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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색29

헤아리다
녹슨 추의 바닥에 저울을 가져다 대었다. 어느 때인가, 무죄의 무게에 고개를 숙인 저지르지 않은 잘못에 마음을 졸이던 날 그 하루의 끝이 아닌 시작을 바랐던 나를 언젠가 올 때, 엮지 못한 손가락을 세우며 새기지 않은 약속에 온 기대를 보내던 날 그 하루의 맺음이 아닌 영원을 바란 나를 옛적에 한쪽으로 기울어진 애꾸의 눈물은 낯익은 꿈결에 파묻혀 당연히 여겨질 테니 그 착각의 깨우침이 아닌 우매함을 바라며 헤아림을 포기할 수 있는 법을 헤매이며 바닥에 닿은 수많은 추를 받치는 날들을 그렇게 생의 영원이 아닌 맺음을 바란 나를 저울판의 바닥에 내 살갗을 가져다 뉘이며 없을 날 중, 바람이 멎을 시기를 헤아린다. 2020. 11. 19.
시간
한껏 녹은 초침이 방울져 떨어지니 언젠가 내 등불이었던 불씨를 모아 있는 한 살며시, 아련히 끌어안았다. 그런 바람이 뒤돌아서고, 끝내 불어와 한 여름밤, 불청객의 한기가 감도는 날 마음마저 온기를 잃어 끝내 얼어붙으니 내게 일 초란 더는 소중히 여기지 않고 또다시, 분침이 녹아 흘러내리고 만다. 언제나 무심코 걸었듯, 내 시간의 한 켠 어느 깊은 곳에서 조용히도 흘러내린다. 희끗해진 시야만큼, 더는 타오를 것 없는 삶 시계 위에 우두커니 서 바닥을 바라보니 마침, 허망히도 시침이 떨어지는 참이다. 익숙한 숫자들과 더는 돌아올 수 없는 그리움 지나간 그때, 그 날의 순간들이 어디에 있을지 평범한 나는 단지, 늘 다급해 중요함은 뒷전이었기에 녹아내린 시간을 하릴없이 기억으로 음미할 뿐이었다. 2020. 11. 15.
쓰다
느린 정취, 순흑의 강에 띄운 의념이여. 반전된 표면에 남아있을 허한 들판과 씨앗으로써 늙음을 나타낸 내 벗이여. 부디, 이질감이 이 평온함에 희석되어 삽시의 형태가 의연한 흔적을 남기기를 불어와, 형상을 잊은 바람에게 말하라. 이 손가락 끝에 애처로이 매달려있는 검붉은 나의 산행이 흐릿히 퍼지기를 피륙으로 일구어낸 일부의 전부를, 마침내 당신을 그리며 마련해둔 보잘것없는 공간에 사선의 토악질을 해내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잉크가 마르지 않는 이 낮은 활기가, 돌아오는 길로 우울의 실타래가 만개할 수 있는 이 평야에 오기를. 없는 기약을 마치며, 언제라도. 2020. 11. 10.
나는 나를 찾는다
일그러진 심중의 귀퉁이를 더듬었다. 바라 왔기에, 포기해야 했었던 일 여러 장면을 조잡하게 이어 붙인 필름은 온전한 이야기가 아니다. 잊고 싶었기에, 정말 잊었었나. 잔재가 세운 나를 잊어버렸나. 혐오감의 거체가 비튼 형상에 나는 자신을 외면하려 했었다. 나는, 나를, 나의 것을 찾아간다. 밑창의 무늬가 새겨진 목련의 때를 인위와 작위로서 피어난 아지랑이를 효용의 틀에서 밀려난 붉은 정취를 깊은 상흔을 남긴 순수한 무정들을 옛날을, 한 때를, 순간을 되짚는다. 내가 남겨두어 떠났었던 나를 위해서. 2020. 11. 7.
잔 속
친우의 목울대가 온몸을 비튼다. 잿빛이 선명한 하늘, 흐릿한 조명 각자의 숨통에 술잔이 기울어진다. 불타는 얼음으로, 막힌 가슴을 뚫어 적어도 그 흉터가 아물기 전까지는 이 갈증에 허덕이지 않기 위해서 묵묵히 그의 잔을 채우기만 한다. 나의 말로는 그를 채울 수가 없고 쏟아지는 한숨은 진심보다 크기에 그저, 나는 이 불편한 침묵의 안에 둘이되 홀로 남아 하릴없이, 텅 빈 술잔을 기울여 한 때를 음미할 뿐 기억의 모습을 잊어가는 약속임을 또 한 번 그의 잔을 채우며 비운다. 2020. 10. 29.
투박함
선망과 동경이 얽힌 정원, 손길이 끊겼다. 고뇌의 끝자락이 가르쳐야 할 방향이 없어 단지 무성하게, 실없는 이상이 되어간다. 이곳을 감싸던 물줄기 조차 색을 잃었다. 투명하게, 언젠가 투영의 지지대가 되던 그 길 또한 무성함에 숨이 틀어 막혔다. 이 덩어리는 왜 이리도 생기가 넘칠까. 무능한 의욕은 이리도 답이 없던 걸까. 대답은 언제나 마지막 숨결으로 왔다. 기억을 찾아온 이도 결국 그 날을 잊는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그 계절을 버렸었다. 그냥, 그랬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2020. 10. 28.
어느 날, 그다음을
계절이 허구로 돌아간 세상, 풍경은 변하지 않고 이상은 망상 중 하나가 되어 주검조차 흩어낸다. 이보다 최악인 것은 없었으니 내일은 다를 거라 믿어보며 저 먼발치에 시선을 밀었다. 여전히 추운 낮에 태양마저 죽었다. 검붉은 노을이 조각나는 때, 촛불로 길을 밝혔다. 창공조차 가린 막막함이 기어코 코 앞에 굴러왔다. 잠시 망설이다 녹아든 신발 한 짝을 멀리 던졌다. 몇 차례 굴러갔을까, 신을 수 없을 만큼 더러워졌다. 우두커니 선 채, 나는 나의 맨발을 바라보았다. 붉은 기포가 들끓어 피부로 스며들고 내가 밀어낸 이가 누운 곳의 옆에서 긴 여정을 끝마쳤으나, 성과가 없던 그런 길에서 메마른 끝을 기다렸다. 고작, 이렇게 매듭짓기 위해 살아왔던가. 달조차 뜨지 않은 한스러운 대지였지만 내가 기댄 곳은 유난히.. 2020. 10. 26.
그리웠다
여명과 황혼의 입맞춤이 사그라드는 눈꺼풀 위로 떠오르는 아득한 풍경에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밝음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하늘을 보고 검은 호수 안에 일렁이는 것을 떠올리며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흔들었다. 단지, 그리웠던 것일지도 몰랐다. 어릴 적의 이유 없는 울음소리에 밀려난 소싯적의 외침 없는 절규 속에 피어났던 시들어버린 나의 꿈을 그린 걸지도 라며 그리 나는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었다. 단지, 나는 이런 글이 그리웠던 건지도 몰랐다. 꺼질듯 일렁이는 불꽃을 빈틈없이 감싸 쥐며 홀로 일렁이는 불씨가 내 품 안에서 싹을 틔우길 단지, 나는 그때의 내가 그리웠던 것이었다. 2020. 10. 24.
홀로
짧았다고 느낀 잠에서 깨어나 옆으로 손을 내밀어 볼 때면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홀로 아미를 찡그려 웃는다. 빛을 가린 커튼을 옆으로 밀어 보아도 눈앞에 보이는 건 빛이 아닌 열기 뿐 의미를 퇴색시키는 그릇된 열정과 자아를 잊어버리고만 비뚤어진 삶이 슬며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문득, 닮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울고 싶어도 웃으라고 웃고 싶으면 더 크게 분명 그리 살아가라 했다. 허나, 그뿐이었다. 빛이 스며드는 창가에 걸터앉아 나의 땀으로 푹 절여진 잠자리를 보며 버릇이 돼버린 웃음을 짓는다. 꿈은 얼마나 행복하냐는 물음을 담아. 2020.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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