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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낡음에 뭉개진 글자가 즐비했으나 나는 좀처럼 읽어낼 수가 없었다. 여림이 자라나, 그 명랑한 이상을 그저 서서히 키워나갈 때였을까. 거친 손길이 이 날을 해칠까 두려워 무심코 눈물을 짜내어 적셔내었다. 축축이 젖은 글이 번져 지워졌을까. 나는 또 한 번의 편지를 적어내었다. 어느 미래에, 읽을 수 없는 나에게. 2020. 11. 21.
이유
날마다 몸을 일으켜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푸른 여명 아래, 꺾인 발자국이 즐비한 거리 위 녹아내린 밑창에 멈춰 선 우리들을 목격했었다. 어쩌면, 자욱한 꿈결 안에서 눈을 잃지 않았던가. 그리 허망함을 표하여 펜을 잡을 핑계를 대었다. 곧게 편 허리에 제멋대로 휜 손가락이 겹치고 색 바랜 시간을 역하게 느껴, 잉크를 뿌려냈다. 이 활자들은 무엇을 동경하여 이다지도 욕됄까. 어느 날, 여전히 후일이 오기를 바라마지 않을 끝 앞에서 심연을 마주하여도 알지 못할 터였다. 별 이유 없을 황혼을 지새워 그리며, 오늘을 세고 탓함은 언제나 친숙한 것에 있음을 앎에 흐느낀다. 그렇게, 내게는 별 볼 일 없을 하루가 또 다가온다. 2020. 11. 21.
헤아리다
녹슨 추의 바닥에 저울을 가져다 대었다. 어느 때인가, 무죄의 무게에 고개를 숙인 저지르지 않은 잘못에 마음을 졸이던 날 그 하루의 끝이 아닌 시작을 바랐던 나를 언젠가 올 때, 엮지 못한 손가락을 세우며 새기지 않은 약속에 온 기대를 보내던 날 그 하루의 맺음이 아닌 영원을 바란 나를 옛적에 한쪽으로 기울어진 애꾸의 눈물은 낯익은 꿈결에 파묻혀 당연히 여겨질 테니 그 착각의 깨우침이 아닌 우매함을 바라며 헤아림을 포기할 수 있는 법을 헤매이며 바닥에 닿은 수많은 추를 받치는 날들을 그렇게 생의 영원이 아닌 맺음을 바란 나를 저울판의 바닥에 내 살갗을 가져다 뉘이며 없을 날 중, 바람이 멎을 시기를 헤아린다. 2020. 11. 19.
벗꽃
풍파에 비해 한 없이 작았던 내 벗이여. 정처를 잃은 듯, 결심의 어귀에서 서성인 혹여나 재차 회귀하는 궤도 위를 걸었던 멎은 풍경에서 과연 무엇을 투영했었나. 선명한 투명함에 젖어 굴절된 벗이여. 향을 피워 나를 불러내었던 초로의 너를 표피 아래에 묻어둔 채, 맡으며 보고 있어 이미 시들고만 꽃을 내 손등 위에 올리네. 혹시 이 작은 태동이 느껴지는가, 벗이여. 추억으로서 만족하며 지금에 남은 이여. 자네를 떠민 풍도를 타고 다시 왔다네. 그 때에 남겨두었던 한 떨기 내 벗이여. 2020. 11. 18.
없을 것들
힘이 들어 그랬을까, 분에 겨워 그랬을까. 나중으로 밀어둔 눈물이 결국 넘쳐흐른다. 어쩌면 편했을까, 어쩌면 좀 더 나았을까. 무심함으로 이미 유심을 표한 지나옴이다. 그렇다. 나는 그 무엇도 모르는 멍청이다. 발견이라고, 발명이라고, 깨달음이라고 이미 가능했던 일이 새롭게만 느껴지던 여전히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 뿐 앞으로, 계속 모든 걸 헤아려 가야함을 나는 더 이상 무지에 주저함이 없으리. 2020. 11. 17.
시간
한껏 녹은 초침이 방울져 떨어지니 언젠가 내 등불이었던 불씨를 모아 있는 한 살며시, 아련히 끌어안았다. 그런 바람이 뒤돌아서고, 끝내 불어와 한 여름밤, 불청객의 한기가 감도는 날 마음마저 온기를 잃어 끝내 얼어붙으니 내게 일 초란 더는 소중히 여기지 않고 또다시, 분침이 녹아 흘러내리고 만다. 언제나 무심코 걸었듯, 내 시간의 한 켠 어느 깊은 곳에서 조용히도 흘러내린다. 희끗해진 시야만큼, 더는 타오를 것 없는 삶 시계 위에 우두커니 서 바닥을 바라보니 마침, 허망히도 시침이 떨어지는 참이다. 익숙한 숫자들과 더는 돌아올 수 없는 그리움 지나간 그때, 그 날의 순간들이 어디에 있을지 평범한 나는 단지, 늘 다급해 중요함은 뒷전이었기에 녹아내린 시간을 하릴없이 기억으로 음미할 뿐이었다. 2020. 11. 15.
관계의 늪
글은 지우면 그만이고, 말은 잊으면 그만이었나. 차분한 걸음으로, 찰나의 주저도 없이 걷겠다면서 서로 다른 모습을 그려내, 한 걸음씩 멀어지기만 한 마모된 감각으로는 본인이 만진 게 대체 무엇인지 아무리 내 감정을 부르짖어도 오지 못하는 것임을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해, 등을 맞대어 외면한다. 지금껏, 답을 알았다면 풀어내었음이 당연했다. 품어왔던 예전을 모조리 뜯어내는 일이 되려 허해 아직 발견되지 못한 난제 앞에서 만용을 부려버린 만화경을 족적 위로 세워도 헤아릴 수 없는 무엇은 아무리 내 잡념을 찢어보아도 흩지 못하는 것임을 우리는 지금도 알고 있어, 여전한 너를 바라본다. 언젠가, 내가 바라지 않아야 할 그 날이 오면 언젠가, 서로 말했던 당신을 마주하게 되면 그 때, 그제야 미련 없이 적어낼 수.. 2020. 11. 14.
한 번
단 한 번 휘둘러, 너의 그림을 그려라. 바래질 때가 두려워 손을 들지 못할까. 단 한 번 소리쳐, 너의 생각을 말해라. 한낱 호통이 두려워 입을 열지 못할까. 단 한 번 일어서, 너의 항로를 보아라. 거센 풍랑이 두려워 출항하지 못할까. 단 한 번 뻗어서, 너의 사람을 안아라. 떠나갈 날이 두려워 만나지를 못할까. 단 한 번 돌아서, 너의 기억을 걸어라. 지나온 길이 두려워 돌아가지 못할까. 2020. 11. 11.
쓰다
느린 정취, 순흑의 강에 띄운 의념이여. 반전된 표면에 남아있을 허한 들판과 씨앗으로써 늙음을 나타낸 내 벗이여. 부디, 이질감이 이 평온함에 희석되어 삽시의 형태가 의연한 흔적을 남기기를 불어와, 형상을 잊은 바람에게 말하라. 이 손가락 끝에 애처로이 매달려있는 검붉은 나의 산행이 흐릿히 퍼지기를 피륙으로 일구어낸 일부의 전부를, 마침내 당신을 그리며 마련해둔 보잘것없는 공간에 사선의 토악질을 해내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잉크가 마르지 않는 이 낮은 활기가, 돌아오는 길로 우울의 실타래가 만개할 수 있는 이 평야에 오기를. 없는 기약을 마치며, 언제라도. 2020. 11. 10.
한 줄
낙서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 정도 그리겠다며 짧은 선 하나를 천천히 그었다. 내일 서 있는 장소, 그 높이에선 끝자락조차 종결되는 모습일지 평탄하여 여유를 부리게 될지는 알지 못하나 일단 연필을 들었다. 아쉽게도 지울만한 수단이 없었다. 잘못 새겼다며 손으로 성의를 다해 열심히 비벼보지만, 묻어날 뿐이다. 선의 끝이 맞물리고, 서로 스치며 함께하지 못한 장면이 들이친다. 선명하나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그런 윤곽이 눈꼬리를 타고, 울컥 격하게 솟아올라 그었던 선 위로 뚝하고 떨어져 희망을 전해왔다. 2020.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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