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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울15

가장 낮은 곳, 그 위에서
난, 아직은 머물러야 했다. 후에 맞이할 빛에 눈이 멀기 위해서는 당분간 이 어두운 공간에 남아야 했다. 나 자신이 슬프다는 것을 자각하면 그보다 애처로운 일은 없을 것이라 그리 다독이며 이곳에 정을 떨군다. 더 이상 내려다볼 곳이 없던가. 아니, 분명 최악은 아닐 것이라고 명확하지 못한, 흐릿한 것이 있다. 때가 되어 아래를 올려다보고 나서 저곳보다 나를 알던 순간이 없다고 그리 외면해보며 고향을 속여본다. 지나온 길이 너무도 부실했던 탓에 결국 돌아가지 못한다는 탓을 했다. 내가 자리한 곳은 언제나 낮기만 하다. 2020. 10. 26.
추위
거짓이 옅게 늘어졌다. 그림자를 속이려 하니 언젠가는 잊게 되었다. 진실이 얇게 끊어졌다. 나조차 진위를 모르니 파문이 흐름을 잃었다. 수렁의 밧줄이 내린다. 광채를 가장한 악의가 덧없이 손에 들어왔다. 2020. 10. 25.
안주
잔재만 남아 이젠 형상이 흐릿하다. 아주 가까웠던 유습한 기억일진대 추억이 되어 회상할 처지가 되었다. 혹여 다시 과거를 구성한다 하여도 내게 같은 모습으로 인식되지 않아 영원히 아름답게만 남아 빛바래질까. 애써 부정하여 밀어낼 필요가 없어 그저 흔적으로 만족하면, 그렇다면 나는 나로서 남아있기나 한 걸까. 2020. 10. 24.
여정
언제나 같은 곳에서 나는 다시 돌아오기 위한 길을 걸었다. 명확한 지표가 없는 임무, 내가 삼키지 못한 한숨이다. 시작을 선택한 적이 없기에 끝이라도 내가 정하려 했다. 만개한 하늘이 또 한 번 한 떨기 져버리고 말았을 즈음 숨결로 빚어 새긴 그림에서, 나는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아무것도 확연하게 드러나있지 않은, 허망한 희망을 좇은 그 모습을 떠올리니 손 때 묻은 첨단이 내게 달려들었다. 애처롭게도 고찰은 의미를 퇴색시키고 말았기에 나는 이곳에서 잔류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었으며 나 자신을 잊는 법을 장님처럼 헤아려가야 했다. 여전히, 내게 주어진 여정은 아직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 2020. 10. 23.
마침표를 찍었나
산기슭에서 내려온 동장군의 입김이 가시지도 않았다. 기울어진 표정이 엇갈린 창백한 색채의 건물 안에 다홍색의, 허나 칙칙해 보이기만 하는 온기가 핀다. 우리는 정말 끝이라며 새로움을 약속했나. 피어오르며 내려앉는 장소, 회잿빛 매캐한 냄새가 결국 코 끝에서 멀어져 손아귀에도 잡히지 않았다. 이제는 우리에게 무엇이 남았나. 지금까지 세워왔던 기둥은 뒤이어 들어오는 이에게 잠깐의 조력으로 남아 무언가를 완성하고 말 것인가. 나는 정말, 결국 사진 한 장으로 남게 될 흔적에서 이제 녹은 웃음으로 마침표를 찍은 것이 맞을까. 2020.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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