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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녹슨 저울 추들

한 걸음 (4)

by 연안 어귀 2021. 3. 23.

의외로 후덥지근한 기운이 감도는 내부에는 별달리 특별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실외보다 높은 온도가 의문점을 남겼지만, 보이는 풍경은 일상의 하나로 남을 피사체에 불과했다. 모래거미의 줄이 느슨하나 견고하게 벽면에 닿아있고, 손길을 허락한 지 오래된 듯한 농기구에는 먼지만 가득하다. 간혹 설치류에 의해 발생한 소음은 말 그대로 자연의 지저귐과 다름이 없었다. 그늘이 품은 아지랑이의 단말마가 가득하다.

 

그는 허리를 숙여 손으로 땅을 쓸었다. 부드러운 피부의 겉면을 타고 구르는 고운 입자는 손길에 따라 작은 생명들의 무덤가가 되었다. 그는 입술을 모아 바람을 불었고, 언젠가 다다를 운명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의 몸체가 휘청거렸다. 배낭 속의 잡동사니가 부딪히는 소리가 마중을 재촉하고, 그를 쳐다보던 남성의 눈길이 떠나간다.

 

아래층과 이곳을 이어주는 계단은 그리 가파르지 않았다. 직각으로 깎아내지는 못했으나, 뒤꿈치가 닿을 정도의 투박함은 아니었다. 발을 몇 번 놀렸을까, 화마의 기운이 안면을 뒤덮었다.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선율을 이루었고, 사람들의 눈초리가 비산하는 불똥처럼 쇄도했다.

 

“이곳까지 오는 데 힘들었겠어.”

 

계단에 기대어 나를 올려다보던 남성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자상이 두피를 양단했음에도 사나움을 떠올릴 수 없는 유들함은 이곳에서 간간히 보이는 시든 꽃의 화함과 닮은 데가 있었다.

 

“그것이 아닌 이유로 여기에 온 건 아니니, 그리 힘에 겨운 일은 아닙니다.”

 

그를 무심히 지나쳐, 계단을 셈하기가 끝나니 다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색다른 억양, 조금 의도가 느껴지는 기이한 음성은 분명히 사람의 언어를 알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옮겨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후드를 눌러쓴 남성의 어깨 위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말을 건넨 것의 형체는 사람과 진배없었으나, 쇳가루가 튀어 오르는 순간마다 보이는 겉모습은 범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른 과실의 육질을 갈라낼 수 있을 듯한 날카로운 콧날, 속눈썹이 없는 탓에 각막이 비정상적으로 두꺼운 얼굴은 일그러진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붉은 피부는 얇아 연녹색의 혈관을 드러냈으나,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질긴 가죽은 종족간의 불공정함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다른 목적이 있는 여정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일부는 같기도 하겠지만요. 그런데, 늪지의 암막(暗幕)이 여기에는 무슨 볼 일이십니까?”

 

성별을 알 수 없는 생물은 왜소한 체구를 가지고 있음에도 위축된 감정을 잊은 듯했다. 한달음에 장신의 남성에게서 내려온 늪지의 주민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와 같은 종을 본 경험이 있는 건가요?"

 

"생생하게 들었고, 수 차례 읽었으니까요. 저희는 생명을 담보로 발을 옮기기 때문에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대화의 상대를 내려다보고 있음에도 태도가 변하지 않았다. 한기에 길들여진 것이 단지 추위에 인정을 느끼는 것이 아닌, 뭔가 다른 의향을 숨기고 있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베두로페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주의를 환기시켰다. 본디 타인을 앞에 두었을 때 혀가 새파랗게 질리는 알브나들이기에, 이런 류의 대화가 익숙해 보였다.

 

"이번 세대는 변화가 좀 많으니까요. 귀동냥이지만, 타지에 있는 알브나들은 하나같이 일처리가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혹시 당분간 걸음을 맞춰줄 수 있을까요?"

 

그는 내부를 살피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인지, 손익을 따지는 시간을 두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쪽에서 먼저 요구하는 이유부터 듣겠습니다."

 

그는 낡은 외투의 깃을 여미며 짐을 자신에게 밀착하여 기댔다. 대화의 향방이 유하게 흘러가기는 그른 모양이었다.

 

“일단, 본 내용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편이 좋겠죠?”

 

배열을 감안하지 않은 탁자에 걸터앉은 늪지인은 품 안에서 흑색 계열의 수정을 꺼냈다. 곁에 서있던 남성이 화로에 들어있던 발화재를 삽으로 퍼내어 물건 위에 쏟아 붓자, 주홍빛이 주변을 덮었다.

 

“좁은 반경의 감각을 뒤섞는 도구입니다. 감각 자체가 뒤틀리진 않으니 당황하지 마세요.”

 

확실히 시각과 청각 자체는 문제가 없다. 단지 소리를 보고 외관을 듣게 되는 감각이랄까. 무언가를 자세히 판별하기에는 너무 현실적이지 못하다.

 

“우리, 거래를 유도한 측은 세테그입니다. 종족 명칭은 고유 언어로 칭하니 의미를 알 필요는 없겠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려 했으나, 행동은 뇌에 잔류했다. 잠시 안면의 악보를 구긴 그는 입을 열어 의사를 전달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부분이 있다는 점은 참 좋은 것 같네요. 먼저 청원을 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폐쇄와 교류를 적절히 이용해서 활동하는 종족은 세테그와 알브나가 전부니까요. 최소한으로 요구하는 능률은 만족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음표의 기둥을 구부렸다. 성대의 망울이 삼킨 문장은 뜻을 뻗었으나, 결국 기도 어딘가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그 말은 종족 자체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네, 이변이 생겼습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아니, 지금은 귀를 닫았다고 해야 할까. 이 괴현상에 적응할 필요는 없었기에 혼란스럽게 불거진 부분을 도려내었다.

 

“옆의 남성은 당신의 수족인가요?”

 

분명, 이 세테그의 옆에는 또 다른 형체가 있었다. 그와는 정 반대의 느낌, 거대한 체구와 두꺼운 선을 가진 사람이었다.

 

“옛 세대에 저희와 함께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족이라기에는 확연히 가까운 사이니, 저와 동일하게 대해주세요. 아, 대화를 제가 도맡는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큰 몸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 쉬었고, 이유를 말해주었다.

 

“우리는 대화를 하기 위해 스 - 읍 많은 호흡을 소모한다. 하지만 그만큼 스 – 읍 다른 활동을 유지할 때 드는 소비량이 적지.”

 

굵고 무겁지만, 많은 숨 탓에 분위기를 전환시키지는 못할 목소리다. 고작 두 문장을 말했음에도 상습적으로 소리 내어 숨을 들이키는 것을 보아하니, 정말 합리적인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렇다면 돌려 말 할 이유는 없겠군요.”

 

그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의 눈앞에서 희미하게 일렁이던 글자의 나열이 빠르게 시야를 먹어 치웠고, 그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감각을 차단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불꽃이 흔들리는 소리마저 꺼지는 순간, 세테그가 다시 입을 연다.

 

“은폐가 필요한 종족은 언제나 치명적인 약점이 있고, 그것은 내부에서 규율의 일부가 되어 장점으로 승화되죠. 단, 일정 구역의 밖에서는 통용되지 않지만요.”

 

체감하지 못할 정도지만, 분명 세테그의 말이 끊겼다.

 

“최근, 우리가 가진 양날의 특성이 지워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적절한 질문을 할 때를 찾고 있었고, 입을 열으려 했다. 다만 세테그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상재에 유별납니다. 알브나는 생존을 위하지만 세테그는 부의 축적을 또 다른 목적으로 두니까 당연한 것이겠죠. 포괄적으로 보자면 동일 업종에 종사하는 거니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이후에 지나야 할 곳은 많은 물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는 그가 질문을 받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으나, 걸고 넘어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그쪽이 부르려는 보상은 뭡니까?”

 

“고리의 나열이 다섯 번 점등할 정도의 재물을 주겠습니다.”

 

턱을 치켜들고서 손익을 계산하던 그는 눈을 찡그렸다.

 

“늪지까지 가는 거리를 감안한다면 제가 손해 보는 장사 아닌가요?”

 

“아, 중요한 단어 하나를 빠트렸네요. 당신 개인이 아닌, 알브나의 고리를 칭한 겁니다.”

 

그는 잠시 표정을 잃었다. 감정이 세밀하게 나눠져 용솟음치는 그 순간, 환각제가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굴곡이 진 미간과 일그러진 입꼬리가 드러나고, 그의 눈동자가 어느 지점을 정확히 응시했다.

 

“확실하게, 어긋난 규칙이 덮은 지역이 얼마나 되는 거지?”

 

투명한 피부 덕에 선명히 보였던 혈관이 시퍼렇게 일그러졌다. 서리가 어렸던 능글거림이 녹아 들끓는다. 무언가 소중한 것이 떠올랐는지, 그는 자제력을 잃었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알브나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쪽이 더 잘 알겠죠. 관측된 변화는 형태에 국한된 것이라서, 그 쪽에서 문제가 야기될 부분은 없을 거에요.”

 

한기가 새벽녘의 안개처럼 소리없이 모여들고, 잠시 드러난 땅이 곧바로 숨어든다.

 

“형태에 국한된 변화라, 그건 예전에 한 차례 있던 일이 아니었나?”

 

“그 당시에는 지적 수준이 낮았던 터라 기록만 되어있죠. 불가사의한 일은 전부 신의 농간에 의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지금에 와서는 안정적인 분화를 위한 과정이 아닐까라는 가설이 있기도 하지만 말이에요.

이번 변화가 그 때와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느 한 기점을 중심으로 극단적인 양분화가 일어났기도 하고요. 사실 알브나를 제외하고도 자문을 구할 만한 종족들을 초빙하고 있습니다.”

 

주위를 자욱하게 덮었던 몽환적인 빛이 사그라지기 시작했고, 하나의 파장을 게걸스럽게 탐한 수정은 이내 다시 검게 물들었다.

 

“제게 선택권이 있습니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으로 향하는 길 옆에 섰다.

 

“그쪽이 아니에요.”

 

세테그 남성은 얇고 긴 손가락을 수직으로 세워 테이블을 눌렀다.

 

“지하 통로가 있습니다.”

 

그는 집어 들었던 천을 바라보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목에 둘러멨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한사코 창백하기만 했던 이의 표정이 유난히 밝게 느껴졌다.

 

혀는 그 이후로 절단되었다. 쾌적한 침묵이 사위를 메우고, 먼발치에 있던 사막인들은 제 할 일을 찾았다.

 

강도 높은 몽둥이가 달궈진 금속에게 입을 맞추니, 눅눅한 불똥이 주변에 만개한다. 화로 안에서 벌어지는 열정적인 춤사위에 얼굴을 붉힌 수줍은 자갈들은 그 자리에 못이 박힌 채로 표정을 바꿨다.

 

그 와중에 그는 난잡하게 쌓아놓은 금속 자재를 무심히 바라보며 발을 놀렸다. 정적인 분위기와 은은한 압박감과는 다른 무차별적인 유동성이 공존하는 곳은 그에게 영감을 심어줄만한 광경이 되지 못하는 듯했다. 뭉툭한 가죽신의 끝에 채인 돌조각이 서늘한 구석으로 밀려났고, 세테그 남성은 계단에 접해있는 벽면에 비치된 등을 들었다.

 

이전의 개방된 통로와는 다르게 회잿빛 석문이 그들을 반겼다. 종속은 허리를 구부려 아래의 작은 미닫이문을 열었고, 신분을 밝혔다.

 

“일전의 세테그 퓌르레로와 스 – 읍 투버 히두다. 일행에 스 – 읍 알브나 남성이 추가됐다.”

 

“알브나의 성명은?”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지만, 목소리 자체는 나긋하다. 잠시 자리를 맡아준 걸까.

 

“라텐스입니다.”

 

라텐스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몇 초간 공백상태가 이어졌다. 월등한 기술을 기대한 사람을 짓밟는 거친 소리는 벽면과 석문 사이에서 나타났고,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 사이로 문지기의 생김새가 드러났다.

 

비대하지만 늘어진 귀는 위압감을 선사하지 못했으며, 얼굴의 반절을 차지하는 코는 본체에게서 독립하려는 건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또한 눈망울은 갓 태어난 생명처럼 영롱했으나, 아쉽게도 눈이 작아 매력이 상쇄되었다. 짙은 회색의 피부를 가진 그 남성은 콧잔등에 걸어두었던 주머니를 퓌르레로에게 건넸다.

 

“황색 가루다. 통행 요금은 변동 없다.”

 

라텐스에게 보였던 호의는 순전히 용건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주머니를 낚아챈 세테그 남성은 살갑던 미소와 어투는 어디로 치워버렸는지, 어떤 안색의 변화도 없이 그 좁은 공간을 지나쳤다. 비단 라텐스의 비관적 가치관이 비뚤어진 가지의 끝을 내렸다고 해도, 칙칙한 감정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통성명을 이런 식으로 하는 것도 나쁘진 않군요.”

 

라텐스는 자신을 맞이할 채비가 완성되어 있었다는 점에 만족감을 표했다.

 

“자연스러움에 편승된 이질감은 간혹 무시되곤 하니까요.”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스 – 읍 곁들이는 것도 재능이더군.”

 

퓌르레로와 히두는 서로가 장점과 단점을 갉아먹는 조합이었다. 장점을 상쇄하는 것이 그 자체로 이롭지는 않겠지만, 이성을 가진 타인을 상대할 때는 나름대로의 이점을 가진다.

 

“세테그가 투버와 함께 하는 이유는 잘 알겠습니다. 물론, 제가 생각한 것이 전부 일 리는 없겠죠.”

 

“당연한 말씀을 뽐내며 말하는 건 버릇인가요?”

 

그들은 구식 승강기에 몸을 실었다. 무게가 증강됨에 따라 좀 더 긴장감을 얻게 된 기반은 이후를 위해 힘을 풀어냈다. 구리를 철골 사이에 끼워 넣어 탄력을 부여한 기구는 걸쇠가 풀림과 함께 자세를 낮췄다.

 

“좀 더 깊을 거라 예상했는데, 과대평가였나요?”

 

“무리를 한다면 지하에 도시를 세울 수도 있죠. 단지 실용적으로 설계했을 뿐이에요.”

 

퓌르레로와 라텐스의 대화를 말없이 듣던 히두는 새삼스럽게 투박하게 다듬어 놓은 벽면을 바라보았다.

 

“소롱의 머리맡에서는 스 – 읍 대화를 삼가는 걸 추천하지.”

 

라텐스는 게슴츠레한 형상을 유지하던 눈꺼풀을 들어내며 궁금증의 꼬리를 잡아챘다.

 

“소롱이 뭡니까?”

 

“분화 당시에 땅 밑으로 기어들어간 놈들 중 하나입니다. 식량을 제공하면 우리의 일을 도와주도록 교육했죠.”

 

라텐스는 눈동자를 굴리며 소롱의 형태를 짐작하려 애썼으나, 중도에 들린 걸쇠의 마찰음이 세밀한 상상을 저지했다.

 

“중간에 제동을 걸어야 스 – 읍 하니, 신경쓰지 마라.”

 

“사소한 것으로 호흡을 낭비하지 마.”

 

퓌르레로는 그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려 했으나, 중도에 다가가던 손길을 멈췄다. 히두 또한, 그와의 거리를 벌린다.

 

라텐스는 새삼스레 그를 바라보았다. 아래턱 골격이 크고, 흉터가 가로지른 눈은 깊게 들어가 그를 더욱 강인하게 보이게 했다. 벌어진 어깨의 끝은 피부가 두터웠으며, 손등의 중앙에 작은 뿔 세개가 있었다. 어떤 환경이 그들을 이런 형태로 인도했을까.

 

“보수의 간격을 줄인다는 손익에 비하여 들이는 수고가 적군요.”

 

승강기의 속력은 점차 줄어들어 이젠 유아들의 장난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걸쇠가 한 번 더 맞부딪히자, 완전하게 제동된 기구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히두는 검지로 머리를 두 번 두드리더니 제자리에서 도약하여 이음줄을 잡아 당겼다. 금방 닫혔던 부분이 지조 없이 풀려나갔고, 승강기는 다시금 하강하기 시작했다.

 

“방금 제가 상궤를 본 건 아니겠죠?”

 

“이미 정형화된 처방입니다.”

 

“…뭐, 편하고 좋네요.”

 

“노파심이겠지만, 다른 세테그의 앞에서 빈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퓌르레로는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는 황색 가루 사이에 묻혀있을 무언가를 찾는 듯, 느긋하나 빈틈없이 눈을 움직였다.

 

“다행히 늦진 않겠네요.”

 

종언의 말로는 이기적이나 그만큼 달콤했다. 죄악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하여 멀리하게 되었다. 성찰의 의미를 단지 자책의 선에서 끊어내었다. 빛 좋은 개살구, 아니 사실 그리 보기 좋지도 않았다. 그저 보이지 않는 희로 주검을 남긴다.

 

푸르게 물든 희열은 어느 곳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한다. 유유자적함을 스스로 칭하여 고독을 곱게 갈아 마신다. 우리는 한 공간에서 여독을 풀었으나, 오물은 본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이상은 현신을 위하였고, 꿈은 염원을 위하였다면.

왜 우리에게 최선이 약속되지 못한 걸까.

 

짧은 사색은 강렬했던 순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진다. 스스로 선택한 날개가 없던 추락은 고통을 주지는 않았다. 다만, 서로 뒤엉킨 선의 첫마디를 확인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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