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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글102

일련
거리 위에 피어난 아지랑이가 세상을 녹여내었다. 풍파에 익숙해져 끝내 둔탁해진 외벽을 부숴내고 힘들여 세운 열의를 흩어내던 바람을 조각내었다. 잿더미를 빚어 세운 숲에 태양은 떠오르지 않으니 우리는 좀 더 높은 곳을 선망하여 하늘을 우러렀다. 욕망은 우리를 만들었고, 또한 우리를 지어냈으니. 바람에 실린 열기가 남몰래 숨쉬던 불씨를 틔웠다. 끓어오르는 땀은 두꺼운 피부를 녹여내어 흐르고 발걸음이 진득하게 늘어붙어 굳은 살을 떼어내니 공든 숲이 몰락하며 언젠가 놓아둔 새싹이 돋아났으나 우거지는 수목 아래, 우리는 좀 더 환한 빛을 떠올렸다. 2021. 2. 15.
변화
빈틈을 채우는 삶이 야속해질 무렵에 어느새 무뎌진 자신들을 발견했을까. 제 살을 베어내던 칼에 푸른 녹이 슬었으니 하잘 것 없는 쓰임새마저 사라질 게 두려워 덧난 상처를 갈고 닦아 언젠가를 돌려내었다. 추억이 될 시간 어귀, 과거는 미래를 쫓을 뿐. 남은 핏기를 증발시킨 나잇살의 점성 아래 익숙한 핏덩이를 가꾸는 단에 머리를 뉘여 지금을 삭히던 향기를 멀리로 떠나보낸다. 어느 날의 태양은 한 없이 시리기를 바라며. 마음 한 켠에 고이 매어둔, 성에가 낀 내 꿈결들을 언젠가 꺾인 지성이 나를 거대한 아이로 만들 때에 조금 남은 기억으로 하여금, 현재를 잊기를 바라며. 이 모든 변화들이 결국 닳아없어질 순간을 기다리겠다고. 2021. 2. 9.
불청객
없는 것들로 가득찬 공간에 불청객이 들어왔다. 밀폐된 방안에 갇힌 바람 한 줄기처럼 본인도 이곳에 있는 연유를 모르는 듯한 초대받지 못한 이는 그런 부류의 것이었다. 불청객은 이곳저곳을 오가나, 자리잡지 못한다. 군중 속에 묻히며 잊어버린 개인의 사념처럼 본래의 목적조차 손에서 놓쳐버린 듯한 놀이동산에 홀로 있는 아이와 같은 것이었다. 여전히 적막한 공간에 다른 불청객이 들어왔다. 사연 안에 들여놓지 못하는 기이한 친우처럼 상식이라는 단어로 근본을 외면한 듯한 꿈을 직업의 하나로써 단정해버린것이었다. 나의 공간에는 많은 것이 있으나, 이처럼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2021. 1. 21.
사이에서
난잡하게 흩어진 도처의 안개를 정화하는 작은 이들을 사랑하는 그런 존재들이 곁에 있습니다. 여러 안구를 이리저리 돌리며 우리의 몸에 혹시나 해가 될까 막연히 우릴 피해 달아나는 그런 것들이 숨 쉬고 있습니다. 높게 세워진 건물의 창문은 빛을 인위적인 수목들의 잎은 물을 그들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조용하게 깨작이고 있습니다. 어둠이 도처에 길게 드리울 때면 그들은 그 날의 이야기를 하고 우리들에게 지저귐을 들려줍니다. 평온한 수면 아래, 빛을 머금을 수 있도록 2021. 1. 21.
성정
깨진 유리의 균열 속에 일그러진 운명은 회복되기엔 그른 듯 했다. 굴곡은 음울한 색채를 튕겨 갈라진 음향을 울려내고는 적막 위로 올라서 울컥였다. 나는 짙은 한숨에 스스로 먹혀 검붉은 기침을 토해내고 있다. 세상에 떠 있는 밝은 빛에 의지하려다 눈이 멀어버린 자신을 미치도록 경멸하며 보이지 않는 모서리에 몰려 굽은 등을 차갑게 식히며 발 끝에서 불꽃을 피운다. 2021. 1. 21.
나는 무엇을 보았나
나는 보지 못했다. 두 갈래로 나뉘어진 숫자의 길 뒤편에 홀로 웅크려 작은 숨을 내쉬던 너를 나는 아쉽게도 보지 못했었다. 너는 나를 보았다. 이것이 과연 맞는 길일지 묻는 이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걸어가는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었다. 나는 보지 못했다. 고작 한 번의 까딱임으로 볼 수 있던 눈 밑에 매달린 작은 비명과 애달픔을 너는 보았지만 나는 그토록 애원하던 스스로를 보지 못했던 상상을 했었다. 2021. 1. 21.
대답
시간의 초침 위에 앉아있는 삶의 무게에게 올해가 되어 유난히 살이 찌지 않았냐고 떨리는 손끝처럼 흔들리는 말이 닿았다. 한없이 투명한 꽃잎이 펄럭이며 내게 오니 한기가 스미는 팔을 쓰다듬어 떨고 있었다. 밤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지만 다른 연유가 있는 것이냐고 질문하나 삶에게 대답이 없었듯, 꿈에게도 입이 없었다. 우리는 대체, 누구에게 물어봐야 했을까. 2021. 1. 21.
피학 어귀
기댈만한 곳은 더 이상 없다. 우두커니 서서 성을 내는 썩은 기둥 지독한 한이 호선에 얼음꽃을 피운다. 뒷걸음질은 기피를 밟고 머무르기만을 바랐었던 호흡은 풍압에 형태를 잃었다. 이렇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된 것이라고 자위한다. 덧없는 시간으로 쌓았었다. 퀴퀴한 향이 지나온 때를 추모함을 도서관의 한 책장, 작별 인사로 메워 탑이 기움을 더하고 그림자를 만든다. 피학 어귀, 서성임은 멈추지 않는다. 2020. 12. 21.
여명 직후의 황혼
백색 음영이 땅거미를 삼킨다. 생명이 없는 터전에 색조를 풀어 투명했던 공허의 틈을 메운 후는 나에게서 비롯한 것이 아닐 터다. 그리, 발을 굴러 울림을 덮어본다. 굽은 녹, 이 날붙이를 전부로 삼았었다. 붉은 실선의 양 시발을 잘라내어 첨단을 망설임과 함께 두었었고 나는 나를 위한 짐에 파묻히기를 이리, 고개를 저어가며 반복한다. 어둑한 그늘의 가루를 손에 쥐어 이 늘그막이 다시금 내려오기를 달이 뜨지 않은 밤을, 한사코. 난, 여전히 저항을 반복하는 등불 앞에서 명멸의 끄트머리가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또, 여명 직후의 황혼에서 고개를 파묻는 어제다. 2020.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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