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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
거짓이 옅게 늘어졌다. 그림자를 속이려 하니 언젠가는 잊게 되었다. 진실이 얇게 끊어졌다. 나조차 진위를 모르니 파문이 흐름을 잃었다. 수렁의 밧줄이 내린다. 광채를 가장한 악의가 덧없이 손에 들어왔다. 2020. 10. 25.
알 수 없었다
분명히 잠에서 깨어난 적이 없다. 얼음이 녹아들어 웅덩이가 고였고 야윈 가지로 마음을 애태운 수목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볼 때가 왔다. 우리는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었다. 좀 더 가벼워진 몸이나, 어느 한 곳 집어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유난히 무겁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초록이 만연하게 피어나기 전에 추위를 상자에 넣어 후로 보낸다. 정말 여기있는 내가,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사연에 영향을 받았다면 고민할 사유가 있어야 했었을까. 2020. 10. 25.
안주
잔재만 남아 이젠 형상이 흐릿하다. 아주 가까웠던 유습한 기억일진대 추억이 되어 회상할 처지가 되었다. 혹여 다시 과거를 구성한다 하여도 내게 같은 모습으로 인식되지 않아 영원히 아름답게만 남아 빛바래질까. 애써 부정하여 밀어낼 필요가 없어 그저 흔적으로 만족하면, 그렇다면 나는 나로서 남아있기나 한 걸까. 2020. 10. 24.
그리웠다
여명과 황혼의 입맞춤이 사그라드는 눈꺼풀 위로 떠오르는 아득한 풍경에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밝음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하늘을 보고 검은 호수 안에 일렁이는 것을 떠올리며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흔들었다. 단지, 그리웠던 것일지도 몰랐다. 어릴 적의 이유 없는 울음소리에 밀려난 소싯적의 외침 없는 절규 속에 피어났던 시들어버린 나의 꿈을 그린 걸지도 라며 그리 나는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었다. 단지, 나는 이런 글이 그리웠던 건지도 몰랐다. 꺼질듯 일렁이는 불꽃을 빈틈없이 감싸 쥐며 홀로 일렁이는 불씨가 내 품 안에서 싹을 틔우길 단지, 나는 그때의 내가 그리웠던 것이었다. 2020. 10. 24.
여정
언제나 같은 곳에서 나는 다시 돌아오기 위한 길을 걸었다. 명확한 지표가 없는 임무, 내가 삼키지 못한 한숨이다. 시작을 선택한 적이 없기에 끝이라도 내가 정하려 했다. 만개한 하늘이 또 한 번 한 떨기 져버리고 말았을 즈음 숨결로 빚어 새긴 그림에서, 나는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아무것도 확연하게 드러나있지 않은, 허망한 희망을 좇은 그 모습을 떠올리니 손 때 묻은 첨단이 내게 달려들었다. 애처롭게도 고찰은 의미를 퇴색시키고 말았기에 나는 이곳에서 잔류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었으며 나 자신을 잊는 법을 장님처럼 헤아려가야 했다. 여전히, 내게 주어진 여정은 아직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 2020. 10. 23.
홀로
짧았다고 느낀 잠에서 깨어나 옆으로 손을 내밀어 볼 때면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홀로 아미를 찡그려 웃는다. 빛을 가린 커튼을 옆으로 밀어 보아도 눈앞에 보이는 건 빛이 아닌 열기 뿐 의미를 퇴색시키는 그릇된 열정과 자아를 잊어버리고만 비뚤어진 삶이 슬며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문득, 닮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울고 싶어도 웃으라고 웃고 싶으면 더 크게 분명 그리 살아가라 했다. 허나, 그뿐이었다. 빛이 스며드는 창가에 걸터앉아 나의 땀으로 푹 절여진 잠자리를 보며 버릇이 돼버린 웃음을 짓는다. 꿈은 얼마나 행복하냐는 물음을 담아. 2020. 10. 23.
첫걸음
미처 굳지 못한 점토로 발자국을 찍어냈었고 녹슨 행로가 야위어가지 않도록 비벼댔으며 우윳빛 호수 안에 잠든 작은 하늘을 보았다. 분명 홀로 고개를 떨구며 자리를 잡았지만 풍랑은 곁으로 와 피륙을 넘은 반려가 되어 연어는 발치에 기대어 생명을 뱉어냈었다. 눈가의 호선을 따라 그려진 물길을 타고 의미를 넘어선 연유를 찾아 손을 담갔다. 북쪽, 눈꽃을 가루 내어 만든 백색 사막에 정처 없던 발길을 멈추고 여린 발바닥을 처음답도록 한 번, 조심스레 찍어냈었다. 2020. 10. 23.
마침표를 찍었나
산기슭에서 내려온 동장군의 입김이 가시지도 않았다. 기울어진 표정이 엇갈린 창백한 색채의 건물 안에 다홍색의, 허나 칙칙해 보이기만 하는 온기가 핀다. 우리는 정말 끝이라며 새로움을 약속했나. 피어오르며 내려앉는 장소, 회잿빛 매캐한 냄새가 결국 코 끝에서 멀어져 손아귀에도 잡히지 않았다. 이제는 우리에게 무엇이 남았나. 지금까지 세워왔던 기둥은 뒤이어 들어오는 이에게 잠깐의 조력으로 남아 무언가를 완성하고 말 것인가. 나는 정말, 결국 사진 한 장으로 남게 될 흔적에서 이제 녹은 웃음으로 마침표를 찍은 것이 맞을까. 2020. 10. 23.
울었다
비스듬하게 눌러쓴 희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하염없이 휘적이며 지문을 지긋이 새겼다. 바람이 잔재로 돌아가며 흩어버린 이야기가 귓가에 홀연히 스며 들어가 고개를 짓눌렀다. 혹시나, 기대하며 홍조를 볼에서 떼어 포장하나 골판지의 초췌한 향내에 다시금 울고 말았다. 2020.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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