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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희망23

여명 직후의 황혼
백색 음영이 땅거미를 삼킨다. 생명이 없는 터전에 색조를 풀어 투명했던 공허의 틈을 메운 후는 나에게서 비롯한 것이 아닐 터다. 그리, 발을 굴러 울림을 덮어본다. 굽은 녹, 이 날붙이를 전부로 삼았었다. 붉은 실선의 양 시발을 잘라내어 첨단을 망설임과 함께 두었었고 나는 나를 위한 짐에 파묻히기를 이리, 고개를 저어가며 반복한다. 어둑한 그늘의 가루를 손에 쥐어 이 늘그막이 다시금 내려오기를 달이 뜨지 않은 밤을, 한사코. 난, 여전히 저항을 반복하는 등불 앞에서 명멸의 끄트머리가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또, 여명 직후의 황혼에서 고개를 파묻는 어제다. 2020. 12. 21.
소리
가늘게 떨리는 소리는 언제나 귓가를 맴돌고 무겁게 누르는 소리는 언제나 발을 붙여냈다. 젖은 머리를 스치는 바람은 대기를 현 삼아 나를 울려 스스로 박자를 맞추게 하고 습한 공기가 밀려오는 계절은 물이 천천히 떨어지는 동공과 땀에 눅눅히 젖어오는 옷깃을 좀 더 투명하게 비춰 내었으니 그 옛에 물길이 바람에 열리듯 바랜 이야기는 잉크로 적시고 수줍게 전한 말을 말없이 안아 찡그림이 없이, 그저 눈꼬리 들어 웃었다. 2020. 12. 8.
사명
싸늘히 식은 손등 위로 낯익은 고동이 내려앉았다. 격렬한 몸부림이 주마등의 표면을 훑어내고 죽은 피를 들이켜는 심장을 거세게 쥐어내니 손아귀에서 짓쳐 오르던 환희가 터져나간다. 그저 안으로 들어가던 단말마가 지겨웠을지 그리도 두려워하던 내 영혼은 숨을 삼켰다. 무딘 감각이 차츰 돌아오며, 나는 눈을 감았고 피륙은 제 의지를 펼쳐내려 몸을 뒤틀어대었다. 육신을 구성하던 것들이 과분한 삶을 찾아 헤매니 어느 공포가 또 다가올지, 경험은 고개를 숙였으나 아직 남은 흥분이 제 멋대로 눈꺼풀을 들춰내었다. 빛이 틈새를 열고 스며드니 혈액이 달궈진다. 열기를 품고, 방금 폐쇄한 길을 뚫으니 동공이 초점을 품고 이리저리 흔들린다. 끝내 나는 보았다. 나를 찾아왔을 때처럼 천천히 피어오르는 생을. 2020. 12. 7.
새벽녘
누구나 한 때의 불로 태어났으니, 언제고 다시 피워낼 수 있으리. 이미 잿더미로 뒤덮인 대지 위에서 세상을 처음 만났더라도 내 몸 하나 불사를 것이 남았다면야, 포기할 이유는 없으니 밤을 몰아내는 횃불을 자처해 일렁이는 꽃잎으로 스러져라. 혹시라도, 꿈이 너무 드높아 네가 이미 한 떨기 떨어졌다면 그 다음에는 내가 네 잔재를 긁어모아 또 한 번 피워주겠다. 한사코 삶이 친절하지 못할지라도 결국 아침은 돌아올 테니 그 하루를 되감아 풀어내기를 항상 앎에, 두려워하지 말거라. 2020. 12. 1.
벗꽃
풍파에 비해 한 없이 작았던 내 벗이여. 정처를 잃은 듯, 결심의 어귀에서 서성인 혹여나 재차 회귀하는 궤도 위를 걸었던 멎은 풍경에서 과연 무엇을 투영했었나. 선명한 투명함에 젖어 굴절된 벗이여. 향을 피워 나를 불러내었던 초로의 너를 표피 아래에 묻어둔 채, 맡으며 보고 있어 이미 시들고만 꽃을 내 손등 위에 올리네. 혹시 이 작은 태동이 느껴지는가, 벗이여. 추억으로서 만족하며 지금에 남은 이여. 자네를 떠민 풍도를 타고 다시 왔다네. 그 때에 남겨두었던 한 떨기 내 벗이여. 2020. 11. 18.
없을 것들
힘이 들어 그랬을까, 분에 겨워 그랬을까. 나중으로 밀어둔 눈물이 결국 넘쳐흐른다. 어쩌면 편했을까, 어쩌면 좀 더 나았을까. 무심함으로 이미 유심을 표한 지나옴이다. 그렇다. 나는 그 무엇도 모르는 멍청이다. 발견이라고, 발명이라고, 깨달음이라고 이미 가능했던 일이 새롭게만 느껴지던 여전히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 뿐 앞으로, 계속 모든 걸 헤아려 가야함을 나는 더 이상 무지에 주저함이 없으리. 2020. 11. 17.
한 번
단 한 번 휘둘러, 너의 그림을 그려라. 바래질 때가 두려워 손을 들지 못할까. 단 한 번 소리쳐, 너의 생각을 말해라. 한낱 호통이 두려워 입을 열지 못할까. 단 한 번 일어서, 너의 항로를 보아라. 거센 풍랑이 두려워 출항하지 못할까. 단 한 번 뻗어서, 너의 사람을 안아라. 떠나갈 날이 두려워 만나지를 못할까. 단 한 번 돌아서, 너의 기억을 걸어라. 지나온 길이 두려워 돌아가지 못할까. 2020. 11. 11.
한 줄
낙서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 정도 그리겠다며 짧은 선 하나를 천천히 그었다. 내일 서 있는 장소, 그 높이에선 끝자락조차 종결되는 모습일지 평탄하여 여유를 부리게 될지는 알지 못하나 일단 연필을 들었다. 아쉽게도 지울만한 수단이 없었다. 잘못 새겼다며 손으로 성의를 다해 열심히 비벼보지만, 묻어날 뿐이다. 선의 끝이 맞물리고, 서로 스치며 함께하지 못한 장면이 들이친다. 선명하나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그런 윤곽이 눈꼬리를 타고, 울컥 격하게 솟아올라 그었던 선 위로 뚝하고 떨어져 희망을 전해왔다. 2020. 11. 10.
이슬비
모질지 않은 비가 내렸다. 세차게 우산을 두드리던 아이가 며칠 밤 사이에 배려를 배웠다. 높은 곳에 매달린 가로등 불이 깊은 물 속 정경처럼 흐릿하다. 이빨 빠진 아귀가 있었다. 숨이 꺼지지 않을 정도로만 물줄기가 그의 입을 덮는다. 내가 있는 자리를 비추는 길 무심한, 그 위로를 걷는다. 이 심중을 닮아가고 있다면 우울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라 그저, 일상의 한 귀퉁이로 남아서 비가 다시 내리는 이 모습처럼 본인에게로 먼 길을 돌아오겠지. 다만, 익숙해져 기다림이 될 때 나는 이 정처없이 내리는 비에 흠뻑, 내 살갖을 모두 적시리라고. 유심한, 그런 기대를 걷겠다. 내가 이슬이 되어 내리기를 바라도록. 2020. 11. 4.
언제나와 같은
태양이 칭얼이는 이른 새벽이 왔다. 작은 컵을 끌어안고 보낸 오늘의 첫 밤은 피곤하더라도, 지새울 이유는 충분했다. 지평선을 넘은 여명, 한 실타래가 풀리고 창을 넘어서 이 텅 빈 방을 채워나간다. 달과 별이 기색도 없이 떠나가고 젖병이 떨어진 세상은 그 서슬에 화들짝, 놀라며 아침을 맞아간다. 오늘의 낮이 그 온기를 잃어갈 때는 내일의 첫 밤이자 오늘의 셋째 아이, 둘째 밤이 잉태될 무렵이었다. 자연이 든 저울에는 어떤 것이 올라가 있을까. 낮과 밤, 행복과 불행 그 사이의 모든 것을 나는 나를 추로 여겨 이곳에 남을 수 있을까. 반나절을 기다리지 못하는, 이 새로움에 나는 녹슬어 이 자리를 지킬 수나 있을까. 변화가 구슬퍼 나는 매일 세 걸음을 걷는다. 조금이나마 이 때를 더 회상할 수 있도록 또다시.. 2020.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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