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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녹슨 저울 추들

한 걸음 (6)

by 연안 어귀 2021. 3. 24.

라텐스는 천을 끌어올려 매듭을 묶었다.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닌지, 미간은 찌푸려진 채였다.

 

“앞으로 며칠간 대기해야 합니까?”

 

퓌르레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점점 가까워오는 거대한 석재출입구를 올려다보고 난 후, 두둥실 떠오르듯이 말했다.

 

“길어야 나흘...”

 

라텐스는 그 모습을 보고,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미적인 요소 보다는 사람의 기세를 찍어누르고자 조각된 거대한 석상이 입구의 양 옆에 서있다. 근엄한 표정와 자세로 경직된 것이 아닌, 통로에 창을 겨눈채 눈에 박힌 보석을 계속해서 번쩍인다.

 

"이곳이 그렇게 가치가 있는 곳인가요?"

 

"하하, 그건 나중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라텐스의 표정은 여전했다. 이 상황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모든 것을 알기에 담담하다기 보다는 자극 자체에 둔감해진 느낌이었다. 난 여느 때와 같이 의심하고, 내게 있지 않은 것조차 밀어내려 애썼다. 모래를 한 가득 실은 바람이 나를 흩어내려하나, 난 이곳에 없었다.

 

라텐스는 창의 날을 바라보았다. 예기가 감돌지는 않았지만, 패도적인 성향이 흘렀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알 수 없는 글자와 형상이 새겨진 입구를 지나치며, 그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스미는 한기, 동굴을 깎아 만든 공간은 언제나 은밀한 연상으로 다가온다. 그늘이 드리운 굴곡은 희미한 잔영으로 남아 더욱 서늘한 인상을 남긴다.

 

"인력을 충원할 수만 있다면, 바뀌겠지."

 

"네?"

 

라텐스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혼잣말은 퓌르레로의 귀를 세웠다. 정보는 곧 힘이 된다는 상인의 지론은 이곳에서도 유효한 걸까.

 

"개인적인 일입니다."

 

라텐스는 다시 한 번 선을 그었다. 이미 여러 번 새긴 경계는 거대한 협곡이 되어 자신을 고립시킨다. 장엄한 경관을 만드려는 의도가 아닌, 오직 홀로 남아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다. 우리들에게는 관계와 사회 따위는 의미가 없다. 계속해서 작업을 행하야만 풍족함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남들은 그저 남일 뿐이었다. 내 삶은 나만 오롯이 남아있기도 벅차고, 그만큼 짧다.

 

과연 그도 나와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일까. 아니, 나와는 다르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도 고리의 나열을 좀 더 견고하게 만들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계약 관계는 신뢰가 중요합니다. 말씀하셔도 보안은 유지되고, 저희는 족종 내부의 일을 장사에 접목시킬 정도로 아둔한 놈들이 아닙니다."

 

히두는 퓌르레로를 바라보았다. 생전 처음 듣는 말이라 그런 걸까. 그의 시선은 한동안 동료의 입주변을 맴돌았다. 눈동자가 향하는 위치는 어느 때나 몸과 다른 인물, 그것이 히두였다.

 

"당신들의 관계는 완벽하지 않아보입니다만, 계약 관계가 아니라 그런 겁니까?"

 

라텐스는 또 다시 다분히 공격적인 질문을 해왔다. 의도치 않은 말이라면, 그의 협곡을 헤메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을 것이다.

 

"흠, 조금 다릅니다."

 

퓌르레로는 화를 내지 않았다. 여러 군상들 중에서 드문드문 보이는 사교성이 없는 사람이겠거니 생각하는 것이겠지만, 그는 무언가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더 좋아질 겁니다. 많은 시간을 들였으니까요. 그게 저의 시간 내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믿어보려합니다."

 

히두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다른 관심이 없는 건지, 입에 발린 말에 불과함을 알기에 보이는 반응일지는 알 수 없었다. 나의 시간은, 이곳에서 가장 느리게 흘러갔다. 각자가 현실에서 해야할 일을 찾고 있지만, 모두가 다른 곳에 머물러있었다.

 

그들은 다시 혀를 말아 넣었다. 침묵으로 대화하기를 서슴지 않는 그들은, 사뭇 닮아있었다.

 

투박하게 깎은 내부는 고운 흙이 가득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입자가 흩날리고, 발자국은 선명히 남았다. 단순히 지나가기 위해 만든 통로의 끝은 그와 같이 밋밋한 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히두는 앞으로 나서 문을 열었고, 동물 지방을 먹인 횃대를 벽에서 집어들었다. 퓌르레로는 비교적 흙먼지가 없는 벽에 바람을 불었고, 겉면이 오돌토돌한 벽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뒤로.”

 

히두가 팔 전체를 움직여 횃대에 불을 붙이니, 지하로 이어진 계단의 윤곽이 나타났다.

 

“이곳만 지나면 됩니다.”

 

라텐스의 얼굴 위로, 흔들리는 불꽃이 만들어낸 음영이 자리를 잡았다. 그는 발 밑을 주의하며,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어느 말도 없었지만, 그들이 지나간 위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퓌르레로 씨, 지하에 초청한 이들을 전부 모실 공간이 있습니까?”

 

“라텐스 씨는 따로 분류가 되신 겁니다. 저희들의 재량으로 대상자의 역량을 판별, 우선 순위를 나누도록 했습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이 미리 숙지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퓌르레로는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막힘없이 대답을 이어나갔다. 조용하고 좁은 공간에 그의 목소리가 몇 차례 울려퍼졌다. 라텐스는 히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단순한 시종에 불과한 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퓌르레로와 동일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히두의 어깨 위에 있던 나는, 그의 입술이 잠시 열렸다 닫히는 걸 보고있었다.

 

“처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는 라텐스 씨를 가늠해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굳이 그것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더군요.”

 

“무엇보다, 넌 스 – 읍 종족의 존폐를 걱정하지는 않았으니까.”

 

히두와 퓌르레로는 그리 말하며 계단 하나를 뛰어 넘었고, 라텐스는 그들의 상체를 바라보고 있는 상태로 그 행동을 따라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의 걸음을 따라하는 것도 그렇고 말이야.”

 

“이렇게 쓸데없이 숨겨놨다면 함정도 있겠지요.”

 

라텐스는 천을 잡아당겨 흙먼지를 털어내며 그들과의 거리를 유지했다.

 

“그럼 메디움의 실외에 있는 자들은 어떤 식으로 알고 있습니까?”

 

“항로 개척 쯤으로 알고 있지. 알 수 없는 장소에선 여러 재능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초빙했어.”

 

라텐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메디움의 용도를 항구로 알리는 겁니까? 이거 참, 산맥을 관통하는 통로가 있다는 사실이 그보다 가치가 있다니 놀랍군요.”

 

“언제부터 눈치채셨죠?”

 

퓌르레로는 그리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라텐스는 웃음소리를 흘리진 않았으나, 여전히 입꼬리를 들고 있었다.

 

“이미 개척된 통로를 다니는 소롱의 입에 흙과 자갈이 붙어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히두가 걸음을 멈췄다. 퓌르레로가 횃대를 넘겨 받고, 계단 아래로 던졌다. 얼마되지 않아 통로는 어두워졌고, 요란스럽게 굴러가던 불덩이는 어느 순간 소리를 잃었다.

 

히두의 모습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보이는 것 같았다. 피부가 암석에 쓸리는, 허전하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편안한 소리가 이어졌다. 색을 잃었지만, 여전히 가득하다고 느낄만한 그런 것이었다.

 

“예상보다 뛰어난 인재는 언제나 변수를 가지죠. 그것이 해가 되던, 익이 되던 총괄자에게는 달가운 것이 아닙니다. 라텐스씨, 당신은 그런 부류인가요?”

 

다르게 들렸다. 비로소, 어느 것도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그가 가진 목소리의 형태가 보였다. 한낱 윤곽에 불과한 정보였지만, 단 하나의 선입견이 미치는 영향은 이렇게 컸다. 얇고 날카롭게만 들렸던 음성에 울림이 생겨났다.

 

“저는 제가 옳다고 판단한 일을 행할 뿐입니다.”

 

라텐스의 대답이 들린 직후, 고요한 배경이 되었던 마찰음에 변화가 생겼다. 베두로페에서 들었던 석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제야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퓌르레로는 히두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시선을 가져간 남성의 근육이 수축하고 있었다. 안쪽으로 밀어낸 돌덩이가 있던 자리에서 빛이 새어나온다.

 

퓌르레로는 히두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 틈새로 손을 넣어 벽 너머를 더듬는다. 장치를 찾은 듯, 그의 얇은 팔이 꿈틀댄다. 부속품이 맞물리고, 물이 찰랑인다. 횃대를 던졌던 아래로 향하는 통로에 광명이 몰아친다. 동시에 돌을 빼냈던 자리가 원 상태로 돌아갔다.

 

퓌르레로와 히두를 따라 다시 몇 걸음 옮기니, 잘 다듬은 석재로 이루어진 방이 있었다. 발광석이 박힌 천장과 밋밋한 석벽으로 이루어진 방의 끝에는, 밀림에서나 볼 수 있는 짙은 색의 나무로 만든 문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확실히 사색에 잠기기엔 좋은 장소입니다만, 머무르기엔 위험하군요.”

 

라텐스는 통로 옆의 물길을 보며 말했다. 무색무취, 아주 맑은 물이었으나 어느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아직 그런 불상사는 없지만, 들어가면 수초 내에 녹습니다. 조심하세요.”

 

퓌르레로는 이미 라텐스를 지나쳐 문고리를 손에 걸었다.

 

“이곳에서 보고 들었던 것들 발설하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짧지만 강렬했던 여정에서 만난 여관, 그런 곳에선 언제나 인연을 만나곤 한다. 불쾌할지도 모르나, 많은 이들은 부질없는 만남을 감내하며 걷는다. 마치 목적을 다른 한 켠에 남겨둔 것처럼, 천천히 걸음을 향한다. 라텐스는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에 잠겼을까. 그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지만, 이젠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타인의 감각을 공유해 체험한 이세계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설정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진행상황을 기록한 뒤, 접속을 종료합니다.]

 

과연, 나는 그들에게서 어떤 것을 받은 걸까. 아무 것도, 아무리 하찮은 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선명하나 결코 자각몽은 아니었던, 그런 세상이 처음으로 막을 내렸다.

 

현실의 공기는 차갑다. 미약하게 울리는 전자기음과 어서 차가운 모습으로 변모하라는 듯, 반짝이는 불빛들이 나를 반겼다. 다만, 반갑지가 않았을 뿐이다. 오히려, 내가 홀로 남아 온전한 생각을 누릴 시간이 주어졌지만. 더욱 더, 감정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곳에서 내쉬는 한숨은, 여전히 속내가 보이지 않는다.

 

익숙한 천장... 너무도 낮익은 공간에 왔음에도 전혀 기쁘지가 않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스스로에게 자문하기가 어려운 난제였다. 아니, 풀지 못하기보다는 풀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문제로 남게 되어간다.

 

[심장박동이 증가했습니다. 의식이 있는 관계로, 사용자에게 용의를 묻습니다. 응급장치를 호출할까요?]

 

성대가 물에 잠겼다. 조금이라도 남은 호흡으로 의사를 표현하려하지만, 공기방울만 두둥실 떠오른다. 고동이 파문을 퍼트리니, 심장의 울림 밖에 들리지 않는다.

 

[사용자가 의사를 표현하지 못합니다. 응급장치를 호출, 10초 이내에 도착합니다.]

 

비상등이 켜졌다. 붉은색의 불빛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누구도 들어온 적 없었던 공간에 불청객이 들어왔다. 살구색 피부, 간호사의 복장을 입은 무표정의 여인이다. 걱정도, 다급함도 없이 빠르게 움직여 내 목을 움켜쥔다. 따뜻하고, 부드럽지만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흐릿한, 마치 내가 자란 이후로 꾸지 않게 되었던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가상보다 현실감이 없었고, 생동감도 없었다. 그런 세상 또한, 벼락이 치는 모양새로 막을 내렸다. 의식이 서서히 사라지는 동안, 우습지만 신념을 부정하기만 했던 그들이 보고 싶었다. 오늘은 알고 있음에도, 답이라 칭하지 않겠다고. 그리 다짐하게 된,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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