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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녹슨 저울 추들

주변을 보다 (1)

by 연안 어귀 2021. 3. 25.

바라지 않았었던,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그런 일이었다. 스스로가 지켜온 지난 시간들이 단 하루만에 무너진다는 것은, 긍정적인 변화라도 본인을 힘들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의식이 돌아왔음에도 눈을 뜨지 못했다. 조용한 방 안을 메운, 영상물의 음향이 가진 미세한 잡음조차 거슬렸다.

 

“눈 좀 뜨지 그래?”

 

익숙한 목소리, 점점 무뎌질 수밖에 없었던 기이한 감각이 살아났다. 나의 여동생은 나와 닮았다.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자 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남이 될 수는 없었다. 편안해지고 싶었다. 내가 우연히 만났던 다른 사람들도 만남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감정을 쌓고, 덜어낼 이가 필요했었다. 그건 우리가 아닌, 자신을 신인류라고 칭한 모두의 의견이다. 하지만, 우리는 배려를 중시했기에 가까워질 수 없었다.

 

“몇 시간 지났니? 예화야.”

 

차예화, 그것이 동생의 이름이다. 일말의 걱정조차 이끌어내지 못하게끔, 온전함을 연기한다. 물론 몸이 느끼는 통각은 없지만, 이 자리가 불편했다. 나는 라텐스가 있던 세상을 동경하게 된 걸까. 아니, 맹목적인 추구는 아니다. 단지, 우리가 무시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통감했을 뿐이었다.

 

“반나절 정도.”

 

우리는 이상적인 감정과 관계를 만들고자 했다. 사람이 꿈꾸는 온갖 것들이 있는 유토피아를, 신빙성은 없어도 과거에 한 차례 이루어냈던 꿈의 세상을 원했다. 원대한 목표가 세워지고 나서는 일사천리였었다. 한낱 미생물에 지나지 않더라도, 만물이 한 곳을 바라보던 때라고 했다. 덕분에, 조상들은 인류가 향하는 그 길이 옳은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든 것이 이뤄지고, 욕망이 없어지고, 행복만이 남아야 했었지.”

 

무심코, 혼잣말을 했다. 동생의 눈치를 살피려 눈을 뜨니, 그녀는 어릴 적의 모습이 아니었다. 길어진 머리카락, 뚜렷해진 이목구비와 체취 그리고 옷차림. 좀 더 나아지고자 노력하며 보았던 거울 속의 나는 저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진정으로 추구한다는 말의 진의는 이미 어긋났다.

 

“예뻐졌네.”

 

이것도, 본래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이 때부터, 나는 내가 걸어간 길이 어떠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더라도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내가 아슬하게 유지했던 모든 관계들이 당겨지고 느슨해져, 종래에 완연히 끊어진다고 해도 나는 나를 찾고자 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들에게 배운 가르침이었다.

 

“새로운 삶을 준다는 것, 당당하게 내걸었던 문구 말이야. 성공한 거 같아.”

 

예화는 기계를 조작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의아해하지만, 역시나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는다. 맑은 눈동자 안에서 기다림이 보여, 나는 말을 이어갔다.

 

“단지 일방향이 아닐 뿐이지.”

 

“나아진 것 같아?”

 

기대하지 않았던, 그런 물음이 들려왔다. 대답하며 창가로 옮겼던 시선을 옮겼다. 흐릿하고 빠르게 지나가는 일반적인 방 안의 사물이지만, 인위적인 조명을 받은 듯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래, 확실히.”

 

조금은, 가까워진 걸까?

 

상대방과 동질감을 느끼기 위한 이질적인 웃음이 나오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참으려 해도 폐는 모든 숨을 뱉어내고, 경박한 웃음이 방을 채웠다. 여동생은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 그리도 애달플 수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속이고자 하지만, 그 뜻이 조금 달라졌다. 미움받는 것이 두렵지도, 남을 미워하고자 결심하지도 못했었다. 여전히 어렵지만, 적어도 온전한 후회를 남기지는 않으리라.

 

“갑자기 웃어서 미안해.”

 

병실에는 오직 침대 하나 뿐이다. 모든 진료는 기계가 하며, 그에 따른 조치까지 마무리한다. 회복을 위한 장소로만 남아, 일말의 여유도 남기지 않는다. 나는 이 사회에서 누군가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과연, 동생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눈을 맞추니, 동생이 차분하게 물어왔다.

 

“오빠, 문자 안 읽었어?”

 

“문자라니, HP?”

 

[아직 장문의 글 하나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공동으로 사용가능한 시설에는 인공지능이 드나들 수 있었고, 덕분에 나는 사과해야 할 것이 남아있음을 알았다.

 

“아아, 왜 이름으로 안 보냈어?”

 

“그러면 꼭 읽어야 할 것 같잖아.”

 

“확인.”

 

이번에 운영 시작한 게임,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니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괜한 참견이라는 거 감안하고 보내는 거니까 한 번쯤은 고심해줬으면 좋겠어. 아, 어머니가 지저로 향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어쩔 거야? 예정자와의 접촉을 삼가라는 건 알지만, 한 번 만나보고 싶지 않아?

 

동생은 이미 조금 달라졌었다. 미워하는 방법은 모르지만, 미움받을 준비는 되어있었다. 내가 라텐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동생이 어색했을까? 아니, 나도 한 가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야할 길이 어딘지도, 이정표에 적혀진 단어를 알지 못해도, 적어도 그곳으로 걸어갈 준비는 했다.

 

“언제야?”

 

“미안, 미처 오빠 생각을 못했어.”

 

우린 용기가 없다. 버티는 것이 아닌, 쓰러져 웅크린 상태로 지나가기를 바란다. 때문에, 더욱 믿을 사람이 필요하다.

 

“아니, 어머니 말이야. 언제 만날 거야?”

 

알 수 없는 일을 마주쳐도 조급함을 보이지 않았던 그들처럼, 천천히 걸어 언젠가는 당도할 것이다. 내가 이곳이 나의 목표임을 확인할 때까지, 불분명한 순간을 기다릴 것이다. 내게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더라도, 해보고 싶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에 올려진 외투를 걸치고, 어떤 부담도 없도록 손을 내민다.

 

멍하니 있던 동생은 이내 미소지었고, 나와 그녀는 병동을 나왔다. 최근 보았던 어떤 하늘보다 맑았다. 푸름, 그 이상의 색채로 도약하려는 듯 스스로 흐느껴 번져간다. 차고에 배치된 차량은 적었고, 인공식물로 가득한 정원을 지나 입구에 도달한다.

 

우리가 약속한 만남은 후일이 되었으니, 서로 가야할 길로 향한다.

 

이미 예정된 듯, 말없이 헤어지니 사색은 한 층 깊어지고 강렬해진다. 마치 자신의 정신병을 가감없이 마주친 것처럼,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몰아친다. 발바닥을 짓누르는 체중이 무겁고, 태양빛에 달궈진 길이 뜨겁다. 개개인이 모여 만든 시각적 무리의 사이에선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는다. 침묵은 겹겹이 쌓여, 무심코 뱉은 말마저 먹어치운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라는 말을 믿었고, 그런 사람들을 보며 자랐기에 당연한 줄 알았다. 내가 보는 모든 사물의 채도가 실제보다 낮아진 것이, 원래 그런 줄 알았다.

 

라텐스, 그가 살던 설원은 이와 같이 보여도 보이지 않는 것이 즐비했다. 그럼에도 그는 달랐다. 슬픔을 알기에 더 행복하다는 핑계가 아니라, 비와 희에 어떤 관계도 두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는 그렇게 자라날 수 있었다. 침입이 불가능한 성벽의 한 귀퉁이에 개구멍을 만들어 둘 수 있었다. 나는 퓌르레로와 히두가 지나간 그 길이 그들로 인해 넓어졌음을 안다.

 

그리고, 나의 성 또한 부실해진 곳이 생겼음을... 알고 있다.

 

기분이 이상했다. 좋지도, 그렇다고 싫지도 않은 기이한 감각이 나를 지배한다. 이놈들이 뭐하는 놈인지 알기 전까지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 좋을까. 난 아직 그의 터전에 들어서지 못했다. 단지 의사를 그에게 전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들어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잡념을 털어내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길게 뻗은 대로, 그 위를 지나가는 기계와 장비 그리고 몇몇의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아 길을 나서는 사람, 자신이 꿈꾸는 관계를 위해 밖으로 나온 이들은 바라보는 곳이 명확했다. 정처없이 길을 나선, 필요에 의해 몸을 이끈 나 같은 사람과는 달랐다. 지저인만이 본인을 위한다고 생각했지만, 난 언제나 자신의 관점에서 만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편협한 시선이 도심을 가로질렀고, 목표가 있어 켜놓은 전등에 물들어 색을 머금었다.

 

그 순간, 세상이 넓어졌다.

 

창백한 색채의 건물의 외곽에 햇살이 내려앉고, 외벽을 타고오른 덩굴에 꽃이 피었다. 바로 옆에 있던 가게에서 은은한 향이 풍기고,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섞이지 않도록, 일정 거리를 두고 설치된 음향기기에서 음악이 울려퍼진다.

 

옛날, 이젠 고전이 되어버린 흔한 사랑 이야기에선 이런 대목이 많았다. 사랑을 하게 된 순간 잃어버렸던 색이 자리를 찾았다는, 그런 묘사가 많았다. 그런 비현실적인 상상에 비웃음을 보냈었지만, 오히려 실제로는 멈췄던 시간마저 흐른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름다움을 목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급격한 변화에 감탄한 것도 이유가 될 수 없었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될 사람이 앞으로 수없이 많아질 거라는 생각이 뇌리를 관통했다. 이건, 단순한 게임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게다가, 나는 아직 튜토리얼조차 마무리하지 못하지 않았던가.

 

“가야겠지.”

 

낮익은 건물과 거리지만, 그리 익숙한 느낌은 아니었다. 세계는 아무런 언질도 없이 내 시선을 부정했고, 나는 선택권이 없었을 뿐이다. 강요가 아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다. 내가 하려는 선택은 애초부터 하나다.

 

오직, 한가지 뿐이었다.

 

심장박동에 맞춰 흔들리는 시야, 모든 것을 봐달라는 듯 환하게 밝아진 세상이 아직 어색하다. 빠르게 적응한다면 더 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아직 모르는 것이 있었다. 분명 자신의 소유 중 하나일테지만, 나는 나의 일부를 그것이라 칭했다. 어떻게 도착했는지는 모르겠다. 편안한, 그럼에도 정답지 않은 곳에 다시 돌아왔다. 어김없이 내가 눈길을 향하는 방향에 불빛이 살아나지만, 여전히 신기했다. 그리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생동감이라는 단어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달라진 건 아주 작은 것임에도, 고작 그 뿐임에도 감당하기가 버겁다.

 

[여동생의 글 그리고 익명으로 보낸 글 두 가지가 미확인 상태입니다.]

 

의자에 앉아 살얼음이 낀 물을 넘긴다. 입가 사이로 한 줄기가 새어나오지만, 불쾌하진 않다. 내가 느끼는 갈증은 비단 목의 호소가 아니니까.

 

“예화의 글부터.”

 

[부가 설정을 확인해주세요.]

 

탁자에서 영상이 출력된다. 우측 상단에는 필기도구와 종이의 질감, 굵기와 같은 설정창이 흐릿한 상태로 남아있다. 만년필 그림을 누르고, 빛바래고 약간 거친 종이를 선택한다. 굵기는 기본값으로, 음향과 영상 효과를 사용하도록 한다.

 

[현재 설정을 저장하시겠습니까?]

 

“그래.”

 

[현재 설정과 상응하는 전등의 색감이 목록에 있습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래.”

 

여전히, 나는 모르는 것이 많다. 거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온화해졌고, 만년필의 촉감이 소리가 되어 사방을 뒤덮었다. 대낮임에도 방을 채운 석양빛이 길게 늘어진 음영을 만들고, 차분한 종이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렇게, 평온한 시간이 만들어졌다.

 

솔직히 놀랐어. 내가 아는 느낌이 아니었기도 했고, 오빠 목소리가 그렇게 부드러워질 수 있을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작은 갈등이 해소된 뒤에 또다른 걱정이 남았지만, 이대로 좋을 수 있으니까 상관없을 거야. 사실 그 때는 당황해서 미처 물어보지 못했는데, 정말 괜찮은 거지?

 

웃음이 나온다. 속내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 아니다. 자의식이 팽배하여 낳은 비관, 결말에 다다라 결국 벽을 깎아내리는 행동이 막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본심은 스스로도 온전히 인지하지 못하니, 나도 과도히 헤아리기를 포기한다. 분명, 이 결단은 완벽에 도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저, 잠시 돌아가기 위함이다. 단지, 처절하게 염원하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을 뿐이었다.

 

[익명으로 보내진 다음 글을 읽으시겠습니까?]

 

“보여줘.”

 

안녕하십니까, 차영님. 다름이 아니오라 간단한 설문에 응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한 회답이 되어도 좋은 것이니 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하셔도 됩니다. 장기적인 여흥이 될 가능성이 있는지, 두 번째 삶을 지칭할 정도의 값어치가 있을지, 이 세계가 현실에 어떤 파문을 던질지에 관한 질문이오니, 순서대로 작성하여 보내주십시오.

 

다만,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내가 살아왔던 것을 부정당했고, 스스로 납득하여 나아가려 했다. 하지만, 본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나는 아직 온전한 열망을 품기엔 이르다.

 

내게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세상을 만든 제작사는 제대로 된 명칭이 없다. 참가한 사람들의 분야가 워낙 방대한 탓도 있지만, 근원적인 목표는 은밀히 진행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변화는 명확하나 보이지 않아야 했다.

 

게다가, 이들은 본인들을 대표하는 명명을 내세우지 않았다.

 

과연 어떤 가정이 가능할까. 결여된 요소는 없으나 점차 침체되어가는 사회에 자극을 주는 것 뿐일까. 아니, 그렇다면 대외적인 명분을 내세워 진행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각기 다른 개인이 자각해야만 하는 문제는 내적인 부분일 터다.

 

그렇다면 내가 향하고자 하는 방향, 그 부분이 무엇일까. 민감하여 다루기 난해한 부분이라면, 역시 분류의 경계를 지우고자 하는 건가.

 

손에 쥐고만 있던 필기구로 영상 위에 글을 쓴다. 미동이 있어 바른 글씨체는 아니나, 망설임없이 써내려간다.

 

필시, 장기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주체는 하나기에 두 번째 삶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각기 다른 개인에 관한 문제이기에 아직은 알 수 없다.

 

이정도라면 대답은 될 것이다.

 

“어떤 생각으로 일을 진행시켰던, 나름대로 맞는 답이 되겠지.”

 

[이대로 답신할까요?]

 

“부탁할게.”

 

무지가 안식을 준다는 건, 그리 불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다시 배움을 청하려 접속기를 가동했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작은 진동이 맥박과 어우러지고,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가 열렸다. 보이지만, 역시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미친 듯이 쫓게 될, 그런 것들 말이다.

 

문이 닫히고, 의식은 이전처럼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인식할 수 없는 단색의 공간에 온 몸을 내던진 후, 다시금 어딘가로 빨려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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