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색29

곧, 있을
닳아 유순해진 열의를 저만치 밀어둔 채, 잠시 침잠하기를 원했다. 언제쯤 해묵은 기대가 지칠지, 날을 헤아리기를 멀리하고 의식을 흐리며 어딘가에 맡겨둔 꿈결을 애타게 기다린다. 미약한 광휘가 아름답다며, 곧 저물 해를 떠올리니 호선 위가 익숙하여 잊힌, 방울져 떨어진 그 옛을 번진 풍경채를 한없이 헤매여 다시 찾을 게 선했다. 차올라, 종래에는 가라앉을 한 때의 탄식이 아직 들릴까. 달뜬 숨소리는 희열을 빙자해, 또다시 묵빛으로 채색될까. 그리하여, 나는 짧은 안식으로 하여금 회상한 길을 닦아놓겠다. 그 작은 편린에 남을, 일그러진 기억이 변질되지 않도록. 2021. 5. 11.
달래다
울음이 소리를 잃은 새벽, 한 길 앞의 심정처럼 안개가 자욱하다. 낮게 우는 풍랑과 기척 없이 날 두드리는 미약한 빗줄기에 잠겨 쉼을 권유하는 한적한 풍경에서 그저 무겁고 탁한 숨을 내쉰다. 번져가길 반복해 이내 흘러내리는 세상이 발치에 고여만 간다. 탁한 녹청빛, 앞으로 헤질 날만 남은 색채가 사위에 만연하다. 이질감은 판단을 헤집었고, 익숙함은 이질감을 해소해냈다. 날개를 잃은 구름이 비탈을 굴러도 여전히 연기가 가득하다. 많은 이들이 독 품은 반딧불이를 쥔 채로 한판을 내뱉는다. 결국 다 타들어 온기를 잃으면 표정은 다시 검게 먹먹해진다. 그래, 우리 모두는 짧은 생은 기억하지 못하는 약속을 전해 들었다. 가장 찬란해 어쩌면 품위 없을지도 모르는 한 시절을 바치리라고. 좀 더 빛이 보였으면 해, 다.. 2021. 5. 10.
조각 뒷짐
음영을 이룬 점을 지워 곧은 선을 세우며. 청빛으로 그려낸 묵이 쏟아지는 화폭 안 투박한 선 사이를 누비는 사구의 바다여. 다른 한 켠을 부수어 벼랑을 담금질했던 쓰이지 않는 검으로 망설임을 깎은 이여. 무엇도 흩어내지 못한 폭풍의 눈을 찌르는 감각이 지나는 길을 도려내는 행동을 함에 시간이 잊은 발자취를 구태여 꺼내들었지. 곧은 선을 지워 다시 하나의 점을 찍으며. 뒷짐으로 악수를 하자던, 조각난 맹세의 주검을 불씨에 실어 보내는 일련이었다. 2021. 3. 25.
불청객
없는 것들로 가득찬 공간에 불청객이 들어왔다. 밀폐된 방안에 갇힌 바람 한 줄기처럼 본인도 이곳에 있는 연유를 모르는 듯한 초대받지 못한 이는 그런 부류의 것이었다. 불청객은 이곳저곳을 오가나, 자리잡지 못한다. 군중 속에 묻히며 잊어버린 개인의 사념처럼 본래의 목적조차 손에서 놓쳐버린 듯한 놀이동산에 홀로 있는 아이와 같은 것이었다. 여전히 적막한 공간에 다른 불청객이 들어왔다. 사연 안에 들여놓지 못하는 기이한 친우처럼 상식이라는 단어로 근본을 외면한 듯한 꿈을 직업의 하나로써 단정해버린것이었다. 나의 공간에는 많은 것이 있으나, 이처럼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2021. 1. 21.
대답
시간의 초침 위에 앉아있는 삶의 무게에게 올해가 되어 유난히 살이 찌지 않았냐고 떨리는 손끝처럼 흔들리는 말이 닿았다. 한없이 투명한 꽃잎이 펄럭이며 내게 오니 한기가 스미는 팔을 쓰다듬어 떨고 있었다. 밤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지만 다른 연유가 있는 것이냐고 질문하나 삶에게 대답이 없었듯, 꿈에게도 입이 없었다. 우리는 대체, 누구에게 물어봐야 했을까. 2021. 1. 21.
손톱으로 찍어낸 것
높다란 절벽 오래도록 긁어내 우리가 설 대지를 만든 파도가 내게는 그리도 외로워 보였다. 비산하는 물방울과 진흙 사이의 비좁은 공간 끝에 위태로이 앉아 낮밤이 교차하는 때를 하염없이 기다려 우두커니, 낡게도 지키니 어느 날의 흔적과 같이 우리는 결국 나와 너로 도형으로, 선으로, 점으로 되짚어 돌아가기를 끝내 한 해의 마지막 입김을 지워가듯 손톱 밑의 때로 빚어낸 내 의미와 함께 언젠가는 쓸려내려 갈, 우리의 평안 근심 없이 편히 몸을 뉘어둘 고향으로 어쩌면, 지난 날이 한스럽게도 지쳐있었던 것은 유난히도 애달팠던 내 청춘에 흉이 져버린 것은 지금의 내 심중이 그처럼 살아가라 했던 탓일까. 2020. 12. 11.
구석
녹아내린 발로 서늘한 바닥을 딛고 한 걸음마다 한숨을 자욱이 쉬며 어느새 어둑하게 그늘진 구석으로 메어오는 목의 끝자락 비명처럼 신뢰성을 잃은 옛이야기처럼 모순된 성정 같이 무엇도 볼 수 없는 그곳이 그리도 따뜻하게 느껴졌었다. 웅크려 앉아 앞을 보면 먼지 사이를 차분히 채워 들어오는 빛이 보이나 가벼운 화상 입을 것을 염려하여 두 무릎을 모아 안아버렸다. 2020. 11. 28.

세월을 쓸어와 발 아래에 두고 이미 옛적에 죽은 불빛을 켜니 잿더미의 한 켠에 내가 보였다. 아주 조금 젊은, 고작 며칠 전. 앞을 시리도록 비추는 광명 속 지나가버린 후회를 추모하고 가라앉은 위안 안에 운명했다. 이토록 위약을 더욱 드높게 세워내어 살가죽 안에 새겨진 의미를 들춰내니 이는 곧 황혼이 된 지금을 풀이하겠지. 그러니, 우리는 이를 다시 고이 모아서 쌓여갈 뿐인 한탄을 명명하길 반복하여 아득하니 아주 오래도록 죽어갈 뿐이니 이는 결국, 내 삶의 단 한 줄기 빛이니리. 2020. 11. 24.
편지
낡음에 뭉개진 글자가 즐비했으나 나는 좀처럼 읽어낼 수가 없었다. 여림이 자라나, 그 명랑한 이상을 그저 서서히 키워나갈 때였을까. 거친 손길이 이 날을 해칠까 두려워 무심코 눈물을 짜내어 적셔내었다. 축축이 젖은 글이 번져 지워졌을까. 나는 또 한 번의 편지를 적어내었다. 어느 미래에, 읽을 수 없는 나에게. 2020. 11. 21.
이유
날마다 몸을 일으켜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푸른 여명 아래, 꺾인 발자국이 즐비한 거리 위 녹아내린 밑창에 멈춰 선 우리들을 목격했었다. 어쩌면, 자욱한 꿈결 안에서 눈을 잃지 않았던가. 그리 허망함을 표하여 펜을 잡을 핑계를 대었다. 곧게 편 허리에 제멋대로 휜 손가락이 겹치고 색 바랜 시간을 역하게 느껴, 잉크를 뿌려냈다. 이 활자들은 무엇을 동경하여 이다지도 욕됄까. 어느 날, 여전히 후일이 오기를 바라마지 않을 끝 앞에서 심연을 마주하여도 알지 못할 터였다. 별 이유 없을 황혼을 지새워 그리며, 오늘을 세고 탓함은 언제나 친숙한 것에 있음을 앎에 흐느낀다. 그렇게, 내게는 별 볼 일 없을 하루가 또 다가온다. 2020. 11. 21.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