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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기록하기 위해 나는 단지 흩뿌려졌다. 생명과 회복을 위하여 나는 그 뿐으로 쓰였다. 맑지만은 못한 것이 그렇다고, 마냥 더럽지는 못한 것이 어느 위인의 갈증이 어린 탄생의 귀퉁이 한 자리에 시간을 엮어 현재를 쓴다. 2020. 12. 16.
순수
작고 가녀린 손발은 귀하에겐 재앙으로 여겨졌겠죠. 아이는 순수함을 빗대어 책임 없이 돌아갔을 테고요. 졸지에 헐벗은 나무는 밤바람이 시려 몸을 덜덜 떨고 가장들은 모든 의미를 잃고, 포장된 땅 위에 서있네요. 당신의 심중이나 사연이 어떻든, 다음 날은 돌아오니 때 한 점 없는 옷을 입고 아이도 다시 이곳에 오겠죠. 부러진 가지, 도망치지 않는 개미가 을씨년스러웠을지 우렁찬 울음을 듣고 멀리에서부터 몰려오는 발걸음에 여러분의 마지막 흔적 또한, 아무 것도 아니게 될 테죠. 2020. 12. 16.
손톱으로 찍어낸 것
높다란 절벽 오래도록 긁어내 우리가 설 대지를 만든 파도가 내게는 그리도 외로워 보였다. 비산하는 물방울과 진흙 사이의 비좁은 공간 끝에 위태로이 앉아 낮밤이 교차하는 때를 하염없이 기다려 우두커니, 낡게도 지키니 어느 날의 흔적과 같이 우리는 결국 나와 너로 도형으로, 선으로, 점으로 되짚어 돌아가기를 끝내 한 해의 마지막 입김을 지워가듯 손톱 밑의 때로 빚어낸 내 의미와 함께 언젠가는 쓸려내려 갈, 우리의 평안 근심 없이 편히 몸을 뉘어둘 고향으로 어쩌면, 지난 날이 한스럽게도 지쳐있었던 것은 유난히도 애달팠던 내 청춘에 흉이 져버린 것은 지금의 내 심중이 그처럼 살아가라 했던 탓일까. 2020. 12. 11.
위하며
당신이 밟고 있는 것과 같이 당신이 내쉬는 것들과 같이 저도 당신에게 있습니다. 얇은 시집의 이야기와 같이 굵은 서적의 지식들과 같이 저도 당신에게 있습니다. 내가 부디 당신에게 있어 떠오르는 샛별처럼 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빌며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잊히고 다시 써진 역사처럼 함께 지워질 기억으로 남겠지만 잠시 당신 곁에 있는 것으로 저는 그 뿐으로 행복합니다. 2020. 12. 11.
석양
황혼의 첫 단추, 노랗게 물드는 빛을 보며 나는 다음 날의 탄생을 기대하는 이였다. 늙음 끝에 다른 생을 기약하는 자연들 당연한 듯 곱게 피어날 미래를 기다리는 그런 끝맺음이 좋아도 설명하지 못했다. 어둑해지는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렇게 홀로 훌쩍이며 뒷걸음질 치는 그들을 그렇게 그저 어딘가의 끝자락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시절은 숨을 돌리지 않아 나는 어른이 되어야 했고 한 겨울, 어둑한 모퉁이에서 차분히 만개할 그 익숙하던 빛줄기가 그토록 보고 싶어서 새벽 공기 마시며 네 웃음을 기다리는 지금이 그리 기대가 되어 두 볼에 시린 홍조가 일었다. 돌아온 계절 속, 나는 또 다시 몸을 뉘일 곳을 찾으니 이제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품을 한없이 헤매어 불안하기 짝이 없을 네 곁에 머물러 이기심을 채운다. 2020. 12. 8.
소리
가늘게 떨리는 소리는 언제나 귓가를 맴돌고 무겁게 누르는 소리는 언제나 발을 붙여냈다. 젖은 머리를 스치는 바람은 대기를 현 삼아 나를 울려 스스로 박자를 맞추게 하고 습한 공기가 밀려오는 계절은 물이 천천히 떨어지는 동공과 땀에 눅눅히 젖어오는 옷깃을 좀 더 투명하게 비춰 내었으니 그 옛에 물길이 바람에 열리듯 바랜 이야기는 잉크로 적시고 수줍게 전한 말을 말없이 안아 찡그림이 없이, 그저 눈꼬리 들어 웃었다. 2020. 12. 8.
사명
싸늘히 식은 손등 위로 낯익은 고동이 내려앉았다. 격렬한 몸부림이 주마등의 표면을 훑어내고 죽은 피를 들이켜는 심장을 거세게 쥐어내니 손아귀에서 짓쳐 오르던 환희가 터져나간다. 그저 안으로 들어가던 단말마가 지겨웠을지 그리도 두려워하던 내 영혼은 숨을 삼켰다. 무딘 감각이 차츰 돌아오며, 나는 눈을 감았고 피륙은 제 의지를 펼쳐내려 몸을 뒤틀어대었다. 육신을 구성하던 것들이 과분한 삶을 찾아 헤매니 어느 공포가 또 다가올지, 경험은 고개를 숙였으나 아직 남은 흥분이 제 멋대로 눈꺼풀을 들춰내었다. 빛이 틈새를 열고 스며드니 혈액이 달궈진다. 열기를 품고, 방금 폐쇄한 길을 뚫으니 동공이 초점을 품고 이리저리 흔들린다. 끝내 나는 보았다. 나를 찾아왔을 때처럼 천천히 피어오르는 생을. 2020. 12. 7.
사랑에
눌러쓴 언약, 아득한 바람이 바래지는 그 언젠가를 기다리는 한 때의 마음에 따듯한 겨울, 눈꽃이 아름답게 피었던 그 계절을 녹여내었던 영원의 설렘에 새하얀 세상, 온기에 녹아내릴 숨결이 기쁨임을 상기하며 참아내었던 이전에 너에게, 염치없이 바라는 것이 있음에 나에게, 우습게도 원하는 것이 있음에 삶에게, 늦은 욕심이라는 게 생겨남에 첫눈, 함께 맞이하고픈 욕심을 품고 고마움과 감사에, 그에 힘을 얻어낸 너무나도 과분하기만 할 감정, 제 주제를 몰라 날뛰는 동경에 2020. 12. 6.
나체
시절 귀퉁이, 나체로 활보할 때가 있었다. 시선에서 벗어나, 없을 때를 기다리고 알지 못하는 곳을 섬세하게 그려본다. 먹먹함을 토해내도, 그것에 먹히지 않을 내가 아무 것도 아니게 될 곳을 그린다. 길게 빼어 든 혀로 초를 잰다. 이곳은 홀로 있어야 할 장소다. 침해받는 것이 아니라, 없어야 할 곳이다. 너는 절대로 이런 곳을 동경하지 말아라. 정체된 이 순간은 너무 높아 네가 보이기에 몸을 흔들어 없어진 때를 지워가야 하니까. 2020.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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