뗀다. 발을 맞추던 하얀 모래들, 바람이 지나는 길을 따라 날아가던 풍광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바뀐다.

 

이 넓은 땅이 누렇게 변색되었으며, 온 시야를 밟게 물들이던 빛이 하늘에만 머무른다. 야윈 수목은 가지를 줄기에 겹치기를 반복하여, 점차 굵어진다. 줄기는 잎이 되었고, 꽃은 어딘가로 숨어든다. 이내, 나는 완연한 선인장으로 변모한 식물들을 지나치고 있었다.

 

온통 메마른 땅, 모래를 실은 바람이 한 켠을 전부 가리는 곳. 나는 사막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가장 먼저 변했었을.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 나를 보았다.

 

때는 손짓이 휘날리는 정오, 몸을 뒤틀어 환호하는 열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먼지와 모래알이 점령한 거리 위에서 아지랑이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했고, 모공을 비집고 나온 노폐물은 거친 피부를 타고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잔잔한 미풍이 이름 모를 씨앗을 몰고 왔다. 한 장면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성의를 다하여 돌고 도는 작은 생명의 옆으로 한 사내가 지나간다.

 

그는 자신의 전신을 충분히 가릴 크기의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나, 짐을 잔뜩 지니고서도 소매가 긴 옷을 입은 그는 모자 속으로 손을 넣어 지속적으로 땀을 훔친다. 주변의 건축물을 바라보던 그는 손톱을 세워 이음부분을 긁었고, 이내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다르군."

 

그는 진흙을 털어내고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빠르게 돌아가는 고개가 확연하게 다른 것들을 찾는 모양이었다.

 

길거리 구석진 곳에 무더기로 쌓인 오물 옆, 그와 상반되는 화려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누군가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는 대상인지라, 식용이 가능했다면 이미 뿌리째 뽑혀나갔을 터다.

 

"지나는 곳에서 너무 많은 걸 찾으려 하는 걸까.”

 

새가 발을 붙이지 못하는 곳을 찾으려면 하늘을 보아야 한다. 동공을 채운 광원과 물을 먹은 먼지들이 빽빽했고, 좀 더 이질적인 야생을 찾아 서성이는 조류들이 있었다.

 

"저기로군."

 

그는 이미 이런 생활에 이골이 난지 오래인 듯 했다. 더욱 효율적인 방안을 알고, 그 와중에 찾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이 무엇인지 숙지하고 있었다. 욕구에 충실하다라는 말은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를 주지만, 그는 자신을 그렇게 칭하곤 했다.

 

작열하는 태양 빛 아래, 달뜬 숨이 기도를 메운다. 소란스러움은 얇은 천에 잠시 부딪혔다가 이내 귓속으로 들어왔고, 그는 향긋한 냄새에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피로를 덜어낼 상상을 조심스레 펼쳐나갔다.

 

점점 높아지는 건물은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냈고, 그는 외벽에 붙은 채로 천을 걷어 시계(視界)를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의 생김새가 완전히 드러났다.

 

그의 백발은 붉다 못해 하얗게 불사르는 태양의 피륙과 다름이 없었다. 투명하고 얇은 모발은 손길 한 번에 부드러운 실타래처럼 찰랑였고, 얼핏 보이는 핏줄은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미약하게 움찔거렸다.

 

그는 가죽으로 된 물통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찌그러진 입구 탓에 틈새로 물이 새어나갔지만, 이제는 아깝지 않은 듯했다. 목을 축인 뒤, 배낭을 천천히 내려놓은 그는 단순한 형태의 지도를 꺼냈다.

 

환경의 특징에 따라 분류된 구역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 자연이니만큼 일정하지 못했다. 불규칙적으로 그어진 선 안쪽에는 지형지물에 대한 정보만이 가득했고,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나흘 전에 날카로운 등대를 지났으니 이쯤인가?”

 

그는 손가락을 대충 그어 위치를 유추했고, 초기에 의도한대로 숲의 경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이었다.

 

현재 그가 있는 이곳의 지명은 베두로페로 영원한 탄생과 죽음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식수는 근방의 녹지에서 조달하기 때문에 가격대가 그리 높지 않으며, 다육질의 줄기가 타 지역보다 부드럽다고 적혀있다.

 

배낭의 끝에 매달아둔 식물을 쥐어든 그는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얗게 질린 손가락 사이로 검은 색의 즙이 새어나왔고, 그는 지나온 경로를 따라 글을 적기 시작했다. 송글하게 맺힌 땀이 관자놀이에 족적을 새김에도, 뇌는 팽배하게 돌아갔다. 한동안 손가락을 휘젓던 그는 아쉽다는 기색을 보였다.

 

“사라노아에 대한 기록은 정말 이게 끝인가, 생각보다 별다른 특징이 없다.”

 

그는 지도를 접어 들고서 일어났다. 저려오는 다리를 두어 번 털어 풀어낸 뒤, 다시 배낭을 업었다. 굽은 모습이 낯설지 않다는 건, 그리 좋은 행색이 아님에도 그는 천을 머리에 둘렀다.

 

백색을 움켜잡은 대지는 표면을 내세워 내실을 다진다.

 

단단한 점토로 이루어진 언덕을 파서 만든 집 안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사막 지대에서 보기 힘든 형태의 지형이나, 지대가 낮아 습기가 모여드는 곳에선 당연할지도 모르는 건축법이다.

 

사실 이곳은 사막이라고 하기에는 친근한 것이, 땅을 깊게 파헤치면 물웅덩이가 생겨 죽음과는 거리가 멀다. 더운 모래밭 정도나 될까. 이쪽으로 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나이가 좀 더 들고, 다른 이가 고향을 떠나올 때까지는 살아야 했으니까. 생존이라는 단어가 형상화하는 장면보다 넓은 의미를 품을 필요가 있었다. 가끔 생각나는 이들을 좀 더 많이 불러본 적이 없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고통에 대한 보상을 원했기 때문일 터다. 그렇게 생각해서라도, 아니 그 어떤 명분을 들더라도 목적은 같을 테지.

 

백사미로를 벗어나니, 그제야 웅성임이 귀의 끝에 닿았다. 분주한 경향이 확산된 대로는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투박한 느낌을 멀리하고 있었다. 세련을 가까이 하는 태도는 이곳의 격식과는 나란히 하기 어설픈 데가 없잖아 있었다. 가령, 그가 지나온 골목길의 침침한 공간에 쌓여있을 배변들이 품격을 논하기에는 이르다는 아우성을 내고 있느니 말이다.

 

검게 변색된 피부는 사막인의 강인함을 표상한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특성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어느 인종이나 다를 바가 없다. 추악함은 언제나 광명 뒤에 있기에, 그는 좀 더 객관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었다. 기본적인 재능이 보잘것없어 경험에 의존한 판단이 올바르다 하기에는 어폐가 남아있으나, 정성스럽게 닦아놓은 판자를 떼어내어 부식된 일면을 보여야 할 의무는 없었다.

 

따사로운 햇빛이 유난히 차가운 색감을 가지는 오후의 의중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는 발걸음을 이어 건물이 밀집한 곳으로 들어섰다.

 

실로 다양한 외양들이다. 피부 아래에 염료를 주입하여 용맹함의 표식을 새긴 야윈 남성하며, 재물을 탐하여 되려 건장한 체구를 자랑하는 상인에, 질병에도 품질이 있는지 이 지역에서 치료를 받다가 풍토병을 얻은 붕대덩어리까지, 참으로 살가운 풍경이다.

 

진의를 잃은 빛이 어느 것도 비추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길을 잃은 상태로 목적지를 찾아내었다. 최선이 아닌 차선을 택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결국 목표를 좇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손등으로 눈두덩에 고인 땀방울을 닦아냈다. 그들과 같은 무리에 속해있음을 부정하려는 듯, 자연스럽게 눈을 가렸다.

 

익숙하다는 속임수 뒤에 숨어, 방향에 상관없이 나아간다. 단지 살아있다는 이유로,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의무라는 단어를 들어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니었으니, 우리는 거짓을 끌어당겨 허무함을 채웠다.

 

현명함이 요구하는 사고가 최악을 가정하는 거라면, 그는 분명 유능한 사람이라는 말을 꼬리에 매달고 다녔을 거다.

 

햇살이 찡그려 놓은 미간 덕분에 사람을 가까이 해야 했던 그가 그리 변한 걸까. 시초가 무엇이었든, 그는 비관적인 상상에 빠져있었다.

 

그가 당장의 도착점으로 삼은 곳은 감탄을 자아낼 만큼 웅장한 건물이 아니었다. 면적은 이 지역에서 본 어떤 구조물보다 컸지만, 고개를 들어야 할 정도는 아닌 규모였다. 단지, 듬성듬성 보이는 조각들이 신경을 빼앗아갈 뿐이었다.

 

“기록에 이런 건 없었는데.”

 

의심은 생성될 때와 같이 빠르게 사라졌다. 골목길의 고요함이 알려주는 사실은 흙을 다져 만든 집에 살던 시절이 지나갔다는 말이다. 시간이 흘러 풍화가 일어나는 동시에 쌓여간 모래알갱이들이 역사를 보호했고, 발전은 외부에서 불어온 여력의 발길질에 맞아 치솟았다.

 

베두로페 지역에는 광산이 존재하지 않는다. 깊은 표층의 일정 부분에야 있겠지만, 오늘날의 기술력으로는 풍족하고 싶다는 소원으로 적힐 뿐이다.

 

교류의 활성도를 무력으로 삼는 육지에서 주로 쓰이는 언어는 필티아어로, 이로 인해 거의 대다수의 지역이 같은 말을 사용한다. 이곳의 수준을 보아하니 필시 이를 채택했을 것이다.

 

“알브나는 왜 하나같이 베두로페를 거치는 거지?”

 

입구 뒤쪽, 어두운 내부에서 한 남성이 팔짱을 낀 상태로 몸을 기울여 그에게 화두를 던졌다. 그는 양 팔을 낡은 천으로 감쌌지만, 그로 인해 벌거벗은 상체가 더욱 부각되었다. 그런 본인의 겉모습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건지, 유난히 눈매가 날카로운 남성은 모래 풍랑에 거칠어진 머리칼을 털어냈다.

 

“뭘 그렇게 보고만 있어? 대답은?”

 

“…지대가 낮은 곳을 따라와야 조금이나마 편할 테니까요.”

 

사막의 변칙성에 영향을 받은 걸까. 구릿빛 피부의 일관성 아래로 눌러둔 성향이 까다롭게 일어섰다.

 

“허여멀건한 녀석들은 어느 연놈이나 재미없는 소리만 해대네, 아 지루해.”

 

“혹시, 안으로 들어가려면 허가가 필요합니까?”

 

그는 찡그린 인상을 유지한 채로 손을 털어댔다. 지겹기 짝이 없는 질문에 지친 건지, 성난 어조조차 내뱉지 않았다. 남성의 의사를 알아챈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인 후에 건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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