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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녹슨 저울 추들

한 걸음 (5)

by 연안 어귀 2021. 3. 23.

눈길은 발끝에 채여 바닥을 굴렀고, 일행의 발길은 자신에게 허락된 시야를 따라 움직였다. 구불구불하게 파인 동굴이 라텐스의 앞을 채웠다. 초기에는 인공적인 형상이 선명했겠지만, 진보의 변화가 아니더라도 기억 이후의 광경은 괴리감의 거체에 따라 비틀어진다. 푸르스름한 등불이 일정한 간격으로 벽면에 매달려있다. 적토는 자신이 마주하지 못한 광채에 저항하는 법을 몰랐고, 이는 영원한 흔적에 질린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억세게만 보였던 퓌르레로의 안색 또한 시퍼렇게 물들어 숨통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고, 주머니의 입구를 풀어헤쳤다. 히두는 통로를 가로지르며 허리춤에 매달아 놓았던 장도리를 손으로 옮겼다. 입자가 고운 흙에 묻힌 커다란 바위를 향해 공구를 휘두르자, 맑은 금속음이 얇으나 넓게 퍼져나간다.

 

희미한 불빛이 일렁임에 따라 흔들리고는 했던 먼 곳의 풍경에 무언가 흉측한 것이 기어온다. 견고한 외피에는 광택이 흘렀고, 수많은 다리가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군중의 소란을 재현해냈다. 정밀하게 만들어진 이동수단보다 유용한 생물, 비정상적인 크기의 지네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필요에 따라서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듯, 강인한 턱은 흙과 자갈의 흔적이 무성했다.

 

“저거 제지하지 않아도 됩니까?”

 

라텐스는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소롱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런 광경은 아무리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지, 등불에 젖어도 붉은 기가 남아있던 퓌르레로의 안면이 청색으로 변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있죠.”

 

퓌르레로는 발로 지면을 훑었다. 잘게 부서진 모래알이 양방향으로 밀려났다. 그는 소롱의 기세를 한 차례 확인하더니, 급한 기색으로 주머니 안에 있던 황색 가루를 뿌렸다.

 

흡사 새벽녘의 안개처럼 자욱하게 떨어진 가루는 암석의 표면에 닿자마자 급격한 변화를 일으켰다. 동굴의 표면은 녹아들며 기포를 생성했고, 매캐한 악취가 풍기기 시작했다.

 

“아, 좀 떨어지세요. 가끔 유독 반응을 보이는 종족들이 있습니다.”

 

“그런 건 미리 말씀해주셔야지 않겠습니까.”

 

라텐스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천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그도 모자라 서너 발 뒤로 물러난 그의 표정은 한껏 일그러져있었다.

 

“기도가 따갑군요.”

 

“그런가요? 알아두겠습니다.”

 

퓌르레로는 품 안에서 남청색의 막대를 꺼내 용해된 부분을 휘저어 용액을 맑게 만들었다. 일련의 과정이 마무리되기 직전, 소롱은 일행의 코앞에 도달했다. 라텐스의 발이 되어줄 생물은 오각형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안구를 움직여 퓌르레로의 행동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녀석은 그가 막대를 회수하자마자 주둥이에서 긴 촉수를 뽑아들었다.

 

“주의한 것치고는 난폭하진 않은데요?”

 

“온순한 육식동물이라는 게 말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놈은 제 배가 차면 온화적으로 변모합니다.”

 

“지금은 그렇지만 놈이 공복인 스 – 읍 상태였다면 오금이 저렸을 거다.”

 

히두는 두드렸던 부분을 다시 먼지로 덮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유난히 어둡다.

 

“별다른 일이 있어 온 건 아니니, 각자의 짐만 제대로 확인하고 가지.”

 

퓌르레로는 소롱의 몸통에 붙어 주홍빛의 껍질을 매만졌다. 연약한 부위를 찾는 듯, 손길이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그는 촉감에 한동안 집중하더니, 이내 얇은 막을 들춰냈다. 탄력 있게 요동치는 막은 여러 개가 겹쳐있었는데, 히두는 가운데에 손을 비집어 넣더니 사이를 벌렸다.

 

“배낭은 스 – 읍 여기에 넣어.”

 

“의도적으로 개량한 건가요?”

 

“아니, 개량할 생각이었으면 스 - 읍 주요한 통로를 닦았겠지.”

 

얼마 없던 차림은 전부 소롱의 내피 사이에 보관되었고, 그들은 짧은 여행을 시작했다. 화젯거리는 애초부터 적었고, 세테그와 투버 남성은 피곤한지 제 시간을 찾았다. 침묵이 짙어질수록 등불의 간격은 점차 멀어져 갔고, 라텐스의 흥미어린 시선 또한 점차 옅어져 갔다.

 

“그 때 발을 돌렸더라면, 원망 없는 추궁이라도 했을 테지. 아니, 사유를 가늠할 수 없게 되었을까?”

 

그의 말은 떠올리기 쉬운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모든 물체들을 지워내어 순백의 도화지를 만들 아량인지는 몰라도, 휘몰아치는 눈보라는 한없이 빽빽해져 있었다. 단순히 감정을 이입하기 난해한 것이 아닌, 현재의 상황과 너무 동떨어진 탓이기도 했다.

 

“알브나의 고리라... 너무 애매해졌어.”

 

그는 영문 모를 독백을 계속해서 뱉어냈다. 이곳에 있는 나지만, 결국 어디에도 없는 스스로가 의견을 내기는 요원한 일이었다.

 

라텐스가 덮어준 옷가지 때문인지는 몰라도, 당장이라도 꺾일 듯 휘청이던 나의 몸체는 미약한 생기를 발산해내고 있었다.

 

“생명의 저울이라, 어떤 연유로 벌어진 일일까.”

 

나는 직접적인 영향으로 타올라, 일상으로 남아버리고 있는 판국을 조금이나마 파악하게 되었다. 두 번째 삶은 내 곁의 남성이 입을 열 때마다 무게를 더해갔다.

 

라텐스는 거친 풍랑에 휘어진 내 몸을 바라보았다.

 

“하아… 그래, 내가 시작한 이야기니 직접 끝을 내야겠지.”

 

웅덩이에 고인 활기는 힘겹게 오르막을 지났다. 개척에 의미를 둔 채, 단 한 번의 흔적도 없는 곳을 지나간다. 그 길의 끝에 닿아, 나머지를 끌어올린다. 시간이 지나 그 자체로 이야기를 가진 활기는 잃어버린 열의를 반영하듯, 기력 없이 떨어져내렸다.

 

선명하게 울리는 투명함은 라텐스의 의식을 되돌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끈적한 우울함이 불규칙한 벽면에 엉겨 붙어 흘러내린다. 작은 물방울은 기름진 콧잔등을 적셨고, 그는 자신이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지면을 스치는 수많은 다리의 합주는 여전히 끊이지 않았고, 미약한 진동은 등에 여실히 전해졌다.

 

라텐스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그의 감각을 속였을 정도로 짙은 어둠은 한 치 앞을 바라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손등까지 내려온 소매를 쓸어 올렸다. 손끝으로 손등을 훑어보니 이전에 새긴 문양이 아직도 부풀어있었다.

 

[Rapachied, Kenz La]

 

짧은 주문을 외우자, 라텐스의 동공이 수축했다. 옅었던 눈동자의 채도가 높아졌고,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의 눈동자가 안정을 찾았다.

 

“…고요하군.”

 

규칙적인 발걸음이 사위를 메웠고, 희미하나 역동적인 몸짓은 드넓은 공간을 좁아 보이도록 만들었다. 분명 단조로운 풍경은 그 안에서 서로에게 협조적이지 못했으나, 그는 불확실한 조건에게서 안정을 찾았다. 생애 처음 느끼는 해괴한 감각은 결국 그가 차가움을 느꼈다는 사실을 덮어 내렸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아도 될 때, 많은 이들은 불안함을 느끼곤 한다. 외지에서 혼자 떠돌아다니던 라텐스의 감정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어야 했다. 그렇지만 그는 미동도 없이 바뀌어가는 장소를 지켜보았다. 암석 틈에서 흘러나온 물줄기에 빛나는 벽과,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탁한 기침을 내뱉는 생물들은 그에게 은은한 평온을 주는 듯했다.

 

“놀라시지 않으시네요?”

 

퓌르레로는 소롱의 몸에서 지낸 경험이 많은지, 평소와 비슷한 속도로 라텐스에게 걸어왔다.

 

“감탄을 표현한다고 해도 상황은 만족하지 않으니까요.”

 

“저희 보답 덕분에 쉬실 수야 있겠지만, 상대를 대하는 법은 개인마다 조금씩 달라져야한답니다. 알브나가 덩치를 불리지 못하는 이유가 그곳에서 나오죠. 물론 지레짐작이겠지만요.”

 

라텐스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퓌르레로는 그에게 철제 수통을 건네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뭡니까?”

 

“민감한 부분일 수 있을 텐데, 괜찮으십니까?”

 

라텐스는 마침 갈증이 났는지 물을 넘기고 있었다. 명확한 대답 없이, 한동안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들어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역시 손해 보는 걸 싫어하시네요. 그런 자가 어디 있겠냐만은 역시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나봅니다.”

 

퓌르레로는 히두가 곁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감정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응당 지켜야 할 지위의 짐이겠지만, 이미 허물을 입고 다니는 일이 익숙한 모양이었다.

 

“알브나는 왜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죠? 혹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게 끝입니까?”

 

라텐스는 반응이 없었고, 괜한 무게를 잡는 중년의 모습을 떠올리기에는 그의 표정이 너무 차가웠다. 그가 처음으로 본 꽃이 눈꽃이니, 화사함의 형상이 변질되었는지도 몰랐다.

 

“별다른 지시 사항은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를 얽매고 있는 것이 명확한 성질의 것은 아니니까요.”

 

“그곳이 그렇게 편안한가요?”

 

“저는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리 간단한 감정은 아닙니다.”

 

여운 없이 묶인 결말은 입안에 뿌리를 내렸다. 혀가 자라난 곳을 찾아 떠난 먹먹함은 살을 비집고 들어가 더는 나오지 않았다. 푸른 얼굴은 어두운 동공을 채우고, 적막 위에 그려진 악보는 여전히 단조로웠다. 늘, 윤곽만 남아있던 스스로의 모습은 이곳에서도 내내 그대로다. 그만큼, 퓌르레로는 라텐스에게 거부감을 느꼈다.

 

이해로 충족할 수 없는 그의 분위기는 아직도 자신의 모습을 갉아내기만 한다. 먹으로 점철되어가는 여정의 시초는 그렇게 짓눌린 채로 이어진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더욱 묵직한 덩어리를 집어삼켜 차림을 간편하게 하며 미풍에 밀려 시작된다.

 

“조금 더 가면 광장이 나올 겁니다.”

 

퓌르레로는 수통을 품에 넣고 얇은 천을 덮고 잠을 청하던 히두에게 다가갔다.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체구가 커진 건 착각이 아니었을 거다. 그 모습을 보던 라텐스는 고개를 돌려 어두운 통로를 향해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풋.”

 

웃음이라는 건 생각보다 많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사용된다고 생각하며, 라텐스는 깍지를 낀 손을 베고 누웠다. 어둡고 우울한 감정이 만연해있는 형국일지라도, 그곳에서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그리 생각했다.

 

고요함은 다시 단순한 가락을 펼쳐간다. 근원지를 알 수 없는 진동에 쏟아져 내리는 흙더미와 고인 물이 거처를 옮기는 소리는 그에게 안정감을 되찾아 줬다. 낮은 활기를 준다고 생각했다. 단지 이점을 주는 것이 아닌, 따갑게 내리쬔 빛줄기를 잡아 내리치는 것이라 느꼈다. 어둠과 빛,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역할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몰라도 좋았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여러 단어로 짓누르는 무채색의 응원이 아닌, 스스로가 택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타인의 삶을 보며 얻은 지혜는 원석에 지나지 않겠으나, 지침 정도는 되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부유물이 침전되었다. 흑백의 잔영이 망막에 남듯, 시선을 거친 모든 것들이 고정되었다. 색을 잃은 풍경이 허탈한 감정을 주워 삼키고 있었기에,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특별한 점이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기 위해, 홀로 설 필요가 없다는 걸 되새기기 위하여 나는 약간의 고통을 감내한다.

 

천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잠이 덜 깬 듯, 눈을 깜박이는 히두는 멍하니 퓌르레로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이미 몸에 밸대로 밴 모양이었다.

 

공간의 기질이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미약한 떨림이 피부의 잔털에 닿아온다. 푸르게만 물들어 있던 낮빛에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일단 여기에서 자격을 심사할 겁니다. 자문을 구하기 이전에, 저희가 요구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퓌르레로는 들뜬 목소리로 라텐스의 앞에 서서 시야를 가렸다.

 

“종족의 대표적인 성질이 개인의 성향과 역량을 무시하지는 않으니까요.”

 

광명이 몰아친다. 우울한 기색조차 걷어내는 불빛이 퓌르레로를 넘어 손을 뻗었다. 창백한 색의 피부가 타오른다. 둔중하게 내려앉았던 히두의 어깨 위에서, 그가 위세를 키웠다. 적어도 이곳부터는 그의 터전이리라.

 

“환영합니다. 이곳이 메디움입니다.”

 

육중한 기계가 소리 없이 움직인다. 타인을 압도해야하는 것이 사명인지, 부피가 큰 짐을 붙잡아 둔 채로 끊임없이 작동한다. 또한, 불쾌한 금속음이 활기에 묻혀 부정을 탁 트인 곳에 던져놓는다. 오히려 눈에 띄지 않게,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요소로 전락시킨다. 운동하는 추의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겨, 볼이 축 늘어진 칼레스가 모인 구석 상가를 보던 라텐스는 불쾌감이 드는지 미간을 모았다.

 

황토색의 바탕에 희거나 검은 무늬를 가진 그들은 비늘에 붙은 흙먼지를 닦아내며 자리를 지킨다. 아무렇게나 뒤집어쓴 천 옷에 탈피한 흔적이 드문드문 붙어있다. 모래바람이 그 앞을 스치니, 마치 아무런 생명조차 없는 듯 보였다.

 

“표정이 전부 같군.”

 

일행이 있는 여전히 협소한 입구와 비견되는, 광활하다는 단어가 모자랄 정도의 거대한 광장은 여러 목소리가 정처 없이 떠다니고 있었다. 라텐스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듯, 쳐들었던 턱을 내렸다. 그의 눈앞을 메운 최저층, 대부분을 차지한 홀의 중심부는 지하수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육식생물 휘하의 양식장처럼, 맑으나 너무 깊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미증유의 공포심이 이는 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지, 주변부의 지반마저 결백하다.

 

“내리셔야 합니다. 소롱을 통로 한복판으로 돌려보내야 하니까요.”

 

퓌르레로는 소롱의 배를 더듬어 작은 패를 떼어냈다. 이어 그는 패의 테두리에 박아놓은 보석의 색상을 확인하고, 벽에 박혀있던 동일한 색의 막대에 매달았다. 라텐스는 소롱을 전용통로로 돌려보내며 조촐한 사이참을 하는 히두를 흘겨본 뒤, 중심으로 향했다. 태양빛이 강렬하게 꽂힌다.

 

“쓰라리군.”

 

그는 본래 배낭에 걸쳐져 있는 천을 쓰려 손을 뻗었으나, 손가락은 애꿎은 허공을 훑었다. 라텐스는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햇빛을 가리며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남의 배낭이 추가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와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과 별다를 게 없었다. 퓌르레로는 다시 히두의 어깨에 올라갔으며, 히두는 인상을 강인하게 보이려 흉터를 더욱 흉측하게 구기고 있었다.

 

“영락없는 곰과 여우가 아닌가.”

 

라텐스는 그리 투덜대며 히두가 멘 배낭에서 천을 끄집어냈다.

 

“중심부의 호수는 뭡니까?”

 

“아, 그건 호수가 아닙니다. 설명하기 보다는 직접 보시는 게 빠르겠네요.”

 

라텐스는 얼마가지 않아 다시 완전 무장한 모습이 되었고, 무리는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은 가지각색의 발자국을 남기며 라텐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려 문제의 장소를 가까이 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모습을 드러내니, 이 장소가 가진 분위기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닮았네요.”

 

“역시 그렇죠?”

 

돛이 없는 선박들이 수면과 함께 흔들렸다. 흑색을 띄는 암석을 가공해 만든 선착장은 기세가 남다르다. 다른 대륙까지 넘보기 위한 자취가 새겨질 통로답게, 잔잔한 파도가 밀려들어온다.

 

“미관상 별로였지만, 그나마 합리적이라서요.”

 

그는 동질감을 느꼈을까. 얼핏 보여줬듯, 주검이 된 표정처럼 단순한 감탄을 표한 걸까. 라텐스는 여전히 창백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익숙한 그림자를 찾는다. 난, 그의 이야기에 이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욱하게 퍼진 우울함은 시각적으로 살펴질 뿐이었다. 그 순간 나는 라텐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닮았다는 말의 의중을 말이다.

 

새삼스러웠다. 핑계를 위해 나의 단점을 들춰내는 것이 아닌, 인정을 위해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키다니. 아주 잘 만든 게임이었다. 가상에서 현실을 찾도록 하다니, 이후에는 현실에서 가상을 찾게 될까.

 

여태껏 그랬듯, 나의 의사는 드러나지 못했다. 일이 벌어지는 당시의 자리에 있음에도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의외로 흥미로웠다.

 

라텐스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그래, 모든 일을 듣는다고 해도 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와 그가 각각 가야할 길은 닮지 않았고, 지나온 여정도 다르니까. 아마, 그도 나를 진심으로 위로하지 못할 테지.

 

그가 마지막에 다다라 무슨 생각을 했던, 우리의 간격은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만 대기하시면 시험 내용을 알려드리게 될 겁니다.”

 

숨이 영 텁텁한지, 라텐스는 목을 치며 퓌르레로를 바라보았다.

 

“순환 장치는 없습니까? 공기가 탁한 것 같은데요.”

 

“실내는 관리가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실외는 메디움에서 큰 비중을 가지지 못하고 있지만요.”

 

메디움은 과도하게 넓었고, 이곳에선 영체의 움직임도 꽤나 자연스러웠다. 아직 이 세계에서 거동할 육체를 받지 못한 터라 어색하지만, 히두에게 매달린 상태에서 시선을 틀을 수는 있었다. 덕분에, 소리를 죽여 뒤따른 그의 말을 듣게 되었다.

 

“그게 저희들의 무능일지, 저것들의 한계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이야기를 지어낸 작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행복을 당연하게 여긴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 위함이었을까. 아니, 색감이 뒤섞인 거짓말에 이미 익숙해진 사용자를 기만하려했을지도 모르지.

 

‘아무리 나라지만, 정말 더러운 사고야.’

 

히두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는다. 늦어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에 사실상 그들은 세테그와 함께 할 필요가 없다. 아니, 이미 속국의 개념일까. 무엇도 모르는 탓에 추측을 해야 했고, 언제나 결론은 추악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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