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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랑22

그 날에
언젠가 따오겠다는 약속이 떨어지는 날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들을 셈하기 시작했다. 달뜬 숨이 빗어 내린 풀잎의 은은한 향기 뺨을 타고 내려오는 달빛의 수줍은 표정 여전히 생생하니, 느낌에 거침이 없었다. 다만, 내가 다짐했던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외투를 걸치고, 잠옷차림으로 발을 들었다. 그 날에 결여된 것이 있어, 그곳으로 향했다. 약속이 도달하고 난 뒤, 나는 도착했다. 나와는 다르게 여전히 앳된 얼굴의 그녀가 있던 그때의 자리에 서서 고개를 서서히 내려보았다. 그 날은 그때의 날에 머무르기를 원했었고 그때는 그 날의 때에 남아있기를 꿈꿨지만 조금은 자랐어도, 여전히 나보다 작은 아가씨가 내 발을 물끄러미 바라본 채 굳어 있는 걸 보니 그 날에 다짐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2021. 3. 14.
나는 무엇을 보았나
나는 보지 못했다. 두 갈래로 나뉘어진 숫자의 길 뒤편에 홀로 웅크려 작은 숨을 내쉬던 너를 나는 아쉽게도 보지 못했었다. 너는 나를 보았다. 이것이 과연 맞는 길일지 묻는 이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걸어가는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었다. 나는 보지 못했다. 고작 한 번의 까딱임으로 볼 수 있던 눈 밑에 매달린 작은 비명과 애달픔을 너는 보았지만 나는 그토록 애원하던 스스로를 보지 못했던 상상을 했었다. 2021. 1. 21.
위하며
당신이 밟고 있는 것과 같이 당신이 내쉬는 것들과 같이 저도 당신에게 있습니다. 얇은 시집의 이야기와 같이 굵은 서적의 지식들과 같이 저도 당신에게 있습니다. 내가 부디 당신에게 있어 떠오르는 샛별처럼 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빌며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잊히고 다시 써진 역사처럼 함께 지워질 기억으로 남겠지만 잠시 당신 곁에 있는 것으로 저는 그 뿐으로 행복합니다. 2020. 12. 11.
석양
황혼의 첫 단추, 노랗게 물드는 빛을 보며 나는 다음 날의 탄생을 기대하는 이였다. 늙음 끝에 다른 생을 기약하는 자연들 당연한 듯 곱게 피어날 미래를 기다리는 그런 끝맺음이 좋아도 설명하지 못했다. 어둑해지는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렇게 홀로 훌쩍이며 뒷걸음질 치는 그들을 그렇게 그저 어딘가의 끝자락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시절은 숨을 돌리지 않아 나는 어른이 되어야 했고 한 겨울, 어둑한 모퉁이에서 차분히 만개할 그 익숙하던 빛줄기가 그토록 보고 싶어서 새벽 공기 마시며 네 웃음을 기다리는 지금이 그리 기대가 되어 두 볼에 시린 홍조가 일었다. 돌아온 계절 속, 나는 또 다시 몸을 뉘일 곳을 찾으니 이제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품을 한없이 헤매어 불안하기 짝이 없을 네 곁에 머물러 이기심을 채운다. 2020. 12. 8.
사랑에
눌러쓴 언약, 아득한 바람이 바래지는 그 언젠가를 기다리는 한 때의 마음에 따듯한 겨울, 눈꽃이 아름답게 피었던 그 계절을 녹여내었던 영원의 설렘에 새하얀 세상, 온기에 녹아내릴 숨결이 기쁨임을 상기하며 참아내었던 이전에 너에게, 염치없이 바라는 것이 있음에 나에게, 우습게도 원하는 것이 있음에 삶에게, 늦은 욕심이라는 게 생겨남에 첫눈, 함께 맞이하고픈 욕심을 품고 고마움과 감사에, 그에 힘을 얻어낸 너무나도 과분하기만 할 감정, 제 주제를 몰라 날뛰는 동경에 2020. 12. 6.
작은 손
투박하기만 한 손바닥은 네 손등을 덮어줌으로 모든 걸 다한 듯 느꼈다. 황혼이 붉게 타올라 쓰러질 때쯤 눈이 마주칠 때 웃어주는 것 마저 한 폭의 수채화와 같이 추상적인 기억으로 마음 한 켠의 추억으로만 고이 간직 되어질 휑하니 빈 옆자리가 너무도 시려울 어느 여름날 오직 나만이 회상할, 따스한 겨울날의 그 작은 손. 2020. 11. 25.

한 층 두껍게 좀 더 강하게 꼬옥 꼭 눌러 한 껏 무엇을 한 번을 위해 꼬옥 꼭 눌러 좀 더 소중한 작은 널 위해 꼬옥 꼭 눌러 꼭, 만족하길 2020. 11. 24.
관계의 늪
글은 지우면 그만이고, 말은 잊으면 그만이었나. 차분한 걸음으로, 찰나의 주저도 없이 걷겠다면서 서로 다른 모습을 그려내, 한 걸음씩 멀어지기만 한 마모된 감각으로는 본인이 만진 게 대체 무엇인지 아무리 내 감정을 부르짖어도 오지 못하는 것임을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해, 등을 맞대어 외면한다. 지금껏, 답을 알았다면 풀어내었음이 당연했다. 품어왔던 예전을 모조리 뜯어내는 일이 되려 허해 아직 발견되지 못한 난제 앞에서 만용을 부려버린 만화경을 족적 위로 세워도 헤아릴 수 없는 무엇은 아무리 내 잡념을 찢어보아도 흩지 못하는 것임을 우리는 지금도 알고 있어, 여전한 너를 바라본다. 언젠가, 내가 바라지 않아야 할 그 날이 오면 언젠가, 서로 말했던 당신을 마주하게 되면 그 때, 그제야 미련 없이 적어낼 수.. 2020. 11. 14.
기아
이토록 굶주린 가슴은 누구의 것인가. 힘껏 쥐어짠 심상은 조금의 글을 뱉어낸다. 이토록 비루한 글귀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애달프게 번진 잉크는 흘러 입술에 닿는다. 이토록 창백한 입술은 어찌 이리되었나. 달싹이는 입술이 갈라진 음성으로 화답한다. 나는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들었나. 그리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짜내본다. 2020. 11. 2.
나무
수줍게, 가지로 몸을 가렸으며 거칠게, 가지로 하늘을 찌르고 애틋이, 야윈 가지를 털었었다. 기억과 기록에 함께 지새운 이여. 낮게 이는 바람이 구슬피 울고 높게 뜬 고성이 빈 곳을 스치는 그때의 시간을 함께 보냈던 이여. 이젠 그 터전만 오롯이 한 때에 남아 발길이 끊이지 않음에 복잡한 심정을 그 날의 나와 같은 표정을 지었던 이여. 선명한 재가 풍경채의 전부가 돼버린 우리가 만든 광경에 몸서리를 쳤었지. 생에 끝을 보지 못한, 고목이 없던 이여. 2020.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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