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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여명
두꺼운 솜으로 몸을 감싸고 입술 사이로 스미는 울음을 억누르기 위해 더 밀착하여 차게 밀려오는 밤바람으로 눈주름에 고여있는 잿물을 얼려 떨어뜨리기 위하기를 나는 눈가를 촉촉이 물들여 자라나 몇 안 되는 별빛을 곱게 뭉개어 밝게 비추니 엉킨 실타래로 차오를 뿐인 뇌리를 먹먹하게 눌러 달라 때 묻은 두 손 모아 빌었다. 쓰디 쓴 염원임을 앎에도 옛적의 희망인 걸 앎에도 그저 너무 짓눌린 삶이기에 홀로, 내 낮은 바람을 불러오고는 말을 삼켜대는 어리숙한 밤이여. 2020. 11. 2.
기아
이토록 굶주린 가슴은 누구의 것인가. 힘껏 쥐어짠 심상은 조금의 글을 뱉어낸다. 이토록 비루한 글귀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애달프게 번진 잉크는 흘러 입술에 닿는다. 이토록 창백한 입술은 어찌 이리되었나. 달싹이는 입술이 갈라진 음성으로 화답한다. 나는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들었나. 그리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짜내본다. 2020. 11. 2.
잔 속
친우의 목울대가 온몸을 비튼다. 잿빛이 선명한 하늘, 흐릿한 조명 각자의 숨통에 술잔이 기울어진다. 불타는 얼음으로, 막힌 가슴을 뚫어 적어도 그 흉터가 아물기 전까지는 이 갈증에 허덕이지 않기 위해서 묵묵히 그의 잔을 채우기만 한다. 나의 말로는 그를 채울 수가 없고 쏟아지는 한숨은 진심보다 크기에 그저, 나는 이 불편한 침묵의 안에 둘이되 홀로 남아 하릴없이, 텅 빈 술잔을 기울여 한 때를 음미할 뿐 기억의 모습을 잊어가는 약속임을 또 한 번 그의 잔을 채우며 비운다. 2020. 10. 29.
언제나와 같은
태양이 칭얼이는 이른 새벽이 왔다. 작은 컵을 끌어안고 보낸 오늘의 첫 밤은 피곤하더라도, 지새울 이유는 충분했다. 지평선을 넘은 여명, 한 실타래가 풀리고 창을 넘어서 이 텅 빈 방을 채워나간다. 달과 별이 기색도 없이 떠나가고 젖병이 떨어진 세상은 그 서슬에 화들짝, 놀라며 아침을 맞아간다. 오늘의 낮이 그 온기를 잃어갈 때는 내일의 첫 밤이자 오늘의 셋째 아이, 둘째 밤이 잉태될 무렵이었다. 자연이 든 저울에는 어떤 것이 올라가 있을까. 낮과 밤, 행복과 불행 그 사이의 모든 것을 나는 나를 추로 여겨 이곳에 남을 수 있을까. 반나절을 기다리지 못하는, 이 새로움에 나는 녹슬어 이 자리를 지킬 수나 있을까. 변화가 구슬퍼 나는 매일 세 걸음을 걷는다. 조금이나마 이 때를 더 회상할 수 있도록 또다시.. 2020. 10. 29.
청빛 홍조
막 피어난 불을 짓눌렀다. 녹아내리는 살갖, 숨이 삼키는 열기가 차고 무의식이 새긴 방향으로 몸을 휘청인다. 많은 말을 했다. 힘없이 뱉은 심장의 고동이 들리지 않는다. 뜻을 탐한 단어에 나의 그릇된 욕망 또한 청색 불 위에 지펴 차가운 열의를 만든다. 설렘이 느껴졌다. 이성의 품 안에 잠들었던 홍조가 어렸다. 나의 감정이여, 나의 기억이여. 내가 잊은 나를 찾을 때까지는 이 혐오감이 내게서 떠나지 말기를 내가 나를 잊을 수 있을 때까지는 이 대지 위의 거름이 되지 않기를 나의 상흔이여, 나의 죄악이여. 나의 이 추악함을 깊이 박아넣어 언제나 동경할 수 있게만 해다오. 나의 악의가 영원히 머무르도록... 2020. 10. 28.

알고 있음에도, 택하지 못할 똬리를 튼 이의 머리를 내어 이 망설임을 여실히 닦아내어 울컥이며, 흘러나온 핏물으로 선을 기이한 급류로 밀어내길 모른다고 움에도, 결국은 택할 도로의 중앙에 선 기틀을 내어 이 가려움을 기어코 참아내어 터져나온, 갈아내는 토악질로 당신의 후회를 필히 닦아내길 2020. 10. 28.
투박함
선망과 동경이 얽힌 정원, 손길이 끊겼다. 고뇌의 끝자락이 가르쳐야 할 방향이 없어 단지 무성하게, 실없는 이상이 되어간다. 이곳을 감싸던 물줄기 조차 색을 잃었다. 투명하게, 언젠가 투영의 지지대가 되던 그 길 또한 무성함에 숨이 틀어 막혔다. 이 덩어리는 왜 이리도 생기가 넘칠까. 무능한 의욕은 이리도 답이 없던 걸까. 대답은 언제나 마지막 숨결으로 왔다. 기억을 찾아온 이도 결국 그 날을 잊는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그 계절을 버렸었다. 그냥, 그랬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2020. 10. 28.
나무
수줍게, 가지로 몸을 가렸으며 거칠게, 가지로 하늘을 찌르고 애틋이, 야윈 가지를 털었었다. 기억과 기록에 함께 지새운 이여. 낮게 이는 바람이 구슬피 울고 높게 뜬 고성이 빈 곳을 스치는 그때의 시간을 함께 보냈던 이여. 이젠 그 터전만 오롯이 한 때에 남아 발길이 끊이지 않음에 복잡한 심정을 그 날의 나와 같은 표정을 지었던 이여. 선명한 재가 풍경채의 전부가 돼버린 우리가 만든 광경에 몸서리를 쳤었지. 생에 끝을 보지 못한, 고목이 없던 이여. 2020. 10. 27.
다할 때까지는
돌아가야 했었고, 다시금 출발했었던 길로 그저 하염없이 걷다 보니 또 돌아와 버렸다. 발자국을 깊이 새겨, 그 시절을 잊지 않도록 아득히도 떠올렸던 터라 작더라도 무거웠다. 그을음이 미처 닿지 못한 곳으로, 천천히 토해냈던 검붉은 불이 사그라든 장소에서 이번의 첫 호흡을 내쉬기만을 바라 왔었고 적어도, 이 무릎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는 다시 돌아와 시작하길 두려워하지 않아야 그래야만 내가 살아왔음을 잊지 않을 테다. 스스로의 길을 택하여, 한 줌의 혐오도 없길 이 세상이 끝나는 가파른 절벽을 마주하여도 그 아래로 육신을 던지는 걸 주저하지 않기를 단지, 곁에 누군가 있다면 질문할 터였다. 이 결말이 당신을 구슬프게 하지는 않느냐고. 2020. 10. 27.
가장 낮은 곳, 그 위에서
난, 아직은 머물러야 했다. 후에 맞이할 빛에 눈이 멀기 위해서는 당분간 이 어두운 공간에 남아야 했다. 나 자신이 슬프다는 것을 자각하면 그보다 애처로운 일은 없을 것이라 그리 다독이며 이곳에 정을 떨군다. 더 이상 내려다볼 곳이 없던가. 아니, 분명 최악은 아닐 것이라고 명확하지 못한, 흐릿한 것이 있다. 때가 되어 아래를 올려다보고 나서 저곳보다 나를 알던 순간이 없다고 그리 외면해보며 고향을 속여본다. 지나온 길이 너무도 부실했던 탓에 결국 돌아가지 못한다는 탓을 했다. 내가 자리한 곳은 언제나 낮기만 하다. 2020.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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