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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녹슨 저울 추들

주변을 보다 (2)

by 연안 어귀 2021. 3. 28.

흙내음이 난다. 한기가 피부를 오르고, 불에 달군 돌이 점차 식어간다. 생전 처음 보는 문자가 모든 시선을 가져갔다. 머무르고, 주저 앉고, 흐르는 동시에 가로 막힌 기묘한 형태의 글자가 사방에 가득하다. 작은 등불을 곁에 두고, 손으로 짚어가며 글을 읽는 이는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존재였다. 단단한 흙벽에서 서늘함이 스며나오고, 그가 들고 있는 석판을 더 차갑게 만든다.

 

“이 위치는...”

 

석판의 뒤에 숫자를 새기고, 어질러진 방을 가로질러 침상 위의 배낭에서 지도를 꺼낸다. 베두로페에서 펼쳤던 상세한 지도가 아닌, 조잡하고 낡았으나 다른 부분이 있었다. 죽음의 땅 사라노아를 지나, 신드라의 강줄기를 따라 해양으로 향한다. 현재의 지도에는 없는, 둥란이라는 섬이 그려져있다.

 

“항해, 표류, 귀환인가.”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하더니, 품 안에서 일지를 꺼낸다. 타지로 떠나는 알브나가 기록하게 되는 기행문은 계속해서 쌓여가고, 주관적일지 모르나 기록되지 않는 일은 없다. 라텐스의 이번 여정은 대륙의 중심, 케저를 가로지르는 것에서 시작했다. 사라노아와 신드라의 경계를 따라 도착한 베두로페에서 퓌르레로와 히두를 만나고, 메디움의 심층부에 도달했다.

 

계획한 경로와는 멀어졌지만, 기대할 수 있는 보상이 커졌다. 하나, 이 일지를 꺼낸 이유는 스스로가 만족감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다. 대상 알브나가 머문 장소에 관한 모든 내용은 분류되어 보관된다. 향후,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함이었으나 실질적으로 사용된 적은 손에 꼽는다. 분명, 그곳에서 확인한 둥란의 모습은 이 석판과 달랐다. 애초에 적은 내용이었기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 알브나의 영토인 설원과 비견되는 척박한 환경, 근방의 화산과 지진활동에 의해 방향은 다르나 비슷한 생활양식을 띄게 되었다. 스스로를 데케르라는 종족으로 칭하며, 타지와의 접촉에 회의적이다. 특이한 문물과 동식물이 존재하나, 육지에 대체재가 있어 교류의 필요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

 

“견해는 주관적일지 모르나, 기록에는 사실만이 들어가야 한다는 규칙은 절대적이다. 타지로 향한 알브나가 거짓을 고할 이유는 없어. 그런데, 왜 석판과 다르지?”

 

라텐스는 자신의 귀아래를 매만졌다. 마치 무언가 그곳에 박혀들기라도 한 것처럼, 목선을 따라 손끝을 움직인다.

 

‘종족의 명칭인 데케르와 지명은 동일하나, 그 외의 모든 사항이 결부되지 않았다. 내게 부탁이 있다는 예드 고고학자는 이것을 신드라의 옛 항구도시에서 찾아냈다고 말했다. 일지의 형식으로 쓰여진 소설일 가능성이 있지만, 대단위적 단어, 결정적으로 위치가 동일하다.’

 

라텐스는 침상에 몸을 뉘였다.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변화가 자신을 옭아매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지, 몸을 끌어올려 미열이 오른 이마를 차가운 벽에 댄다. 그의 한숨이 폐부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고, 작은 등불은 무참히 꺼졌다. 그렇게, 감각이 서서히 죽어간다.

 

나는 그의 정신과 몸을 빌리고 있었기에, 그의 감정이 느껴졌다. 저항에 의미가 없기에, 사실을 발치에 뒀음에도 들어올리지를 못하고 있었다. 난, 알브나가 가지는 무게가 어떠한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천천히 짐작하여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어긋난 규칙 그리고 이변이라... 아무 것도 모르던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건 여전한가.”

 

라텐스의 체념에 적셔진 한탄이 퍼져나가도, 나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생명의 저울 위에 올려진 추가 어떤 것들인지, 대체 누가 추를 들어올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나는 그를 보는 시선을 달리했기에, 이젠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해결될 수 없는 의문에 관하여, 이뤄지지 않는 이상의 부조리함에 마주설 수 없었음을, 공감하지는 못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개개인이 차분하게 내걸은 선은 비록 평행은 물론 완전하게 겹치지도 못하나, 적어도 단 한 점은 맞닿아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그에게서 또 하나를 얻어가나, 정작 나는 그에게 어느 것도 선물하지 못한다는 것이 서러웠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언제나 먼 것만 같다. 스스로가 중심이 되려하나, 완벽할 수는 없기 때문일까. 만약 아니라면, 외면하는 것이 너무 익숙해져있기 때문일 거다.

 

질문과 대답이 꼬리를 무는 도중, 발소리가 들렸다. 걸음은 방 앞에서 멈췄고,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그의 뇌리를 떠도는 기억 사이에 어설프게 자리잡은 의식은 이내 그와 한 몸이 되어간다. 라텐스는 다시 외투에 달린 덮개를 썼다.

 

“들어와도 좋습니다.”

 

석문이 열리니 작은 바람이 불었다. 고즈넉한 방을 채운 촛불은 더 큰 불빛에 기척을 잃었고, 생각없이 불어낸 숨에 휘어진 심지는 검게 탄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가요?”

 

모든 피부를 가린 그와는 대조되는 편안하고 활동적인 차림새, 짙은 살구색 피부가 통로의 빛과 어우러진다. 짙은 주홍색의 머리카락은 쇄골 위로 늘어져 있고, 뺨 아래에는 아주 희미한 흉터가 남아있었다. 아쉽게도, 얼굴의 생김새 전부가 보이지는 않았다. 쉽게 헤지는 부분을 가죽으로 덧댄 옷을 입은 그녀는 정렬된 석판을 바라보았다.

 

“왼쪽 위부터 시작인가요?”

 

“일단은 그렇지만, 제가 알고있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 석판에 적혀진 둥란이라는 곳은 분명 실재하는 장소일 테지만, 정작 내부에 대한 내용이 맞지를 않아요.”

 

여인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의 옆에 앉았고, 라텐스의 말은 계속됐다.

 

“전체적인 명칭과 지형은 동일합니다. 그 안에 사는 종족의 이름도 같고요. 문제가 되는 것은 동식물의 분포와 종류가 다르며, 종족의 특징 또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는 겁니다. 많은 시간이 지났다면 이해가 가지만... 뭐라 해야 할까요.”

 

라텐스는 허리를 숙여 석판 하나를 집어들었다.

 

“마치 흥미를 잃도록 변화한 느낌입니다.”

 

여인은 꺼진 등불에 불을 붙였고, 그녀의 용모가 드러났다. 약간 거칠지만 하나의 흉터를 제외하면 잡티 없는 피부, 강렬한 특징은 없으나 호감이 가는 외모였다. 그녀의 눈이 라텐스의 눈동자를 담는다.

 

“섬 전체가 방문객에 맞춰 모습을 바꾼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라텐스는 낡은 지도를 다시 배낭에 넣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확신이 가지 않는 태도로 말했다.

 

“그곳이 모로닉의 고향이라면 가능할 겁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무언가를 연상하고자 했으나, 얼마가지 않아 손을 들며 말했다. 난해한 견지이기는 하나, 예상했던 것보다 포기가 빨랐다.

 

“마지막 손님이 왔으니 설명이 시작될 거에요. 그리고, 그 중에는 아닉이 있다고 하니 직접 물어보죠.”

 

“깊은 유대라... 그보다는 친우에게 물어보는 편이 좋겠네요. 자, 그럼 가실까요. 페나스 양?”

 

“저라면 추천하지 않아요.”

 

페나스는 몸을 일으켰고, 라텐스는 분류된 석판을 상자 안에 넣었다. 석문을 닫으니 등불은 또다시 힘을 잃었고, 그들의 온기가 남아있던 침상은 서서히 식어가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차분하게 내려앉았던 고운 흙은 발걸음에 맞춰 일어선다. 발광하는 푸른 광석이 미세한 진동을 받아 흔들리고, 그에 따라 미약한 불안을 품은 마음 또한 점차 새어나간다.

 

“혹시 미리 언질을 받은 부분이 있으십니까?”

 

“아뇨. 아, 먼저 와서 깨달은 건 있죠. 불안함을 감추지 않는다고 뭔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 말이에요.”

 

페나스는 가볍게 웃으며 길을 안내했다. 개미집처럼 얽힌, 미궁과도 같은 이 장소는 어느 곳이 어떠한 용도인지 알기 힘들었다. 실제적으로 사용되는 범위보다 방치된 곳이 더 많은, 여긴 대체 어느 곳이었을까. 알아차릴 수 없게끔, 그 누구의 감상도 비슷하게 포용될 광경은 나와 그와 거리를 또 다시 좁혀나간다. 내가 그인지, 그가 나인지...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아 있는 그대로를 보도록 말이다.

 

이해했다고 느낌에도, 나는 그와 함께 무의식에 머무른다.

 

‘하기야, 그렇겠죠.‘

“하기야, 그렇겠죠.”

 

내가 그의 입을 빌리고, 그는 나의 의견을 빌린 듯이, 단 하나의 점을 알아간다. 오직 하나지만, 위안이 된다.

 

“어느 길을 가더라도 후회가 남을 테니, 저는 좀 더 자신있게 걸어보겠습니다.”

 

“라텐스 씨는 사람을 미묘하게 흔드는 구석이 있네요. 뭐,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피부의 잔털을 움직이는 진동이 점차 늘어가고, 발 밑의 흙은 점차 줄어들어간다. 청색 불빛은 간격을 좁혀가고, 작은 언덕은 별 다른 감흥이 없어져 간다. 군중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지만, 불가능했어야 했던 걸 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 내가 세운 자신이 녹슬어가지 않기를 바라야한다.

 

언젠가 했었던 자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그 때문에라도 말이다.

 

“사실 처음에 배정하려 했던 방은 이 통로에 있지 않았지만, 석판의 해석에 집중했으면 해서 다른 곳으로 안내했어요. 이제 쉴 수 없을 거니까, 각오해두세요. 이곳의 사람들은 자신감이 엄청나거든요.”

 

라텐스는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그녀의 말에 더욱 집중하기 위함이었으나, 이번의 말은 달랐다.

 

“당신도요?”

 

“제 분야라면요.”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한 그녀는 전하고 싶었던 말로 대화의 끝을 맺었다. 내가 기대했었던, 보고 싶었던 그런 표정이었다. 별 것 아님에도, 사람을 일으키는 사소한 부분이었다.

 

“둥란이 모로닉의 고향에 준하는 곳이 아니라면, 각오하셔야 할 거에요. 당신의 추측을 듣고 너무 설레 버렸으니까요.”

 

“그런 종류의 보복이라면 얼마든지 받도록 하죠.”

 

내가 그녀에게 하나의 활기를 더 선물한 지금처럼, 넘어지지 않고 천천히 걸어가면 언젠가는 이뤄지리라고 믿어보겠다. 이게 내가 다짐한 길이다. 지금 걷는 길도 끝이 보이지 않으나, 엄연히 종착지가 존재하니. 나는 한 톨의 염려도 손아귀에 쥐지 않으리라고, 그렇게 다독여 불안을 토해내겠다.

 

“좋네요, 이런 대화도.”

 

“저는 이게 일상입니다. 특이한가요?”

 

페나스는 천장을 바라보다가 돌연 라텐스의 눈을 마주보았다.

 

“글쎄요?”

 

“페나스 씨도 평범한 느낌은 아닙니다.”

 

그는 작게 웃었고, 그녀는 넘어갈 수 없는 대답인 듯, 곧바로 물어왔다.

 

“그거 칭찬인가요?”

 

“적어도 제 의도는 그렇습니다만,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그쪽의 일입니다.”

 

페나스는 그를 알아가겠다며, 여러 변화를 보였다. 대화가 지날수록 그녀의 행동은 점차 일정해졌으나, 방금의 대답으로 다시 종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처럼 그의 길은 자신을 포함하여, 타인을 새로운 곳으로 이끈다.

 

그녀는 그를 회의장으로 안내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아, 역시 어렵네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상해요.”

 

“그 중에서 저는 어떻습니까?”

 

그녀는 팔짱을 끼고 이전의 일을 회상하며 감각을 살리려 애썼고, 얼마가지 않아 대답이 들려왔다.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좋은데요?”

 

“어떤 식으로 해석하는지는 제 몫인가요?”

 

그녀는 눈썹을 치켜 세웠고, 지금까지 보였던 모든 표정 중에서 가장 큰 변화를 보였다. 왼쪽에 파인 보조개와 크게 뜬 눈, 전체적으로 펴진 근육이 그녀의 얼굴을 살려냈다.

 

“그렇네요?”

 

절제된 웃음소리지만, 분명 즐거움이 묻어났다. 좁은 통로에서 서로의 어깨가 닿는 만큼, 감정의 표피가 떨어져 나간다. 점차 밝아지고 넓어지는 통로, 그렇지만 그들의 거리는 변하지 않는다. 경계이던, 교제의 의미던 그들은 분명 서로에게 원하는 바가 생겼다. 친우가 되기에는 이미 너무 먼 곳에 있는 이들이지만, 나와 라텐스의 관계 정도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분명 세밀하게 만져지지만 오직 나만 느끼는 정도라면, 추억과 기억의 구분으로 나눠지는 정도라면, 양쪽에게 힘겨운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발바닥에 닿는 촉감이 달라지고, 페나스의 뒤를 장식했던 배경이 일정해졌다. 굴곡에 따라 명암에 차이가 있던 벽면이 온통 백색으로 물들었다. 청색으로 물들곤 했던 피부가 이전처럼 창백함을 유지했고, 대화가 점차 잦아든다. 아무런 말이나 해도 좋았을 순간은 우리의 의사와 관계가 없었다.

 

“첫 회의라고는 하지만 일방적인 설명이 주를 이룰 거에요. 생명의 저울이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지, 언제부터 나타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겠죠.”

 

“예드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알고 있습니다. 생명의 저울과 관계 없을텐데, 이곳에 오신 경위가 어떻게 되십니까?”

 

페나스는 입술을 물었다.

 

“이 세상 전역에서 벌어지는 문제니까요. 당장 변화가 시작된 건 기이할 정도의 특징이지만, 이건 전조에 불과할 거라는 건 누구나 눈치채고 있어요.”

 

라텐스는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불투명하겠으나, 색감이라도 짐작하려는지 눈동자가 깊어져갔다. 전조의 물결이 도달하여 고일 곳은 어디일까. 어떤 형태의 말단이던, 한낱 부산물이라고 하더라도 느껴지는 바가 다르다. 과연 헤아릴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부분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백색 암석을 가공하여 단색으로 꾸민 공간, 각자의 옷차림이 두드러진다. 포화도가 적은 광석으로 가시거리를 넓히던 원시적인 통로와는 달리, 확연한 명도 차이를 보이는 연녹색과 연주황빛이 주변을 밝힌다.

 

“다왔나보군요.”

 

나선형으로 휘어진 오르막 길, 그 끝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가벼운 발걸음과 손 끝이 사물을 두드리고, 무른 광물이 묻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벽 너머로 흐르는 작고 여린 물길이 벽면에 부딪히나, 무르지 않아 순수한 물거품만이 일어난다. 중구난방인 공간이나, 소음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곡선은 한 차례 휘청이지만, 곧바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어지던 상상 또한 현실을 마주하니 감상이 새로웠다. 바닥에서 솟아올랐는지 견고하게 고정된 탁자는 편자 모양이었고, 중심에 놓인 크리스탈 가림막이 맞은 편의 형상을 번지게 했다.

 

무언가에 열의를 가지고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소는 분명 지금껏 마주하지 못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으나,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외향이었다. 정상이라 장담하지는 못하겠지만, 이건 세계의 축소판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리가 배정되었습니까?”

 

“안에 담겨있는 걸 보면 알 수 있을 거에요.”

 

페나스는 탁자 위에 놓인 잔을 가리켰다. 다채로운 빛깔을 보이는 재질으로 만들어 장식품에 가까운 잔 속에는 각기 원색의 보석이 들어있었다.

 

그제야 의문이 풀린 라텐스는 다시 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퓌르레로와 히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그들의 일족이 적색과 황색의 위치에 앉아 있었다. 세테그의 성별은 알 수 없었으나, 퓌르레로보다 피부가 옅었다. 그에 비해, 투버의 성별은 확실히 눈에 띈다. 히두보다 큰 체격이지만, 근육이 두드러지지 않았으며, 골반이 유난히 컸다.

 

그들의 외견을 기억하고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걸음을 옮기니, 다수의 연녹색 보석이 눈에 들어왔다. 매끄러운 비늘은 연신 광택을 냈고, 습관적으로 흔드는 혀는 다른 종과 비교가 불가능 할 정도로 길었다. 메디움의 상부에서 보았던 칼레스다. 사막 한복판을 거니는 이와 녹지에 군림하는 이, 가파른 해안절벽에서 숨을 죽이는 자가 한데 모여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저들은 환경에 따라 수많은 종류로 분포했다. 적응에 실패한 자들은 진부한 이성을 가지고 투쟁을 이어갔으나, 인정받지 못한 채로 끝을 보았다. 과거의 영광이 현실까지 이어지는, 관점을 바꾼다면 그 자체로 꿈과 같은 종족이다.

 

그들의 옆을 지나치니, 다시 페나스가 라텐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잔에는 불순물이 다량 함유된, 정체를 알 수 없는 광석이 들어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라텐스입니다.”

 

그녀에게 작게 눈짓을 보내고, 그 옆에 앉아 머리를 싸매고 있는 동일한 차림의 남성 예드에게 말을 걸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니 짙은 금발이 흘러내렸다. 옥색 눈과 높은 코, 선이 굵은 눈매가 눈에 밟힌다.

 

“아, 유일하게 선이 닿았다는 알브나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데올 프루딘, 페나스의 남편입니다.”

 

라텐스는 둘을 한 번에 암기하기 위해 살짝 거리를 뒀고, 그 사이에 붙어있어 보지 못했던 아이를 보았다.

 

“아닉이지만, 저희들의 아이입니다.”

“아닉이지만, 저희들의 아이에요.”

 

그들은 먼저 이야기하지 않으면 서로 싸울 듯, 앞다투어 말을 꺼냈다. 뭔가 한이 맺힌 듯한 목소리였으나, 라텐스는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닉이지만은 빼셔도 좋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불안감을 보이는 건 좋지 않다는 말은 폐부 깊은 곳으로 밀어넣고, 작은 웃음을 보인다. 녹빛 눈과 부드러운 피부, 적금발은 노란색 옷과 잘 어울렸다. 비록 신장에 비해 조금 큰 감이 있었지만, 그 편이 더 아이같았다.

 

“이름이 어떻게 되죠?”

 

“데올 피누시, 데올 피누시입니다.”

 

피누시의 앞에 놓인 잔에는 투명한 액체가 담겨있었다. 잔의 색상이 요동치면, 안에 자리잡은 것 또한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라텐스는 잠시 피누시의 눈을 마주보았고, 페나스와 프루딘에게서 멀어졌다.

 

“데올 피누시라, 알겠습니다.”

 

라텐스의 머리는 석판의 사실여부를 판가름하던 때보다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알세리드의 기록은 모로닉과 아닉, 그들의 성정과 기억에 대한 것들을 일부나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마다 다른 결과와 과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일반적인 삶과 다를 바가 없다. 분명 그렇지만, 그들은 삶을 선택한다. 유한한 생명과 근본이 다른 상대방을 과연 내 손 안에 둘 수 있을까.

 

“…형체가 없는 것들은 믿을 수가 없어.”

 

청력이 발달한 칼레스조차 들을 수 없는 작은 소리로 불안이 새어나왔다.

 

“내가 내린 평가조차도…”

 

그가 입을 악물었고, 투명하기까지한 피부 덕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 뒤로 몇 걸음, 순백색 암석이 들어있는 잔 앞에 라텐스가 자리잡았다. 탁자와 맞닿은 팔꿈치, 올라온 손이 입가를 가렸다. 언제 누가 입을 열을까, 그의 눈동자가 이곳저곳으로 움직인다.

 

세테그와 투버, 각 성향을 대표하는 칼레스와 아닉을 자식으로 둔 아닉 그리고 알브나가 이 자리에 모였다. 비어있는 자리는 둘, 흐르는 물줄기 앞에서 넋을 놓고 있는 화산지대의 칼레스와 백금색의 주인이었다.

 

나름의 비관이 몰려올 즈음, 낮익은 목소리가 장내를 휘감았다. 다른 이들의 고개가 한 곳으로 돌아가고, 갈피를 못잡던 동공이 흰자위를 밀어낸다. 출입구가 열리며 퓌르레로가 들어섰고, 닫히는 문 뒤로 히두의 뒷모습이 얼핏 보였다.

 

“하이악 씨, 자리에 앉아주세요.”

 

홀로 구석에 앉아 물방울이 튀어오르는 모습을 보던 하이악은 아쉽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제야 공간의 대기가 차분히 내려앉는다. 둥글게 말아놓은 식물의 표피를 펼친 퓌르레로는 숨을 한 차례 내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른 참여자들에게는 이곳에서 다루게 될 일을 제외하고 설명했습니다. 칼레스 분들을 이끌고 온 시드폴라와 티운은 상부의 통솔을 맞게 되었으며, 백금색 자리는 베르프디 게르테로노의 것입니다. 앞서 예드와 아닉을 모셔왔던 헤라투르와 피엔이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상황을 말하며 원탁의 중앙에 선 퓌르레로는 자신에게 모인 시선을 확인한 뒤, 라텐스에게 무언가 가득 적힌 표피를 내밀었다.

 

“확인이 끝나면 우측에 계신 분께 전해주면 됩니다. 자,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각자의 성함을 알려주도록하죠. 우선 저는 퓌르레로로 히두와 함께합니다. 이쪽 두 여성분은 세르아즈와 비퐁이고요.”

 

모두와 시선을 마주친 퓌르레로는 과장된 몸짓을 보이며 회의가 진행될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를 보였다. 본래 성격과는 다르게 눈에 띄는 웃음을 지으며 라텐스에게 시선을 던진다.

 

“라텐스, 알브나입니다.”

 

짧은 소개와 함께 눈길을 오른쪽으로 주며 다시 문서에 집중한다. 표피를 펼치니 식물의 액이 손에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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