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듯한
상상하고 있을까, 피로에 젖어든 모습을 괜히 또, 안타까운 듯한 마음이 있다. 되새기고 있을까, 남기고 간 이야기들을 스치는, 애처로운 듯한 마음이 있다. 청명한 새벽을 폐부 가득히 채워 넣으면 무심코 당신이 곁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더 울적해져버린 듯한, 그런 마음이 있다. 잘하고 있는 걸까, 낡은 향이 배인 곳에서 금세 또, 기대고 싶은 듯한 마음이 든다. 잘되고 있는 걸까, 나아진다는 느낌이 없어 그리, 널 보고 싶은 마음이 밀려오는 듯했다. 계절이 교차하는 시절의 하루, 그 하나의 복판. 황혼이 몸을 뉘인 초록의 끝에서 숨을 내쉬면 수없이 고대하는 날이 조금은 다가올까 싶어 그리움이 되려 커진 듯한, 그런 마음이 든다. 굳어짐과 대비되어 요동치는 듯한, 혼란함과 엇갈려 가라앉은 듯한 굽은 등을 남.. 2021. 5. 10.
비행
언젠가부터 하늘을 우러렀다. 걸음이 느리게 느껴져 그랬다. 당신이 멀어보인 탓도 있었다. 나는 가끔씩 먼 하늘을 보았다. 모든 곳이 비슷한 거리 같았다. 당신이 멀어보인 탓을 해봤다. 오늘은 이미 저문 하늘을 봤다. 땅과 하늘이 전부 같은 색이다. 그래도 당신은 늘 멀 뿐이었다. 그래서 날고 싶었다. 당신이 멀어보이지 않게. 2021. 3. 27.
조각 뒷짐
음영을 이룬 점을 지워 곧은 선을 세우며. 청빛으로 그려낸 묵이 쏟아지는 화폭 안 투박한 선 사이를 누비는 사구의 바다여. 다른 한 켠을 부수어 벼랑을 담금질했던 쓰이지 않는 검으로 망설임을 깎은 이여. 무엇도 흩어내지 못한 폭풍의 눈을 찌르는 감각이 지나는 길을 도려내는 행동을 함에 시간이 잊은 발자취를 구태여 꺼내들었지. 곧은 선을 지워 다시 하나의 점을 찍으며. 뒷짐으로 악수를 하자던, 조각난 맹세의 주검을 불씨에 실어 보내는 일련이었다. 2021. 3. 25.
뿌리
틈새를 비집고 무언가가 들어왔다. 견고하기만 했었던, 나의 철옹성에 낯설기만한 이방인이 발을 붙였다. 이 구멍을 막지 않았던가. 이전에 나의 사람이 빠져 나갔던 곳을 보는 것만으로 구슬피 여겨 그런 걸까. 영원히 한결같을 줄 알았던 거리에 생전 처음보는 발자국이 남아있다. 전투를 두려워한 나머지 한 명의 병사도 없었다. 저 자를 내쫓을 이도, 앞에서 마주할 이도 없다. 남아있는 몇 사람들은 창문을 걸어 잠그고 나는 성 안의 이제 쓰지 않는 방을 열었다. 한 줄기의 빛만 남아있는 돌무덤을 부순다. 역시나 어떤 것도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이곳저곳으로 굴러간 돌을 짊어지고 걷는다. 저 이방인이 혹시나 이곳으로 다시 나갈까. 흔적으로 다른 흔적을 메우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제 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만나게 .. 2021. 3. 25.
Anemone
심을 것이 자명하여도 결국에는 꺾어내겠습니다. 생에 끝으로 보낸 전언, 그때 즈음이면 바래기를 바라며 끊긴 언약은 굳셈이 없으리라고 세치 혀보다 멀리 두어 제게는 줄기 하나 짓이길 힘이 없으니 말을 잊겠습니다. 애초에 덧난 사랑이라도 끝내 아물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머물렀던 공간, 백골이 되어도 채워져 있기만을 한 맺힌 영혼은 떠나지 않을 거라고, 종결 뒤의 시작에서 제게는 아직 같은 종류의 씨앗이 남았다고 말하겠습니다. 시든 아네모네, 오직 그 뿐이던 정원을 보았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도 우리는 꺾기를 기약함과 뿌리내렸으며 지겹다고 농을 던질만한 인연은, 정말로 지겨워질 수 있기를 허나 제게는 오직 당신을 품을 여력 밖에 없기에 떠나겠습니다. 몇 년이 지나면 또 다시, 이 꽃을 한 번 더 심겠다 다.. 2021. 3. 20.
내 어림
좋은 말을 하려고 했다. 당신이 행복했으면 했었다.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남이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이 더욱 많았다고 느낄 땐 그랬었다. 당신을 위했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이 자리에 남아있는 것보다 남이 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들이 더욱 좋겠다고 느낄 땐 그랬었다. 당신의 울음소리를 몰랐었다. 못난 나에게 오는 당신의 이 길이 전부를 쏟아부어 만든 것이라고는 단 한 순간도 떠올리지 못했었다. 2021. 3. 20.
그대
내가 바라던 나에게 하듯, 그대를 내가 익숙한 나에게 하듯, 그대를 그 사이에는 내가 없다며, 그대를 저는 그대를 그리 생각하겠습니다. 적어도, 내가 나를 위하는 이기심보다는 적어도,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맘만큼은 적어도, 그대가 나를 떠올려주는 수보단 저는 그대를 그리 생각하겠습니다. 그대여, 당신이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나는 그대가 꿈꿔왔던 사람이 아니라는 그 사실은 여전히 뒤에 숨긴 그 상태로 저는 그대가 지금 바라는, 그 곁에 머무르겠습니다. 행복하지만 언제나 어색할, 이 따스한 자리 위에서 그대여, 저는 지금보다 더 당신을 염원해도 될까요? 2021. 3. 20.
이기
그래, 눈물도 어딘가로 흐르기는 할 터다. 내 숭고한 감정에 대한 헌정의 끝맺음일지 더 일어서지 못한 자신에 대한 원망일지는 결국, 물줄기가 메말라 붙어버린 곳에서야 그래, 슬픔도 언젠가는 미화되고 말 터다. 받았던 모든 형상에 대한 마지막 답장일지 더 다가서지 못한 순간에 대한 후회일지는 결국, 낙엽을 새하얀 눈으로 덮고 난 뒤에야 내 사랑은 한 때의 이기심에 지나지 않았다며 남은 미련을 성에가 낀 봄이 오기 전에 묻는다. 2021. 3. 18.
기어가는 하루
낡은 목줄이 땅에 끌려 끊어질까. 매 번 기다려달라며 칭얼거리던 기어가는 하루를 품에 안아본다. 조금은 쉬어가도 좋지 않냐며 우리 함께 기어가자고 했었던 네가 그리 내 발치에 밟혔었지. 매일, 팔만육천사백 번의 걸음 언제나 동일하게 기어가던 너는 내 뜀박질에는 너무도 느렸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인데 재촉을 달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끈이 점차 느슨해져 거친 길바닥에 닳고 닳아 끊어지니 내가 매듭을 짓는 동안에도 기어가는 반복되는 하루를 이젠 모를 수 없기에 너를 보며, 낡은 줄을 목덜미에 감았다. 우리는 두 발로 여전히 기어간다. 2021. 3. 18.
그 날에
언젠가 따오겠다는 약속이 떨어지는 날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들을 셈하기 시작했다. 달뜬 숨이 빗어 내린 풀잎의 은은한 향기 뺨을 타고 내려오는 달빛의 수줍은 표정 여전히 생생하니, 느낌에 거침이 없었다. 다만, 내가 다짐했던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외투를 걸치고, 잠옷차림으로 발을 들었다. 그 날에 결여된 것이 있어, 그곳으로 향했다. 약속이 도달하고 난 뒤, 나는 도착했다. 나와는 다르게 여전히 앳된 얼굴의 그녀가 있던 그때의 자리에 서서 고개를 서서히 내려보았다. 그 날은 그때의 날에 머무르기를 원했었고 그때는 그 날의 때에 남아있기를 꿈꿨지만 조금은 자랐어도, 여전히 나보다 작은 아가씨가 내 발을 물끄러미 바라본 채 굳어 있는 걸 보니 그 날에 다짐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2021.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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